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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SK 주주총회가 열린 서울시 종로구 SK빌딩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긴장감이 감돌았다. SK 오너 일가의 횡령 ㆍ배임 혐의 때문에 일부 주주들의 반발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특히 국민연금이 “주주가치를 훼손시킨 기업에 대해 강력한 의결권 행사에 나선다”고 밝히면서 정관변경과 사외이사 선임 등의 안건이 통과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작 주총이 열리자 상황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다. 당초 진통이 예상됐던 주총은 별다른 잡음 없이 23분 만에 속전속결로 마무리됐다. 한 때 50대 여성이 ‘의장’을 외치며 발언권을 요구해 잠시 긴장이 고조됐지만 “안건을 강력히 찬성한다”는 발언이 나오면서 싱겁게 끝났다.
672개 상장사의 정기 주총이 열린 ‘슈퍼 주총데이’를 맞아 회사측과 주주간의 대결구도에서는 결국 골리앗(회사)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당초 우려됐던 소액 주주들의 반란은 결국 ‘찻잔 속의 태풍’에 머물렀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이날 주총을 개최한 672개 기업 가운데 대주주 횡령 등으로 주주들의 반발이 예상됐던 SK와 한화, 하이마트, 태광산업 등의 주총은 별다른 문제 없이 조용하게 마무리 됐다.
이들 회사는 대주주 등의 지분 비중이 높은 상황이어서 소액주주들이 회사와 힘 겨루기를 하기에는 세(勢)가 불리할 수 밖에 없었다. 한화의 경우 주총 시작 20여분 만에 5개 안건이 별 다른 충돌 없이 통과되면서 마무리됐다. 대주주 횡령 등으로 잡음이 예상됐던 SK는 물론 대주주 구속 사태로 뒤숭숭한 태광산업의 주총도 20~30분 만에 속전속결로 끝났다. 다만 선종구 회장이 불참한 가운데 열린 하이마트 주총에서 일부 주주들이 대주주 문제를 지적했지만 안건 통과를 막거나 하는 등의 사태는 없었다. 소액주주들의 발언은 회사측을 두둔하는 목소리에 눌려 버린 모습이었다.
결국 일사천리로 주총이 진행되면서 문제의 핵심으로 부상한 오너 일가의 이사 선임이 통과되는 등 회사측이‘슈퍼 주총데이’의 승자가 됐다. 김승연 한화 회장은 한화케미칼 사내 이사에 재선임됐다. 한화는 횡령ㆍ배임 혐의가 발생할 당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 감사와 이사를 그대로 연임시키는 것은 부적절한 처사라는 지적 속에서도 오재적 전 빙그레 대표를 이사와 감사에 재선임하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배당 등을 사이에 둔 주주와 회사간 표 대결에서도 결국 회사 측이 웃었다. 삼천리의 경우, 회사 측이 주주와의 힘 겨루기에서 승리하면서 강형국 씨 등 소액주주가 제안한 배당금 확대와 액면분할, 유상감자 등 안건이 무산됐다. 휴스틸도 수액주주들이 중간배당과 유상감자, 자기주식 매입 등을 안건으로 제출됐지만 현실화되지는 못했다. 회사 경영 투명성 문제를 제기됐던 대한방직도 회사 측이 표 대결에서 승리하면서 주주들이 제기한 감사 선임 안건이 백지화됐다.
한 증권사 고위 관계자는 “외부에서 주주와 회사간 대결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비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며 “보유 지분 차이가 크다는 점에서 주주들의 의견이 주주총회에서 반영되기는 어려운 구조를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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