폭염에 그대로 노출된 장비도 많다. 육군과 해병대의 핵심무기인 전차와 자주포·장갑차 중에서 에어컨이 설치된 차량은 극소수다. 올해와 같은 폭염이 아니더라도 하절기에 차내 온도는 40도를 쉽게 넘어간다. 상부 해치를 닫으면 50도 이상으로 올라간다. 폭염에 달궈진 쇳덩어리 차체와 엔진에서 나오는 고열로 기갑차량 승무원들과 승차보병들은 죽을 맛이다. 기계화보병사단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했던 중앙부처의 한 국장은 “한여름의 K200 장갑차는 한증막과 가마솥을 합친 것 같았다”고 기억한다. 지금의 여건도 4반세기 전과 다른 게 없다. 해병대의 상륙장갑돌격차에도 에어컨이 없다.
국내 전차 중에서 에어컨과 양압장치를 갖춘 장비는 100여대 남짓한 K2 전차뿐이다. 기갑장비를 통틀어 K2 전차와 K21 장갑차, 대공화기인 비호와 천마, K 277A1 지휘장갑차 정도에만 에어컨이 달렸다. 육군은 K1 전차와 K1A1 전차를 K1E1 전차와 K1A2 전차로 개량하면서 에어컨 부착을 추진했으나 합참에 의해 묵살됐다. 그동안 K1 전차 개량형의 에어컨 장착 여부에 대해서는 △장착됐다 △장착형과 미장착형 두 가지가 나와 부대마다 다르다 △지금까지는 달지 않았으나 올해 개량분부터는 장착한다 세 가지 설이 떠돌았으나 모두 사실과 다르다. 계획물량의 20% 정도가 개량된 이 사업에서 에어컨을 장착하는 개량은 이뤄지지 않았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계획이 없다.
자주포도 상황이 비슷하다. K9 자주포에는 달렸을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지 않다. 수출형에 장착됐을 뿐이다. 개량된 K 55A1 자주포에 양압장치가 달렸다는 얘기도 잘못 알려진 것이다. 개량이나 창정비를 거치면서도 양압장치를 달지 않은 명분은 두 가지다. 예산과 한국적 전장환경에 불요불급한 장비가 아니라는 것. 장병들의 개선 요구에 눈감던 합참이 K277 지휘장갑차를 K277A1로 개량할 때는 에어컨을 달아줘 형평성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
기갑차량의 에어컨은 단순한 편의장치가 아니다. 차내 기압을 올려 NBC(핵·생·화학전)로 오염된 외부 공기를 차단하는 양압장치의 일부다. 지난 1980년대 이후 등장한 기갑차량에는 대부분 이 장치가 달려 있다. 양압장치가 없는 한국군은 유사시 NBC 전장환경을 만나면 방독의와 방독면을 갖추고 전투에 임해야 할 판이다. 40~50도인 차내 환경에 방독면 등까지 착용하고 전투가 가능할까. 병사의 체력과 정신력이 아무리 강해도 고온에 오래 노출되면 전투력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에어컨을 포함하는 양압장치는 전투장비이자 생존장비다. 실전상황이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폭염이라고 장병들을 생활관에만 묶어둘 수 있을까. 폭염을 극복할 수 있는 장비를 주고 훈련을 시키는 게 훨씬 낫다. 올해와 같은 폭염이 지속된다면 최우선순위에 둬야 할 사업이다.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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