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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경 LG명예회장 빗속 발인...마지막까지 소탈했다
산업 기업 2019.12.17 09:17:49지난 1970년부터 1995년까지 25년간 LG그룹에서 2대 회장을 지낸 ‘상남(上南)’ 구자경 명예회장의 발인이 서울 모 병원에서 유족과 LS·GS 등 ‘범LG가’ 총수들, LG그룹 주요 계열사 임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7일 치러졌다. LG그룹은 평소 소탈한 성품을 가진 고인의 뜻을 기려 서울 모처 병원 장례식장에서 비공개 가족장을 치렀으며 별도의 영결식을 진행하지 않고 발인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오전8시에 시작된 발인식은 구 명예회장의 아들 내외, 딸 내외, 직계손주 등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고인의 마지막을 기리는 묵념과 추도사, 헌화 등으로 진행됐다. 추도사는 이문호 LG공익재단 이사장이 맡았고 발인식은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30여분간 진행된 후 마무리됐다. 장지는 유족의 요청에 따라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 빈소에는 고인의 마지막 길을 추모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모였다. LG그룹 임직원 중에서는 하현회 LG유플러스 부회장을 비롯해 권영수 LG 부회장, 정도현 LG전자 사장 등이 아침 일찍부터 빈소를 찾았다. ‘범LG가’의 모습도 보였다. LS에서는 구자열 LS 회장, 구자균 LS산전 회장, 구자은 LS엠트론 회장이 발인식에 참석했고 GS에서는 허창수 전경련 회장, 허동수 GS칼텍스 명예회장,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날 회장, 허태수 GS그룹 회장, 허세홍 GS칼텍스 사장, 허윤홍 GS건설 사장, 허정수 GS네오텍 회장, 허승조 태광그룹 일주 학술문화재단 이사장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 명예회장은 LG그룹 창업주인 연암 구인회 초대회장의 6남4녀 중 장남으로 1970년 45세의 나이에 2대 회장에 올랐다. 이후 1995년 장남인 고(故) 구본무 전 회장에게 자리를 물려줄 때까지 25년간 LG그룹을 이끌었다. 구 명예회장이 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LG그룹은 전자와 화학을 주력으로 삼아 성장을 거듭해 취임 당시 260억원이었던 매출은 30조원대로 약 1,150배 증가했고 임직원 수는 2만명에서 10만명으로 늘었다./변수연기자 diver@@sedaily.com -
'위대한 기업가와 끝까지 함께…' LG 사장단 합동 조문
산업 기업 2019.12.16 17:26:31구자경 LG(003550) 명예회장의 장례 사흘째인 16일 오전 서울 시내 모 병원 장례식장에 LG사장단 30여명이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냈다. 구 명예회장의 마지막을 함께하려는 LG 사장단 30여명이 빈소에 합동 조문을 온 것이다. 하현회 LG유플러스(032640) 부회장을 비롯해 신학철 LG화학(051910) 부회장, 차석용 LG생활건강(051900) 부회장뿐 아니라 올해 새로 선임된 정호영 LG디스플레이(034220) 사장, 권봉석 LG전자(066570) 대표도 나타났고, 박일평 LG전자 최고기술책임자(CTO), 송대현 LG전자 사장, 박형세 LG전자 부사장 등도 함께 빈소를 찾았다. 권영수 LG 부회장은 첫날부터 빈소를 지켰다. 이들은 50여분간 장례식장에 머물며 유족들을 위로한 뒤 28석 규모의 리무진 두 대에 나눠 타고 빈소를 떠났다. 대부분이 조문 후 ‘고인과의 인연’ 등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대답 없이 굳은 표정으로 차량에 올랐다. 이밖에 비공개 장례식임에도 정의선 현대자동차 수석부회장, 최태원 SK 회장, 허태수 GS그룹 회장,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최정우 포스코 회장, 정몽규 HDC그룹 회장,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 김재철 동원그룹 명예회장,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등 정·재계 인사들이 장례식장을 찾아 애도를 표했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조문을 마친 뒤 “여러분들께 존경받던 분으로, 매우 신중하시고 침착하셨으며 대단히 훌륭했던 분”이었다고 고인을 회고했다. 구 명예회장의 장례식은 고인의 뜻에 따라 조문·조화도 사양하고 비공개 가족장으로 조용히 진행됐다. 다만 고인이나 가족과 인연이 있는 경우에 한해 조문을 받았다. 고인의 손자인 구광모 LG 회장을 비롯한 직계가족들이 빈소를 지켰으며 상주는 작고한 장남 구본무 LG 회장 대신 차남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이 맡았다. 장례는 4일장으로 치러지며 발인은 17일 오전이다. 장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변수연기자 diver@@sedaily.com -
[구자경 LG 명예회장 별세]허창수 "산업화 기틀 만든 선도적 기업가"
산업 기업 2019.12.15 17:43:04재계가 지난 14일 별세한 구자경 LG(003550) 명예회장에 대해 일제히 애도를 표했다.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은 15일 ‘한국경제의 주춧돌이셨던 구자경 회장님을 기리며’라는 추도사를 내고 “한국 경제를 밝게 비춰주셨던 회장님께서 이렇게 갑작스레 떠나시니 가슴 속 깊이 끝없는 슬픔이 솟구쳐 오른다”며 “이제 회장님의 따뜻한 미소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에 하늘이 원망스럽게 느껴지는 하루”라고 애도했다. 허 회장은 “돌이켜보면 회장님께서는 이 땅에 산업화의 기틀을 만드셨던 선도적 기업가셨다”고 회고했다. 이어 “한국에 제조업이 태동할 무렵 직원들과 함께 국민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제품을 만들어 보자는 의지가 우리나라 전자·화학 산업의 주춧돌이 됐고 지금도 한국 경제의 두 기둥으로 남아 대한민국의 성장을 견인하고 있다”고 했다. 허 회장은 “결국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달렸다며 인재 육성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회장님의 뜻은 지금도 부존자원 없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절실함으로 다가온다”면서 “남은 저희가 그 소중한 뜻을 이어받아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구 명예회장에 대해 “‘강토소국 기술대국’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그룹의 비약적 발전과 함께 화학·전자 산업의 중흥을 이끌며 한국 경제 성장의 밑거름을 닦는 데 크게 기여하셨다”고 말했다. 경총은 또 “고인이 후대에 남긴 경영혁신 정신과 은퇴 이후 교육·사회공헌 활동에 힘써온 모습은 지금까지도 많은 기업인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면서 “경영계는 고인의 기업가 정신과 경영철학, 국가 경제발전을 위한 헌신을 이어받아 우리 산업이 한 단계 더 도약하고 지속적인 경제발전이 이뤄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추모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구 명예회장은 적극적인 연구개발(R&D)과 해외진출을 통해 국내 전자·화학 산업 발전에 이바지했고 고객가치경영을 도입하는 등 국민의 신뢰를 받는 기업이 되기 위해 노력해왔다”며 “경제계는 구 명예회장의 타계를 가슴 깊이 애도하며 한국경제의 번영을 위해 더욱 노력할 것”이라고 고인을 기렸다./변수연기자 diver@@sedaily.com -
구자경 "잘된 은퇴도 경영혁신"...첫 '무고 승계'로 창업세대와 동반퇴진
산업 기업 2019.12.15 17:38:4394세 일기로 별세한 구자경 LG(003550)그룹 명예회장은 LG를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킨 것 외에도 재계 ‘큰 어른’의 표본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70세에 스스로 그룹 수장 자리를 내려놓는 혁신의 자세로 성숙한 경영권 승계의 모범 사례를 제시했고 구씨와 허씨 양가의 57년 동업체제도 불협화음 없이 ‘아름다운 이별’로 마무리했다. ◇재계 첫 ‘무고승계’…창업세대 경영진과 동반퇴진=구 명예회장은 LG에 몸담은 지 45년, 선친의 타계로 회장을 맡은 지 25년 만인 지난 1995년 2월 자진해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는 국내 최초의 대기업 ‘무고(無故·아무런 사고나 이유가 없음) 승계’로 기록되며 신선한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70세로 은퇴를 거론하기 이른 시기에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경영혁신의 일환으로 경영진의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구 명예회장은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출범 등 본격적인 무한경쟁 시대를 맞아 글로벌화를 이끌고 미래 유망사업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젊고 도전적인 사람들이 사업을 주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구 명예회장은 퇴임에 앞서 당시 사장단에게 “그간 혁신을 성공시킬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노력을 충실히 해왔고 그것으로 나의 소임을 다했다”며 “이제부터는 젊은 세대가 그룹을 맡아서 이끌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퇴임 의사를 표명했다. 구 명예회장이 회장에서 물러날 당시 창업 때부터 그룹 발전에 공헌해온 허준구 LG전선 회장을 비롯해 구태회 고문, 구평회 LG상사 회장, 허신구 LG석유화학 회장, 구두회 호남정유에너지 회장 등 창업세대 원로 회장단도 ‘동반퇴진’을 단행해 큰 귀감이 됐다. LG그룹에 따르면 구 명예회장은 은퇴를 결심할 당시 ‘멋진’ 은퇴보다는 ‘잘된’ 은퇴가 되기를 기대했다. 육상 계주에서 앞선 주자가 최선을 다해 달린 후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배턴 터치가 이뤄졌을 때 ‘잘됐다’는 표현이 어울리듯 경영 승계도 마찬가지라는 설명이다. 구 명예회장에게 은퇴란 그가 추진해온 경영혁신의 하나였고 본인 스스로 할 수 있는 마지막 혁신 활동이었다는 것이다. ◇구씨·허씨 동업관계 ‘아름다운 이별’=구 명예회장의 인화경영은 2000년대 들어 구씨·허씨 양가의 아름다운 이별로 이어졌다. 3대에 걸쳐 57년간 불협화음 하나 없이 일궈온 양가의 동업관계는 재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사업매각이나 합작, 국내 대기업 최초의 지주회사 체제 전환 등 모든 위기 극복과 그룹 차원의 주요 경영 사안은 양가 합의를 통해 잡음 없이 이뤄졌다. 양가의 57년 동업체제를 매듭 짓는 LG와 GS그룹의 계열분리 과정도 합리적이고 순조롭게 진행됐다. 구 명예회장 직계가족은 LG그룹으로 남아 전자·화학·통신 및 서비스 부문을, 허씨 집안은 GS그룹을 설립해 정유·유통·홈쇼핑·건설 분야를 맡기로 했다. 또 전선·산전·동제련 등을 묶어 구태회·구평회·구두회 창업고문이 LS그룹을 공동 경영하기로 했다. 이처럼 순탄한 계열분리가 가능했던 것은 구 명예회장이 인화경영 원칙을 철저히 지켰고 상호 신뢰와 의리를 바탕으로 사업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이는 “한번 사귀면 헤어지지 말고 부득이 헤어지더라도 적이 되지 말라”는 고(故) 구인회 창업 회장의 유지를 받든 것이기도 하다. ◇LG그룹의 앞날은=구 명예회장 별세에도 LG그룹의 경영권에는 변함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구 명예회장이 경영에서 물러난 지 20여년이 지난데다 구본준 LG 고문을 중심으로 한 ‘LG그룹 내 계열분리설’도 실현 가능성이 높지 않아서다. 특히 지난해 취임한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올 연말 인사에서 확실한 조직 장악력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구광모 체제’도 흔들림 없이 나아갈 것으로 예상된다. 구 회장은 이번 인사에서 ‘세대교체’와 ‘성과주의’ 확립을 목표로 6인 부회장 체제를 4인 부회장 체제로 재편하는 등 변화에 힘을 줬다. 재계 관계자는 “수많은 그룹사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구 회장 입장에서는 수년 내에 자신의 능력을 ‘숫자’로 입증해야 한다는 부담이 클 것”이라며 “다만 순혈주의를 타파하고 외부 인재 영입에 적극 나서는 등 ‘LG가 요즘 바뀌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인 만큼 조만간 가시적 성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박효정기자 jpark@@sedaily.com -
[구자경 LG 명예회장 별세] 전자·화학 강국…위대한 유산 남기고 떠나다
산업 기업 2019.12.15 17:34:23우리나라가 전자·화학 산업 강국으로 우뚝 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지난 14일 별세했다. 향년 94세. 구 명예회장은 특히 LG그룹을 글로벌 기업으로 키우고 생전에 명예롭게 은퇴해 경영권 승계의 모범을 보인 ‘참경영인’이기도 했다. 15일 LG에 따르면 LG그룹 2대 회장으로 지난 1970년부터 1995년까지 25년간 그룹을 이끌었던 구 명예회장이 14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관련기사 4·5면 LG 창업주인 고(故) 구인회 회장의 장남인 구 명예회장은 1969년 구인회 창업 회장의 별세에 따라 1970년 LG그룹 회장에 올랐다. 회장 재임 기간 ‘기술입국’의 일념으로 19인치 컬러TV, 공랭식 에어컨, 전자식 VCR, 슬림형 냉장고 등 국내 최초 제품을 잇달아 선보이며 우리나라 전자·화학 산업의 성장을 이끌었다. 70세이던 1995년에는 ‘21세기를 위해서는 젊고 도전적인 인재들이 그룹을 이끌어나가야 한다’며 장남인 고 구본무 회장에게 그룹을 넘겨줬다. 국내 재계에서 처음으로 이뤄진 ‘무고(無故) 승계’였으며 세대교체의 귀감으로 큰 울림을 던졌다. 그룹 회장으로 있으면서 ‘자율경영 체제’와 ‘고객중심 경영’을 선도적으로 주창해 선진 기업문화를 만들기도 했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인재 육성 등 공익사업에 전념했고 버섯 연구에 몰두하는 등 자연인으로서 소탈한 삶을 살았다. 장례는 4일장으로 치러지며 발인은 17일 오전이다. 고인은 화장 후 안치될 예정이며 가족장임을 고려해 장지는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구 명예회장은 슬하에 지난해 타계한 구본무 LG 회장과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구본준 LG 고문, 구본식 LT그룹 회장 등 6남매를 뒀다. 부인 하정임 여사는 2008년 1월 별세했다./이재용기자 jylee@@sedaily.com -
[구자경 LG 명예회장 별세]'비공개 가족장' 진행...조화·조문도 안받기로
산업 기업 2019.12.15 17:29:51지난 14일 숙환으로 별세한 구자경 LG(003550)그룹 명예회장의 장례 절차는 ‘비공개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진행됐다. 지난해 작고한 구 명예회장의 장남 구본무 회장 대신 차남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이 상주를 맡아 14일 오후5시께부터 서울의 한 대형 병원 장례식장에서 조문객을 맞았다. 구 명예회장의 사남 구본식 LT그룹 회장, 동생 구자학 아워홈 회장, 손자 구광모 LG그룹 회장 등도 빈소를 지켰다. 장례 첫날에는 LG 원로 일부와 구자열 LS그룹 회장, 구자은 LS엠트론 회장, 허태수 GS 회장 등이 빈소를 찾았다. 15일에는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허창수 GS 명예회장, 김쌍수 전 LG전자 부회장, 노기호 전 LG화학 사장 등이 조문했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은 이날 문재인 대통령을 대신해 조문했다. 김 실장은 “대통령께서 고인에 대해 한국 화학·전자 산업의 기틀을 다졌고, 특히 강조했던 ‘정도경영’과 ‘인화상생’의 기업문화로 미래에도 우리 기업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밝혀주셨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이날 오후 빈소를 찾아 20여분 머무른 뒤 자리를 떴다. 이 부회장은 삼성과 LG가 사돈관계인 인연으로 구본무 LG 회장이 별세했을 때도 직접 조문했다. 이명희 신세계 회장과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과 아들 정기선 현대중공업 부사장 등도 빈소를 찾아 조의를 표했다. 전날 LG그룹은 “장례는 고인과 유족들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최대한 조용하고 차분하게 치르기로 했다”며 비공개 가족장 원칙을 밝혔다. 장례식장 앞에 설치된 가림막에는 ‘차분하게 고인을 애도하려는 유족의 뜻에 따라 조문과 조화를 정중히 사양한다’고 적힌 천막이 덮였다. LG 측은 빈소에 오는 조화를 모두 돌려보내고 있다. 현재 빈소 내부에는 문 대통령과 문희상 국회의장, 이낙연 국무총리, LG 임직원 일동, GS 임직원 일동, 구자두 LB인베스트먼트 회장, 구자원 LIG 명예회장, 구자열 LS 회장 등의 조화만 놓인 것으로 알려졌다. 장례는 4일장으로 치러지고 발인은 17일 오전이다. /양철민기자 chopin@@sedaily.com -
이총리, 구자경 LG 명예회장 추모 "소박한 모습 몇 차례나 뵈었다"
정치 국회·정당·정책 2019.12.14 20:28:14이낙연 국무총리는 14일 “LG 구자경 명예회장님의 명복을 빈다”며 “회장님께서 1980년대 정부서울청사 뒤편 허름한 ‘진주집’에서 일행도, 수행원도 없이 혼자서 비빔밥을 드시던 소박한 모습을 몇 차례나 뵈었다”고 회상했다. 이 총리는 이날 오후 개인 SNS에 올린 글을 통해 “회장님의 그런 풍모가 국민의 사랑을 받는 기업을 키웠다고 생각한다. 감사하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구 명예회장은 이날 오전 별세했다. 향년 94세. 구 명예회장은 구인회 명예회장의 6남 4녀 중 장남으로 1925년 태어났다. 1945년 진주사범학교 졸업 후 5년간 초등학교 교사로 활동하다 1950년 LG그룹의 모태인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 이사로 취임하면서 그룹 경영에 참여했다. 구 명예회장은 고(故) 구인회 창업 회장의 장남으로 그룹 2대 회장을 지냈다. 1969년 말 부친이 타계하면서 이듬해 45세의 나이에 LG그룹 2대 회장에 올라 25년간 그룹을 이끌었다. 그 전까지는 공장 등에서 20년간 경영 실력을 쌓았다. 구 명예회장은 LG그룹을 이끌면서 전자와 화학을 중심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구 명예회장은 장남인 고 구본무 회장에게 1995년 2월 그룹 총수 자리를 승계했다. 이후 경영일선에서 물러났지만 LG복지재단 이사장직은 유지하며 사회공헌활동을 이어왔다. 구 명예회장은 슬하에 고 구본무 회장을 비롯해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구본준 LG 부회장, 구본식 희성그룹 부회장 등 6남매를 뒀다. 부인 하정임 여사는 2008년 1월 별세했다. LG그룹은 고인과 유족들의 뜻에 따라 비공개 가족장으로 최대한 조용하고 차분하게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로 했다. /정영현·변수연기자 yhchung@@sedaily.com -
[구자경 LG명예회장 별세]국내 최초 민간기업 IPO 등 투명경영 앞장서
산업 기업 2019.12.14 14:28:48구자경 명예회장은 기업의 외형적 성장뿐만 아니라 국내 민간기업 최초 기업공개(IPO)와 글로벌 기업들과의 전략적 제휴 등을 통해 기업 경영의 혁신을 이끈 경영자로 평가받는다. 우선 구 명예회장은 1970년대에 잇따른 IPO를 통해 우리나라 초기 자본시장에 활력을 불어 넣고 민간 기업의 투명경영을 선도했다. 특히 당시만 해도 IPO를 기업을 팔아 넘기는 것으로 오해해 이를 우려하는 분위기였고 일부 임원들은 IPO를 강력히 반대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구 명예회장의 앞을 내다보는 혜안과 결단력이 돋보인다. 당시 국내 민간 기업에서는 IPO를 한 사례가 없었지만 구 명예회장은 IPO가 앞으로 거스를 수 없는 큰 흐름이 될 것이며 선진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1970년 2월 그룹의 모체 기업인 락희화학(현 LG(003550)화학)이 민간 기업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증권거래소에 상장했으며, 이어 전자 업계 최초로 금성사가 IPO를 했다. 구 명예회장은 이후 금성통신(1974), 반도상사·금성전기(1976), 금성계전(1978), 럭키콘티넨탈카본 (1979) 등 10년간 10개 계열사의 IPO를 단행해 안정적인 자금 조달을 통한 도약의 기반을 마련했다. 아울러 구 명예회장은 기업의 활동 지평을 과감하게 세계로 확장시켰다. 재임하는 동안 50여 개의 해외법인을 설립했으며, 특히 1982년 미국 알라바마주(州)의 헌츠빌에 국내 기업 최초의 해외 생산기지인 컬러TV 생산공장을 세우기도 했다. 당시 뉴욕타임즈는 금성사 헌츠빌 공장 설립에 대해 “한국의 기업이 이제는 미국 사회에서도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했으며,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서도 성공적인 해외 진출 케이스로 헌츠빌 공장을 연구하기도 했다. 구 명예회장은 해외 투자에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독일의 지멘스, 일본 히타치·후지전기·알프스전기, 미국 AT&T 등 세계 유수의 기업들과 전략적 제휴를 통한 합작 경영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선진 기술과 경영 시스템을 빠르게 습득하고, LG의 활동 무대를 세계 중심으로 확장시키기 위한 전략적 판단이었다. /고병기기자 staytomorrow@@sedaily.com -
[구자경 LG명예회장 별세]19인치 컬러TV 최초 선보이는 등 '가전명가' 기틀 닦아
산업 기업 2019.12.14 14:12:33현재 LG(003550)는 가전 분야에서 국내를 넘어 글로벌 가전명가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최근 LG는 신(新) 가전으로 돌풍을 일으키면서 다이슨·월풀·밀레 등 세계적인 가전업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최근 LG전자는 매년 실적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을 정도다. 이 같은 LG의 명성은 구자경 LG 명예회장 때부터 그 토대가 쌓였다. 구 명예회장 재임 당시 금성사는 19인치 컬러TV, 공냉식 중앙집중 에어컨, 전자식 VCR, 프로젝션 TV, CD플레이어, 슬림형 냉장고 등 영상미디어와 생활가전 분야에서 수많은 제품을 국내 최초로 개발했다. 현재 LG가 자랑하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TV의 모태인 컬러TV 생산은 1975년 구미 공단에 연산 50만 대의 대단위 TV 생산 공장이 준공되면서 본격화됐다. 특히 당시는 국내 컬러 방송 시기가 미정이라 국내 시판이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구 명예회장은 글로벌 기술 흐름에 뒤쳐지지 않고 해외 시장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전량을 미국 수출용으로 먼저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이후 우리나라 수출에서 가전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확대되기도 했다. 구 명예회장은 1975년 금성사 구미 TV생산공장에 이어 1976년에는 냉장고, 공조기, 세탁기, 엘리베이터, 컴프레서 등의 생산시설이 포함된 국내 최대의 종합 전자기기 공장인 창원공장을 건립했다. 창원공장 준공식 당시 구 명예회장은 “전기 부문에서 새로운 비약의 계기가 마련된 것”이라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또 1983년부터 1986년 말까지는 미래 첨단기술시대에 대비해 컴퓨터, VCR 등을 생산하는 평택공장을 구축해 오늘날 전자 산업 강국의 기틀을 닦았다. /고병기기자 staytomorrow@@sedaily.com -
[구자경 LG명예회장 별세]기술개발 위해 아낌없이 투자
산업 기업 2019.12.14 14:00:09구자경 LG(003550) 명예회장은 ‘강토소국 기술대국(疆土小國 技術大國)’의 신념으로 기술 연구개발에 승부를 건 경영자였다. 구 명예회장은 항상 “우리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뛰어난 기술자가 많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세계 최고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배우고, 거기에 우리의 지식과 지혜를 결합하여 철저하게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기술 개발을 위해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구 명예회장은 재임 25년 동안 ‘연구개발의 해’, ‘기술선진’, ‘연구개발 체제 강화’, ‘선진 수준 기술개발’ 등 표현은 달라도 해마다 빠뜨리지 않고 기술을 경영 지표로 내세웠다. 특히 구 명예회장은 기술개발을 위한 연구 활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70년대 중반 럭키 울산 공장과 여천 공장에는 공장이 채 가동되기도 전에 연구실부터 만들어졌다. 그는 대부분의 연구실이 각 공장 별로 소규모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1976년 국내 민간기업으로는 최초로 금성사에 전사적 차원의 중앙연구소를 설립했다. 개발용 컴퓨터, 만능 시험기, 금속 현미경, 고주파 용해로 등 첨단 장비를 설치하고, 국내외 우수 연구진을 초빙하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투자를 집행했다. 또한 제품개발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산업 디자인 분야의 육성을 위해 1974년 금성사에 디자인 연구실을 발족시켰으며 일본 등 디자인 선진국에 연수를 지원해 전문가를 육성했다. 이어 1979년에는 대덕연구단지 내 민간연구소 1호인 럭키중앙연구소를 출범시키고, 고분자·정밀화학 분야를 집중 연구해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ABS수지 등 다양한 신제품 개발로 플라스틱 가공산업의 기술고도화를 이끌었다. 1985년에는 금성정밀, 금성전기, 금성통신 등 7개사가 입주한 안양연구단지를 조성하는 등 회장 재임기간 동안 70여 개의 연구소를 설립했다. 또한 같은 해 우리나라 최초의 제품시험연구소를 개설하고 가혹 환경 시험실, 한냉·온난 시험실, 실용 테스트실 등 국제적 수준의 16개 시험실을 갖춰 제품의 품질을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하게 했다. 우수 인재 유치와 육성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구 명예회장은 1980년대 말 대덕연구단지에 LG화학 종합기술연구원 설립을 추진할 당시 프로젝트 출범 초기부터 우수 기술인재 유치를 위한 통 큰 투자를 신신당부하기도 했다.또한 구 명예회장은 연구 개발 조직에 끊임없이 동기와 의욕을 북돋아주는 일에 늘 적극적이었다. 그는 연구소에 관해서는 우수 인력을 어느 곳보다 우선해서 선발할 수 있도록 지원했으며, 임원의 정원도 제한을 두지 않았다. 1982년에는 그룹 ‘연구개발상’을 제정해 연구원들의 의욕을 북돋우고, 연구개발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도 했다. LG 관계자는 “구 명예회장의 인재 사랑은 오늘날 LG가 R&D 인재를 중시하는 기업문화의 뿌리가 되었다”고 말했다. /고병기기자 staytomorrow@@sedaily.com -
[구자경 LG명예회장 별세]교사에서 글로벌 기업 키운 경영자로
산업 기업 2019.12.14 13:49:16구자경 LG(003550) 명예회장은 1970년부터 1995년까지 25년간 LG를 이끌며 LG를 글로벌 기업으로 키웠다.구 명예회장이 재임했던 기간 동안 LG는 매출액 260억원에서 30조원 규모로 약 1,150배 성장했다. 이처럼 구 명예회장은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을 길러낸 성공한 경영자이지만 유년 시절의 장래 희망은 교사였다. 실제 구 명예회장은 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1944년 진주사범학교 강습과에 입학 후 1년 과정을 마치고 곧바로 진주의 한 소학교로 발령 받았다. 하지만 구 명예회장의 교사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당시 구 명예회장이 발령받은 소학교의 일본인 교장이 일본에 기증할 경전투기 구입 건으로 구 명예회장의 부친이자 당시 구인상회를 운영하던 구인회 사장에게 기부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어 구 사장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 명예회장은 학교 출근 첫 날부터 일본인 교장과 일본인 교사들로부터 냉대를 받았다. 구 명예회장은 이 같은 차가운 분위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느니 차라리 고향에서 농사를 짓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 다음날부터 아예 출근을 포기하고 귀향했다. 구 명예회장은 귀향해 감나무와 복숭아나무를 가꾸고 있던 차에 마침 모교였던 지수초등학교 교사로 다시 발령받아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퇴근 후에는 농사일에 몰두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구 명예회장은 지수초등학교에서 2년,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에서 3년을 교직에 몸담았는데, 무엇보다 학교 규율을 세우는 것을 우선시하여 ‘호랑이 선생님’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교사로 재직 당시 구 명예회장은 미래에는 기술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시대가 틀림없이 올 것이라 믿고 교육의 중점목표에 기술력 양성을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구 명예회장은 수시로 학생들에게 “나라가 힘이 강해지려면 기술이 발전해야 한다. 그러니 훌륭한 기술자가 많이 나와야 한다”며 기술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곤 했다. 구 명예회장은 교사로 근무 중이던 1947년 부친이 LG의 모기업인 락희화학공업사(현 LG화학)를 설립해 럭키크림 화장품 사업을 시작하면서 사업이 날로 번창해 일손이 모자라자 낮에는 교사로 일하고 밤에는 부친의 사업을 돕기 시작하면서 기업 경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LG 창업주인 연암 구인회 회장이 1969년 타계함에 따라 구 명예회장은 45세가 되던 1970년 1월 9일 LG그룹의 2대 회장으로 취임했으며, 재임 기간 동안 LG의 매출액을 1,000배 이상 성장시키며 대기업으로 키워냈다. /고병기기자 staytomorrow@@sedaily.com -
[구자경 LG 명예회장 별세]고인·유족 뜻 따라 가족장으로…빈소 비공개
산업 기업 2019.12.14 13:46:0814일 별세한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장례는 고인과 유족들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최대한 조용하고 차분하게 치르기로 했다. LG그룹은 “유족들이 온전히 고인을 추모할 수 있도록 별도의 조문과 조화를 정중히 사양한다”며 “빈소와 발인 등 구체적인 장례 일정도 외부에 알리지 않기로 했음을 양해 바란다”고 밝혔다. 구 명예회장의 장남인 고(故) 구본무 회장이 지난해 별세했을 때도 소탈하고 겸손하게 살아온 고인의 뜻을 따르기 위해 비공개 가족장을 치르겠다고 밝힌 바 있다. 구 명예회장은 슬하에 장남 고 구본무 LG 회장을 비롯해 구훤미씨,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구본준 LG 고문, 구미정씨, 구본식 LT그룹 회장 등 4남 2녀를 뒀다. 부인인 하정임 여사는 지난 2008년 타계했다. /이재용기자 jylee@@sedaily.com -
[구자경 LG 명예회장 별세]故 구본무 회장에 엄격한 경영수업
산업 기업 2019.12.14 13:29:2814일 별세한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가치관과 경험은 장남인 고(故) 구본무 회장이 2018년 5월 숙환으로 별세할 때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고 구본무 회장은 회장 취임 전까지 20여년간 실무경험을 쌓았다. 이는 구자경 명예회장이 본인 스스로도 회장직에 오를 때까지 20년간 현장에서 경영인으로 혹독한 훈련을 받은데다 평소 “아무리 가족이라도 실무경험을 쌓아서 능력과 자질을 키우지 않는다면 승진도 할 수 없고 중책도 맡기 어려울 것”이라고 강조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당시 기업의 회장직 승계자는 임원급으로 회사에 발을 디뎌 경영수업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고 구본무 회장은 회사의 가장 기초조직인 과장 책임자부터 단계적으로 실무를 수행함으로써 다양한 경영실무와 경영자적 리더십 및 안목을 쌓아갔다. 구 명예회장의 여러 가르침과 교훈 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것 중 하나는 경영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과 생활자세였다. 1995년 회장직 승계 당시 구 명예회장은 고 구본무 회장에게 “경영혁신은 끝이 없다. 자율경영의 기반 위에서 경영혁신은 계속 추진해야 한다. 그룹 구성원 전체의 공감대를 형성시켜 합의에 의해 일을 추진하라. 권위주의를 멀리 하라”고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어떤 이유에서든 약속을 지키고 사치를 금해야 한다는 구 명예회장의 철칙도 고 구본무 회장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구 명예회장은 평소 비록 푼돈일지라도 사치나 허세를 위해 낭비하는 것을 큰 잘못으로 여기고 항상 ‘근검절약’을 생활신조로 삼으면서 이를 실천할 것을 강조해왔다./이재용기자 jylee@@sedaily.com -
[구자경 LG 명예회장 별세]은퇴 후 버섯연구 등 자연인으로 여생
산업 기업 2019.12.14 13:20:3314일 별세한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은 은퇴 후에는 버섯연구 등 취미활동과 함께 자연인으로서 여생을 보냈다. 구 명예회장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철저하게 평범한 자연인으로서 살았다. 그는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면서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었다. 구인회 창업회장이 생전에 강조한 ‘한번 믿으면 모두 맡겨라’라는 말에 따라 은퇴한 뒤 후진들의 영역을 확실히 지켜주는 것이었다. 대신 그는 충남 천안시 성환에 위치한 연암대학교의 농장에 머물면서 은퇴 이후 버섯연구를 비롯해 자연과 어우러진 취미 활동에 열성을 쏟으며 하루하루 바쁜 일정을 보냈다. 구 명예회장의 취미 생활은 교직생활 때부터 손을 댄 나무가꾸기로 시작해 난, 버섯 연구까지 자연과 벗삼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의 연속이었다. 특히 그는 무엇을 하나 시작해도 단순히 여가로 그치지 않고 전문가 수준의 식견을 갖출 때까지 파고들었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퇴임 후 “내가 가업을 잇지 않았다면 교직에서 정년을 맞은 후 지금쯤 반듯한 농장주가 돼있지 않았을까”하고 말하기도 했다./이재용기자 jylee@@sedaily.com -
[구자경 LG 명예회장 별세]재계 첫 무고(無故) 승계 단행…재계에 귀감
산업 기업 2019.12.14 13:08:3314일 별세한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은 재계에서 처음으로 스스로 회장직을 후진에게 물려줘 대한민국 기업사에 성숙한 후계 승계의 모범 사례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구 명예회장은 지난 1995년 2월 스스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LG와 고락을 함께 한 지 45년, 회장에 오른지 25년 만이었다. 이는 국내 최초의 대기업 ‘무고(無故) 승계’로 기록되며 재계에 신선한 파장을 일으켰다. 아직 은퇴를 거론할 나이가 아닌 시기에 그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은 경영혁신의 일환으로 경영진의 세대교체가 필요하다고 결심한 데 따른 것이었다. 이는 당시 WTO 체제의 출범 등 본격적인 무한경쟁 시대를 맞아 글로벌화를 이끌고 미래 유망사업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젊고 도전적인 사람들로 세대교체가 이루어져 이들이 주도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한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었다. 구 명예회장은 퇴임에 앞서 사장단에게 “그간 혁신을 성공시킬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노력을 충실히 해왔고 그것으로 나의 소임을 다했으며, 이제부터는 젊은 세대가 그룹을 맡아서 이끌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퇴임 의사를 표명했다. 1995년 2월 회장 이·취임식장에서 구 명예회장은 “돌이켜 보면 행운보다는 고통이, 순탄보다는 고난이 더 많았던 세월이었지만, 임직원들의 헌신적인 노고가 늘 곁에 있었기에 용기와 신념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이 시점에서 여러분을 믿고 나의 역할을 마치고자 한다. 젊은 경영자들과 10만 임직원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기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의 자리를 넘기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구 명예회장은 이 같은 이임사를 끝으로 임직원들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식장을 빠져 나갔다. 경영일선에서 물러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구 명예회장이 회장에서 물러날 때 창업 때부터 그룹 발전에 공헌을 해 온 허준구 LG전선 회장, 구태회 고문, 구평회 LG상사 회장, 허신구 LG석유화학 회장, 구두회 호남정유에너지 회장 등 창업세대 원로 회장단도 동반 퇴진을 단행했고 이러한 모습은 당시 재계에 큰 귀감이 되었다. 구 명예회장에게 은퇴는 그가 추진해 온 경영혁신의 일환이었다. 그는 훗날 회고에서 “은퇴에 대한 결심은 이미 1987년 경영혁신을 주도하면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경영 환경에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차기 회장에게 인계한다는 것이 경영권 승계에 대한 내 나름의 밑그림이었다. 그래서 내 필생의 업으로 경영혁신을 생각하게 되었고, 혁신의 대미로서 나의 은퇴를 생각했던 것이다”라고 밝혔다./이재용기자 jyle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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