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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 장제스의 북벌

1926년, 현대 중국 기반 닦았지만 부패로 패망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취임식에서 북벌을 공식 발표하는 장제스.




1926년 7월 9일 중국 광둥성 광저우 동 연병장. 장제스(蔣介石·40세)가 5만 시민과 병사 앞에서 두 가지 행사를 치렀다.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취임식과 북벌 선언. 중화민국 건국의 아버지 쑨원(孫文) 사망 이후 복잡한 권력 투쟁에서 국민당 정부의 실권을 잡은 장제스는 첫 사업으로 북벌을 밀고 나갔다. 시민들은 북벌에 열광했으나 아무도 성공 가능성을 믿지 않았다. 무엇보다 상대가 강했다. 동북 3성과 화북을 지배하는 장쭤린 군벌이 35만 명, 하남과 사천, 호북, 호남, 귀주를 장악한 우페이푸가 25만 명, 강소, 절강, 안휘, 복건, 강서 5성을 지배한 쑨촨팡이 20만 명을 각각 거느렸다.

국민당군의 군세는 10만 명. 동원 가능 병력은 약 5만 명에 불과하고 장비도 군벌보다 뒤졌다. 일부 부대는 소총이 모자라 화승총과 창으로 무장할 정도였다. 반면 우페이푸 군벌은 자체 생산한 소총과 기관총, 박격포에 외제 대포까지 갖췄다. 장쭤린 군은 전차와 장갑차대대, 백계 러시아인 병사들이 운행하는 장갑열차에 공군까지 보유했다. 국민당을 지원하던 소련 군사고문단마저 북벌을 말렸다. 역사적으로 북벌이 성공한 사례도 없었다.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북벌은 총 30여 차례. 단 한 번을 제외하고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촉한의 제갈량은 다섯 차례 북벌에 나선 끝에 목숨을 잃었다. 후계자 강유도 11번 시도에서 실패하고 촉한은 망국으로 접어들었다. 남송의 명장 악비도, 외세에 대항한 태평천국도 북벌에서 기세가 꺾였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이 유일한 성공 사례. 8번째 시도에서 몽골족을 몰아내고 천하를 품었다. 절대 열세였던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예상을 뒤엎고 연전 연승하며 1928년 6월 베이징과 텐진을 점령했다. 장제스는 쑨원의 무덤을 찾아 ‘총리의 유업(북벌)을 완성했다’며 잔을 올렸다. 숱한 견제와 공산당과의 결별, 일시적 은퇴, 송 메이링과의 재혼, 복귀와 정권 다툼을 딛고 이뤄낸 결과다.

물론 봉천 군벌의 형식적 예속이었지만 장제스는 중국 통일을 이뤄냈다. 15개 성 가운데 중앙정부가 직접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곳은 5개 성에 불과했어도 북벌이 없었다면 중국의 분열은 오랫동안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성공 요인은 민초의 절대적 지지. 군벌의 가렴주구에 지친 민중은 명분이 뚜렷하고 군기가 엄정한 북벌군에게 정보와 양식, 병력을 바쳤다. 문제는 초심을 잃었다는 점. 국민당군은 군벌의 횡포를 되풀이해 민심을 잃어 결국 공산당에게 대륙을 내주고 대만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부패한 권력은 반드시 망한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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