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2~6일) 직전 전국을 뜨겁게 달궜던 24조원 규모 예비타당성조사(예타) 면제를 둘러싼 논란이 빠르게 사그라지고 있습니다. 적지 않은 국민 세금이 빨려 들어가는 대규모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을 최소한의 경제성도 따져보지 않고 추진하겠다는 것인데, 발표 당일(지난달 29일)과 이후 하루 이틀 정도 이슈가 됐을 뿐 연휴를 넘기면서 잠잠해진 모습입니다.
한바탕 치받았을 법도 한 정치권도 모처럼 조용합니다. 여야 할 것 없이 비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상당수 국회의원들이 예타 면제의 수혜를 입었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실제로 이번 예타 면제는 서울을 제외한 전국 16개 시도 광역자치단체가 골고루 ‘나눠 먹기’를 했습니다.
이변이 없는 한, 정부가 발표한 예타 면제 사업은 오는 2029년까지 앞으로 10여년 간 추진될 것입니다. ‘버스는 떠났다’지만, 그럼에도 국민 혈세가 24조원이나 들어가는 국가 사업을 경제성 조사도 없이, 심지어 경제성이 없다고 이미 판명 난 사업에 대해서도 강행해야 하는 지는 두고두고 곱씹어 볼 문제입니다.
◇‘경제성 없다’ 판명에도 예타 면제 무리수=정부는 지난달 29일 23개 사업에 대한 예타를 면제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총 24조1,000억원 규모입니다. 예타는 대규모 공공사업을 추진하기 전 정책성, 경제성, 지역 균형발전 등을 따져보는 절차입니다. 예산 낭비를 최소화하자는 목적으로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도입됐죠.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조사를 수행합니다.
이번에 발표된 사업은 총 23개 입니다. 이 가운데 지역별 연구개발(R&D) 투자 5건을 뺀 18개 사업이 공항을 만들고 철도·도로를 까는 SOC 사업, 소위 토건 사업입니다. 드는 비용만 20조원 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대형 공공사업을 경제성 조사도 생략한 채 추진해도 되는 것이냐는 점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현 집권 여당이 MB 정부 시절 추진된 4대강 사업을 두고 “예타도 없이 혈세 22조원을 쏟아 부었다”며 비판한 것도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입니다.
국가재정법 38조를 인용하면 예타 면제는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지역 균형발전, 긴급한 경제·사회적 상황 대응 등을 위해 국가 정책적으로 추진이 필요한 사업’으로 대상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정부가 발표한 사업의 상당수가 이러한 요건을 갖췄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표하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가) 예타 면제 근거로 지역 균형발전을 내세우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 궁색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고 꼬집었습니다.
정부 스스로 논란을 키운 측면이 있습니다. 정부는 이러한 대형 SOC 사업이 지역 균형발전으로 이어진다는 명쾌한 증거 자료를 내놓지 못했습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과거 정부에서 추진한 예타 면제 사업이 지역 경제 활성화에 영향을 줬다는 효과 분석 자료가 있느냐’는 질문에 “효과를 정리한 자료는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민간 전문가는 “지역 균형발전 명분은 허울일 뿐 사실상 내년 총선을 겨냥한 선심성 결정에 불과하다”고 비판했습니다.
예타 면제 대상에 포함된 상당수 사업이 과거 예타 때 사업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았던 사업이라는 점은 더 큰 논란거리 입니다. 김천~거제 172㎞ 구간을 잇는 남부내륙 고속철도(KTX) 사업이 대표적입니다. 단일 사업으로는 가장 많은 4조7,000억원이 들어가는 이 사업은 문재인 대통령 측근인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후보 시절 공약 1호로 내걸어 ‘김경수 KTX’로 불리기도 한 사업이죠. 남부내륙철도 사업은 지난 2017년 진행된 예타 때 조사위원 만장일치로 “사업을 하지 않는 것이 하는 것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1.0을 넘어야 비용 대비 편익이 있다는 의미의 경제성 조사(B/C) 점수가 0.72에 그쳤습니다. △미호~강동 울산 외곽순환도로(1조원) △울산 산재 전문 공공병원(0.2조원) △서남해안관광도로(1조원), △부산신항~김해고속도로(0.8조원) 사업도 예타에서 탈락한 사업들입니다. 서울대의 이 교수는 “문제는 SOC 투자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큰 규모의 공공사업들에 대해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당연히 이뤄져야 할 예타 의무를 면제시켜준 데 있다”면서 “무슨 사정이 있었기에 이런 무리수를 뒀는지 도대체 납득할 수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8,000억원이 들어가는 새만금 국제공항 건설에 대해서도 우려가 큽니다. 무안공항, 양양공항 등 제대로 된 수요 조사 없이 덜컥 지방공항을 만들었다가 세금만 축내는 ‘유령 공항’으로 전락한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타 면제 목적은 경기부양? 지역 균형발전?=정부는 4대강 사업(22조원)보다 많은 24조원 규모 예타 면제가 결국 경기 부양 때문 아니냐는 의심을 철저히 배격합니다. 고용·투자 등 경제 지표가 추락을 거듭하는 최악의 상황에서 정부로서는 경기 부양 효과가 큰 토건 사업의 유혹을 강하게 느꼈을 겁니다. 그럼에도 경기 부양 목적이 아니라는 점을 누차 강조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과거 인위적인 경기 부양을 위한 토목 사업은 없을 것이라고 천명했던 터라, ‘내로남불’ 비판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 전략일 겁니다. ‘대규모 토건 사업 추진은 문재인 정부의 경제 패러다임과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에 홍 부총리는 “1~2년 경기 부양을 목표로 사업이 추진됐다기 보다는 10년 넘는 안목으로 추진됐다는 점을 알아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정부가 내세운 명분은 국가균형발전입니다. 지방을 연결하는 철도·도로가 낙후 지역을 발전시키고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논리죠. 하지만 이번 예타 면제 대상 중 굵직한 사업들은 과거 예타에서 지역 균형발전 기여가 낮은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울산 외곽순환도로 사업의 경우, “지역낙후도 개선 측면에서 시행 효과가 낮다”고 조사됐고 포항~동해 동해선 단선 전철화 사업도 지역경제 활성화 효과 지수가 이전에 진행된 다른 철도사업보다 낮게 나왔습니다. 무엇보다 예타 면제가 집중된 영남권의 경우 지역 발전 정도가 높은 축에 속하는 지역입니다. 국가균형발전이라는 취지가 무색해지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이 와중에 경제성 덜 보겠다는 정부=‘경제성이 떨어지는 데도 예타 면제를 강행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와중에 정부는 예타 시 경제성 분석 비중을 낮추는 쪽으로 제도 개선에 나서겠다고 밝혀 전문가들 우려를 키우고 있습니다. 홍 부총리는 “경제성 평가 비중이 너무 커서 지방이나 낙후 지역은 예타를 통과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며 경제성 분석 비중을 낮추겠다는 취지로 제도개선 방향을 언급했습니다. 인구가 적은 지방자치단체의 건설사업은 수요가 떨어지는 탓에 경제적 타당성을 확보하는 데 불리하다는 일부 지적을 수용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타는 경제성이 통과를 좌우하는 절대 기준이 아닙니다. 정책적 필요나 지역균형발전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면 경제적 타당성 부족을 만회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KDI의 한 관계자는 “경제적 타당성을 고려할 때는 그 사업으로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는지보다 국민 복지나 사회적 편익을 화폐화한 비용이 더 중요하다”며 “경제성이 부족한 경우라도 정책적으로 필요하거나 지역균형발전에 크게 도움이 된다면 예타를 통과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재영기자 jyha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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