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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홍우 선임기자의 무기이야기<100·끝>] 대한식 소총·M1 자동소총을 아시나요

K1·K2·K3 직계조상..기술·자본 없이 절박함으로 기적창출

육군사관학교 내 육군박물관이 소장 중인 대한식 소총 7호. 1950년대 자주국방 노력의 상징 격이다.




1952년 ‘대한식 소총’ 시범 사격

양산못한 시제품엔 태극문양 선명

미국제 M1 개런드 자동화 개조 등

‘우리 손으로 만들자’ 처절한 노력

KIST도 1974년 소총·기관총 연구

ADD, 여덟번 시제품 끝에 K2 개발



전 세계를 통틀어 대한민국에만 있는 무기가 있다. M-1 자동소총과 대한식 소총,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A형 기관총. 군에 채용되지 못해 연구개발로 그쳤으나 이들은 분명한 족적을 남겼다. 한국군의 주력화기로 30년 이상 우리나라를 지켜온 K1 기관단총과 K2 소총, K3 기관총의 직계 조상이 바로 이들 무기다. 자본은 물론 변변한 공작기계 하나 없던 지난 1970년대 초반, 방위산업 분야에서 우리는 무에서 유를 만들었다. 여기에 소개할 무기류는 성공한 무기들이 아니다. 잘 봐야 ‘성실 실패’에 해당되는 이들 무기에는 이제 없거나 희박해진 ‘무엇’이 있다. 그 ‘무엇’이란 바로 절박함이다. 자본과 기술은 원하는 대로 쌓고 습득했으나 오늘날 우리에게 절박함이 있는가. 어떻게든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와 절박함의 상징인 총기류 몇 점을 소개한다.

대한식 소총 7호의 탄알 장전부. M1 소총과 비슷해 보인다. 최초로 공개되는 이 사진에서 총몸에 새겨진 태극 문양이 눈에 들어온다./사진제공= 육군사관학교


◇ 한국이 처음 만든 소총, 대한식 소총=한국이 소총을 처음 양산한 것은 1975년. 미국 콜트사 M-16 소총의 ‘602형’을 면허생산 형식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기준을 ‘양산’이 아니라 ‘개발’로 바꾸면 얘기가 달라진다. 우리는 1950년대의 열악한 상황에서도 나라를 지키려 총을 만들어냈다. 동아일보 보도(1952년 10월13일자 2면)에 따르면 부산 소재 육군 조병창은 10월11일 ‘대한식 소총’ 시제품 6정에 대한 시범 사격회를 가졌다. 아쉽게도 국내의 대한식 소총에 대한 기록은 이것이 전부다.

다만 실물 몇 점은 남아 있다. 먼저 성능부터 보자. 볼트액션식 소총으로 M1 개런드용 8발 클립을 사용한다. 일제가 세우고 미군이 완전 폭파해버린 부천의 군수공장을 복구해 부산으로 옮긴 조병창은 일제의 99식 소총과 미국의 M-1917 엔필드 소총의 장점을 섞어 대한식 소총으로 다시 만들었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대한식 소총의 성능은 일제보다는 낫고 미국제보다는 못했다. 어떤 연유인지 양산되지 못한 이 소총의 시제품 6호와 7호가 서울 태릉 육군사관학교 안의 육군 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 서울경제신문은 이 소총에 새겨진 태극 문양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 M1 소총 자동화 개조=한국이 다시금 소총을 생산한 것은 1971년 11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미국제 M1 개런드 소총과 카빈 소총을 비롯한 무기류를 분해 후 역설계 방식으로 두 달 만에 만들어냈다. 박격포까지 시험 생산한 이 사업에서 주목할 병기는 개조형 M1 자동소총. 두 가지 형식으로 개발했다. 하나는 상대적으로 단순하고 다른 하나는 복잡한 개조 과정을 거쳤다. 단순 개조형은 외국 기술을 빌렸다. 정확하고 강력한 M1 개런드 소총에 만족하면서도 자동소총을 원했던 미군이 M-14 자동소총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1952년 자동화한 M1 소총을 개발한 전례가 있다.

1972년 제작된 한국형 M1 소총. ‘한국 육군(R.O.K. ARMY)의 테스트용 1번’이라는 이 소총을 서울경제와 육군사관학교가 처음으로 확인했다.


정작 이를 실용화한 것은 이탈리아.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M1소총을 면허생산하게 된 베레타사는 보다 세련된 형태의 자동소총인 BM59 소총으로 탈바꿈시켰다. 인도네시아도 BM59소총을 1960년대 중반 면허생산 방식으로 만들었다. 인도네시아처럼 자동소총 생산은 꿈도 못 꿨던 한국은 1971년 세 가지 형태의 M1 제작에 들어갔다. 국방과학연구소(ADD) 연구원들은 원형 그대로인 M1 소총과 M-14 소총으로 넘어가는 단계의 M1 자동소총을 먼저 선보였다.

1972년 한국이 비밀리에 개발했던 예비군용 자동소총, 분대 지원화기 겸용 소총(아래)을 야전 부대에서 테스트하고 있다. 세계에서 유일한 개량형 M1 자동소총에서 한정된 예산과 주어진 여건에서도 어떻게든 자주국방력을 키우려던 의지가 엿보인다.


최종 진화형에서는 한국만의 모양이 나왔다. 권총형 손잡이와 양각대를 부착하고 총몸 상부에 발열용 구멍을 뚫었다. 예비군의 기본화기 겸 분대지원화기로 채택될 예정이던 M1 자동소총은 야전부대에서 운용 평가까지 거쳐 MX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실험용을 의미하는 X를 떼지 못했다. 미국으로부터 생산권을 얻어낸 M-16 소총 생산에 집중하기로 방침이 정해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X’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XA사업과 XB사업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진화했다. 전자는 기관총, 후자는 소총이었다. 변화한 게 또 있다. 연구개발을 KIST가 주도하고 모방하더라도 독자적인 설계 과정을 거쳤다.

◇ KIST도 소총과 기관총 연구=KIST 기계공학부는 1974년부터 ADD에서 용역 연구를 의뢰받는 형식으로 기관총과 소총 연구에 들어갔다. KIST가 낙점받은 것은 공작기계실에 미국이 원조한 공구와 선반·정밀기계가 많은데다 아무도 총기 기술을 모르는 상태였으나 기초 연구인력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KIST 연구진은 외국산 총기를 확보해 역설계 도면을 그리며 설계기술을 익히고 부품 하나하나를 만들고 깎았다. 그 결과가 1975년에 나온 KIST A 기관총. 7.62㎜ 총열을 가진 이 기관총은 벨기에 FN사의 MAG 기관총과 일본의 62식 기관총을 참고해 제작했다. 세 가지 종류의 시제품 제작 끝에 연구진은 하나를 골랐다. 마침 군에서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구경을 5.56㎜로 바꿔 달라는 요구가 들어왔다. 군의 요구와 연구진의 종합 판단 결과가 바로 K3 경기관총. 벨기에 FN사의 미니미를 참고했지만 한국의 고유기술도 적지 않게 들어갔다.

1974년 시제품 제작 이래 45년 만에 처음 공개되는 KIST A 기관총. 전체적으로 벨기에 FN MAG과 유사하고 공냉식 총열은 일본 62식 기관총과 닮았다./국방과학연구소 제공


◇ ADD, 여덟 번째 시제품 개발 끝에 K2 소총 개발=소총 개발인 KIST B 프로그램은 얼마 안 지나 국방과학연구원의 주도로 진행됐다. 1972년 말부터 인력을 모은 12년 동안 여덟 가지 모델을 개발해 1984년 K2 소총 완성품을 내놓았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처음 만든 XB-1은 도무지 총 같지 않아 XB-2는 아예 미국의 M-16을 분해한 뒤 역설계해 7.62㎜로 만들었다. 이때부터 조금씩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XB 4단계부터 개발에 참여해 소화기 개발 팀장, 부장을 지내고 은퇴한 최영진씨는 “미국 M-16과 독일 G3의 조준시스템, 벨기에는 물론 소련제 AK-47 소총의 장점을 모아 K2 소총을 만들었다”며 “미국제 M-16을 더 생산하면 될 것을 굳이 위험을 감수하며 국산을 개발할 필요가 있느냐는 일부의 반응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미국산 M-16과 같은 총열을 만드는 공장에서 생산하는데도 “총열이 미국이 설계한 M-16보다 못하다”는 국산품 비하 발언을 딛고 참아내며 개량을 거듭한 결과가 아직도 현역에서 나라를 지키는 K2 소총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K2 소총이 개발되기 전까지 7개 시제품 소총. 실제로는 각 형식마다 2~3개씩 세부 모델이 있어 더 많은 시제품이 있었다. 각 형식마다 구경과 크기·작동방식이 다르다. ADD 연구진은 각국 소총의 장점을 골라 K2 소총과 K1 기관단총을 개발해냈다.


KIST에서 근무하다 ADD로 자리를 옮겨 정년퇴직한 이춘식씨는 “미국제 장비와 공구는 인치 단위로 표시하는 반면 설계도면은 미터법이어서 공차가 적지 않게 발생했다”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총을 연구하고 부품을 깎아 완성 모델이 나올 때의 성취감은 무엇과도 비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소총 모델은 여덟 가지가 아니라 각 형식에 2~3개 개량형이 있어 실제 시제품은 훨씬 많았다. XB 7 개발 단계에서 연구진에 합류한 김인우 ADD 수석연구원(공학박사)은 “XB 7만 하더라도 3개 모델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김 연구원은 “당시에는 연구자금도 적고 기술 수준도 낮았지만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절박감이 있었다”며 “지금은 물론이고 통일되더라도 강대국에 둘러싸인 우리가 살 길은 자주국방과 기술개발뿐”이라며 “개발 초기에 국가와 선배들이 쏟았던 열정을 기억하는 우리 사회가 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hongw@sedaily.com



※권홍우 선임기자의 무기이야기를 100회 연재에서 마칩니다. 독자 여러분의 그동안의 관심과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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