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라는 서비스를 만들기 전에는 직장인들이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채널이 없었습니다. 직접 꺼내기 어려운 마음속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하는 게 블라인드의 가장 중요한 초반 목표였습니다. 7년이 지나 이제는 서비스에 대한 신뢰가 쌓였고, 기업이 구성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도록 하는 단계로 진입했습니다. 앞으로는 기업문화를 바꿔나가는 게 블라인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300만명, 미국에서 115만명. 직장인 커뮤니티 스타트업 ‘블라인드(Blind)’는 지난 9월 총 415만명에 달하는 회원을 확보했다. 국내 시가총액 기준으로 1,000대 기업 재직자의 80% 이상이 블라인드 회원이다. 한국 출시 7년 만, 미국 진출 5년 만에 일군 성과다. 블라인드는 사명처럼 익명으로 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눌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이제 단순한 직장인 커뮤니티를 넘어 기업정보 분석, 구인·구직 서비스를 선보이며 글로벌 인적자원관리(HR) 플랫폼으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문성욱(사진) 팀블라인드 대표를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만났다.
문 대표는 2009년 여행정보 플랫폼 ‘윙버스’를 네이버에 매각한 것으로 잘 알려진 벤처 1.5세대다. 네이버에서 여행 사업기획 및 운영책임, 티몬에서 프로덕트 시니어 디렉터를 맡으며 경험했던 ‘직장생활’을 통해 블라인드 아이디어가 탄생했다. 문 대표는 “짐 나르는 것부터 기획·개발까지 ‘A to Z’를 해내야 하는 스타트업과 달리 네이버는 부서 간의 업무 경계가 명확하고 성과주의가 강해 처음에는 적응이 힘들었다”면서 “하지만 인트라넷 익명 커뮤니티에서 ‘수고했다’ ‘감사했다’는 말이 오가고 날카로운 의견교환도 이뤄지는 걸 보고 ‘사람 사는 동네’ 같다고 느꼈다”고 회상했다. 회사와 분리돼 ‘계급장’을 떼고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직장문화가 개선될 수 있겠다는 실마리를 찾은 순간이었다.
블라인드가 성장한 계기는 블라인드 구성원인 직장인들의 목소리가 언론보도 등을 통해 사회로 터져 나오면서 만들어졌다. 대한항공 ‘땅콩 회항’ 등 각종 직장 내 ‘갑질’ 사건이 블라인드에서 처음 폭로돼 사회적 공분을 일으켰다. 블라인드가 언급된 기사량은 2017년 304건에서 2018년 2,214건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올해는 3,000여건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문 대표는 “모든 조직에는 문제가 있지만 진짜 문제는 이 사실을 부인하고 문제제기 통로를 차단할 때 시작된다”며 “블라인드에서 이어진 폭로는 한국의 변화된 시대 정신이 자연스럽게 표출된 결과일 뿐으로 꼭 블라인드가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나왔을 이야기”라고 말했다. 앞으로는 이 같은 직원들의 목소리를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기업만이 지속 가능할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블라인드 내에서 솔직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했던 것은 유저들이 플랫폼에 신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항간에는 일부 기업에서 블라인드 게시글 작성자를 색출했다거나, 블라인드 측에 연락해 돈을 주고 게시글을 삭제했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한다. 진짜 그럴까. 문 대표는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은 갖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 팀블라인드가 창립 이래 지켜온 철학”이라며 “블라인드에는 글 작성자가 누군지 알 수 있는 정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잃어버릴 수도, 누군가에게 제공할 수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실제 블라인드는 직장인임을 확인하기 위해 회사 e메일 인증 절차를 거쳐야만 가입할 수 있지만 그 이외에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어떤 데이터도 수집하지 않는다. 유저들 중 퇴사해 회사 e메일 계정이 비활성화되면 탈퇴 처리된다.
블라인드의 기업문화 역시 특별하다면 특별하다. 블라인드 직원들은 문 대표를 ‘문잡스’라고 부른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에서 따온 말이 아니다. 스타트업의 일원으로서 잡스러운 일을 도맡아 한다고 해서 ‘잡스’다. 이 호칭은 팀블라인드의 스타트업 정신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문 대표는 “옆 사람 연봉 빼고 다 공개한다는 생각으로 회사의 모든 일을 매주 열리는 전사 미팅에서 투명하게 공개한다”며 “사전에 익명으로 질문과 의견을 받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답변하는 문화를 중시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팀블라인드가 매년 발표하는 블라인드 직장별 재직자 만족도 조사에서 우리 회사가 지난해 8,000개 회사 중 7위에 올랐지만 유일한 스타트업이라 수록하지 못했다”고 귀띔했다.
블라인드는 출범 7년 만에 명실상부한 ‘국민 서비스’로 자리 잡았다. 415만명 회원에 월간 활성 사용자(MAU)는 250만명, 재방문율은 81%에 달한다. 직장인 회원들은 하루 평균 40분의 시간을 블라인드에 체류한다. 동영상 플랫폼인 유튜브(46분)와 맞먹는 수준이다.
문 대표의 다음 발걸음은 HR 플랫폼을 향하고 있다. 지난해 직장인을 위한 온라인 취미·강의 플랫폼 ‘마이 비스킷’과 커리어 컨설팅 플랫폼 ‘루프탑 슬러시’를 각각 한국과 미국에서 잇따라 출시했다. 올 8월에는 블라인드 데이터를 활용한 첫 번째 플랫폼인 ‘블라인드 허브’를 공개했다. 블라인드 허브는 블라인드에 쌓인 기업에 대한 내·외부 평가를 머신러닝으로 분석해 고객사에 제공하는 일종의 컨설팅 서비스다.
블라인드의 꿈은 한국 시장에 그치지 않는다. 전 세계 직장인을 위한 서비스가 목표다. 국내 스타트업으로는 드물게 미국 실리콘밸리에 본사를 둔 것도 이런 포석 때문이다. 일찍이 미국 시장을 두드려 마이크로소프트 재직자의 90%, 우버의 71%, 페이스북의 70%를 회원으로 확보한 바 있다. 문 대표는 국내 스타트업의 미국 진출 시도에 대해 “미국 역시 외계인이 사는 동네가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며 “한 가지 경향성으로 ‘미국은 이렇다’고 정의할 수 없는 만큼 실제로 부딪혀보고 바닥부터 경험을 쌓아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실리콘밸리 전문가를 자청하는 사람들의 말에 겁먹지 말고 직접 도전하고 실패도 해보는 것만이 답이라는 게 문 대표의 조언이다.
현재 블라인드의 매출이나 구체적인 재정 상황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문 대표는 “2018년 10월 시리즈B 투자를 포함해 총 네 번, 누적 250억원 규모 투자를 받았다”며 “광고 외에도 온라인 교육이나 채용 등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고 이런 부분에서 발생하는 매출과 투자금액 등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업간거래(B2B) 사업이 성공적으로 성장한다면 기업공개(IPO) 역시 충분히 가능하다는 구상이다. 문 대표는 “우리가 장기적으로 바라는 블라인드의 모습은 전 세계 직장인들이 믿고 쓸 수 있는 서비스, 나아가 기업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돕는 HR 테크 플랫폼”이라며 “이 꿈이 실현된다면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스타트업)’도 가능하리라고 본다”고 언급했다.
마지막으로 문 대표는 국내 기업들이 블라인드를 적대시하는 데 대해 안타까움을 표했다. 블라인드는 기업에 위협이 아니라 도움을 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문 대표는 “회사가 직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직원들의 인게이지먼트(관여도)가 훨씬 올라간다”며 “왜 고객 목소리는 들으면서 회사의 일부인 직원들의 목소리는 외면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시대는 변하잖아요. 제가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사무실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게 당연했거든요. 이제는 사람 한 명 한 명의 인격을 존중하고 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기업도 노력하는 사회가 왔으면 합니다. 모든 기업이 1970년대처럼 성장할 수는 없듯 어떻게 구성원과 기업이 함께 잘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하는 게 시대적 흐름이 아닐까요.”
/오지현기자 ohjh@sedaily.com 사진=오승현기자
◇He is △1980년 서울 △2003년 아이티라인 기획팀장 △2004년 이미지드롬 기획팀장 △2005년 윙버스 창업 △2009년 네이버 여행 사업기획 및 운영책임 △2011년 티몬 프로덕트 시니어 디렉터 △2015년 팀블라인드 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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