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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양치기가 일탈하는 양에게

‘양치기 개 관리자와 018번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 018번이 개에게 덤벼들기 때문이다. 양치기 개 관리자는 018번을 도축하자고 말한다. “이런 양의 유전자가 후대로 전해지면 양 떼에 문제가 발생할 거예요.” 방목장 안에서 018번이 내게 다가온다. 나는 018번에게 속삭인다. “이렇게 계속 시간을 끌자.”’ (악셀 린덴, ‘사랑한다고 했다가 죽이겠다고 했다가’, 2019년 심플라이프 펴냄)





도시에서 문학을 공부하다가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양 떼를 물려받아 느닷없이 양치기가 된 스웨덴 작가 악셀 린덴은 목장에서의 날들을 기록했다. 양에게 먹이를 주고 울타리 너머로 탈출하지 않도록 양의 머릿수를 세는 무료하고 지루한 시간이 끝없이 이어진다. 외부의 공격에 취약한 순한 양들은 사랑스럽지만, 때로는 그 어떤 통제도 부질없는 짐승 같다. 그러나 이 양치기는 사람들이 죽어 마땅하다고 한 문제아 양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인다. “이렇게 계속 시간을 끌자.” 나는 어쩌면 이 말이 그가 스스로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때로 우리는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다. 집단에 이익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 흑자인지 적자인지, 유용한지 쓸모없는지에 따라 그 존재가치가 결정된다. 연말이면 무엇에 집중하고 무엇을 버릴지 선택의 기로에 서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나 또렷한 성과가 없더라도, 문제만 도드라져 보여도 냅다 죽여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임박한 위기 앞에서 시간을 견뎌낸 것, 이 종잡을 수 없는 세상에서 살아 버틴 것, 완전히 망하지 않은 것, 어쨌거나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일단 다행인 것이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막막한 날이면, 나는 스웨덴의 양치기가 자신의 가장 못난 양에게 남몰래 속삭인 말을 생각한다. “이렇게 계속 시간을 끌자.” 어떤 면에서는 일도, 인생도 결국 우리가 가장 암담한 지경에서 묵묵히 끌어온 시간의 합일지도 모르니까. /이연실 문학동네 편집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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