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천 쪼가리도 일제를 써야 합니까."
지난 1989년 한 골프행사에 참석해 일본제 골프 장갑과 양말을 선물로 받은 고(故)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이 곧바로 토종 골프 브랜드인 엘로드를 만들라고 지시한 일화는 유명하다.
92세를 일기로 별세해 발인일인 12일 흙으로 돌아간 고인에 대해 산업계만큼이나 골프계의 애도 물결도 끊이지 않고 있다. 고인은 스포츠, 특히 골프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고인은 코오롱 회장이던 1985년 대한골프협회 회장직을 흔쾌히 맡았다. 골프협회장직 수락이 특별해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나 골프를 스포츠가 아닌 '부자들 놀이'로 보는 편견이 심했던 당시로서는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골프협회장으로 재임한 11년 동안 고인은 선수 육성에 힘을 쏟아 국가대표 시스템의 토대를 닦았다. 취임 이듬해인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골프 종목에서 단체전 금메달과 개인전 은메달이 수확됐고 박세리·김미현 등의 꿈나무들이 자라났다. 이때부터 시작된 코오롱의 국가대표 골프선수에 대한 용품지원과 1990년부터 맡은 한국 오픈 골프대회 후원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2년 전인 2012년 마지막으로 노구를 이끌고 한국 오픈 대회장에 나와 선수들을 격려하던 고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고인이 힘을 불어넣은 때를 현대 한국 골프의 시발점, 그리고 박세리로 시작된 본격적인 세계무대 정복기를 2기로 본다면 '한국 골프 3.0'이랄 수 있는 현재의 화두는 골프산업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한국 골프산업의 현주소는 골프 강국이라는 말이 민망할 정도다. 특히 골프산업의 토대인 골프장은 법률로 규정된 체육시설임에도 과세할 때는 사행성 업종이 되는 상황이다. 골퍼들이 회원제 골프장을 이용할 때마다 부담하는 개별소비세(2만1,120원)는 카지노의 2.3배, 경륜장의 30배에 달한다. 부지 내는 개발할 수 없도록 법으로 정해놓는 땅인 원형보전지에도 높은 세율의 종합토지세가 부과된다. 이용료는 내려가지 않고 골프장은 경영난을 겪고 있는 모순된 구조의 이유다.
골프장에 대한 중과세 문제는 20년 전부터 거론돼왔으나 번번이 국회에서 무산됐다. '부자 감세 불가'가 표면적 논리지만 정치권이 골프의 산업적 효과에 공감하면서도 '표심'을 의식해 총대를 메지 않았다는 게 관련 업계의 분석이다.
골프는 어엿한 산업이다. 골프장·장비·의류 등을 포함한 규모는 약 20조원으로 추정돼 전체 스포츠 산업의 3분의1에 달한다. 내년 아시아 최초로 인천에서 열리는 세계연합팀-미국대표팀 남자골프 대항전인 프레지던츠컵은 225개국, 10억가구에 30개 언어로 중계되는 글로벌 이벤트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 대회의 명예대회장을 맡는다. 또 오는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는 112년 만에 골프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돼 각국이 금메달을 다투게 된다. 29년 전 주위의 눈치에 아랑곳하지 않고 골프협회장직을 맡은 고 이 회장처럼 '한국 골프 3.0' 시대의 상황을 직시할 혜안과 용단이 필요한 시기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