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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믿고 원룸 짓다 벼락거지…"원전 끼고 사는 주민 말은 왜 안듣나” [관점]

◆탈원전 정책 4년…원전 주민들의 절규

짓다만 아파트· 불꺼진 원룸…선행 투자했다 ‘날벼락’

IMF 한파도 비켜갔다는 울진, 처음 겪는 불황에 비명

4,000여명 철수에 돈줄 말라…지방세·지원금도 끊겨

영덕, 천지 원전 유치 지원금 380억 토해내야 할 판

경북 울진군 북면 한울 원자력발전본부 내 신한울 3·4호기 예정지. 원래 계획대로라면 원전의 골격을 드러내야 하지만 탈원전 정책으로 첫 삽조차 뜨지 못한 채 부지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뒤로 보이는 시설은 운영 허가를 기다리며 시운전 중인 1·2호기./울진=오승현기자




지난 21일 경북 울진군 북면 한국수력원자력 한울본부. 정문 앞에는 ‘신한울 3·4 호기 공사를 재개하라’고 쓰인 현수막들이 걸려 있었다. 두 차례의 까다로운 보안 검사를 받고 30분 만에 도착한 신한울원전 건설 현장은 극단적으로 대비됐다. 신한울 1·2호기 현장은 공사를 거의 다 마쳐 지붕에 고래 그림을 그린 원자로의 웅장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지만 바로 옆 3·4호기 현장은 황량한 공터였다. 얼핏 터파기 중 공사가 중단된 것처럼 보였지만 2011년 말 1·2호기 착공 때 3·4호기 부지를 미리 정리해뒀다고 한다. 빗물에 패인 흙더미와 무성한 잡초, 키 높이만큼 자란 잡목은 2017년 6월 정부의 탈(脫)원전 선언 이후 손길이 일절 미치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했다.

탈원전 정책 추진 4년 만에 울진 지역 경제가 빈사 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신한울 1·2호기 가동이 마냥 미뤄지고 3·4호기 건설이 중단됨에 따라 원전 관련 각종 지원금과 지방세가 끊겼고 수천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건설 인력이 빠져나가 돈줄이 마르자 상인들은 장사가 안 된다면서 비명을 지르고 있다. 코로나19 사태까지 겹쳐 설상가상이다. 한울본부 남문 인근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김 모 씨는 “신한울 1·2호기 건설이 한창일 때는 점심 시간에 북새통을 이뤘지만 최근 몇 년간은 공치는 날도 있었다”고 호소했다. 건설 경기가 피크일 때는 한수원 직원까지 포함해 최대 6,000명의 인력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도로변 산자락 곳곳에서는 오래 전에 문을 닫은 일명 ‘함바집(건설 일용직 임시 숙소 겸 식당)’이 눈에 띄었다.

울진 유일의 부품 제조업체도 철수


경북 울진군 북면 나곡리에 짓다만 채 방치된 아파트 공사 현장. 원전 4기 건설 및 운영에 따른 인구 유입에 대비해 투자했다가 탈원전 직격탄을 맞았다. /울진=오승현기자


한울본부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있는 북면 나곡리. 얼핏 봐서 축구장 2~3개 만한 부지에 공사가 중단된 아파트가 흉물처럼 방치돼 있었다. 산비탈을 깎아 만든 옹벽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했고 아파트 골조에는 녹슨 철근이 삐져나와 위험해 보였다. 1층만 짓다가 중단된 건물도 6개나 됐다. 인근 주민은 “건설 대금을 내지 못해 경매가 진행 중인 것으로 안다”며 “공사가 중단된 지 3년쯤 됐다”고 했다.

한울본부가 위치한 북면에는 적게는 수십 가구, 많게는 400여 가구 규모의 원룸촌이 3~5곳에 형성돼 있다. 신한울 1·2기 건설 공사가 본격화한 2013~2014년에 주로 지어진 것들이다. 이곳에서는 1·2호기 이후 3·4호기까지 예정된데다 10기(기존 6기 포함)의 원전이 돌아가면 관리·운영 인력도 덩달아 늘어날 것에 대비해 원룸 붐이 일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 한 달 만에 나온 탈원전 선언으로 모든 것이 헝클어졌다. 이상철 공인중개사는 “사람들이 빠져나가면서 원룸 월세가 50만 원에서 30만 원으로 떨어졌다”며 “내년에 한수원 아파트가 완공되면 원룸의 절반 정도는 채우지 못할 것 같다”고 우려했다. 울진군 유일의 원전 부품 회사로 방사선 계측기를 납품하는 U사도 신한울 3·4호기 건설 중단으로 철수했다고 한다.

울진군수 “대통령 바뀌었다고 약속 이행 안 해도 되나”


경북 울진군 한울 원자력본부 정문에 신한울 원전 3·4호기 건설 재개를 촉구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울진=오승현기자


울진군도 재정 운용에 비상이 걸린 지 오래다. 신한울 3·4가 착공됐더라면 일명 ‘건설세’라는 1,500억 원의 지역발전지원금이 자치단체의 곳간을 채웠겠지만 언제 공사가 재개될지 기약이 없다. 이는 320억 원 정도인 울진군의 순수 지방세수(도세 제외)의 5배나 된다. 신한울 1·2호기 공정률은 99.96%. 연료를 장착하고 시운전 중이지만 운영 허가는 신청한 지 5년이 넘도록 이뤄지지 않고 있다. 원전 규제 당국은 안전성 보강 차원이라고 말하지만 울진군은 현 정부에서 준공식을 피하기 위한 꼼수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다음은 전찬걸 울진군수와의 일문일답.

-탈원전에 대한 주민 반응은. “3·4호기 건설은 정부의 약속이었다.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이행하지 않아도 되는가. 원전을 끼고 사는 것은 우리다. 울진군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탈원전 로드맵이 나왔다. 지역 경제가 엉망이 됐다. 피해를 보상하든지, 약속을 지키든지 하라는 게 우리의 요구다.”



-지역 경제가 말이 아니던데. “원전 4기가 순차 완공된다는 전제 하에 군의 발전 계획이 마련됐다. 주민들의 선행 투자도 많았다. 원룸과 상가가 대표적이다. 1·2호기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1년 사이에 4,000명쯤 빠져나갔다. 원룸 짓다가 쫄딱 망할 처지다. 빚을 낸 사람 중 일부는 하루아침에 거지가 됐다. 불 꺼진 원룸을 보면 너무 안타깝다.”

-피해액은 어느 정도인가. “3·4호기 관련 피해액은 지방세와 법정 지원금 감소액만 따져도 2조 5,000억 원(원전 수명 60년 기준)으로 추산된다. 고용과 소비 등 부가가치 기준으로는 19조 원에 이른다.”

탈원전 정책으로 울진은 2019년 신년 벽두부터 주민등록 인구 5만 명이 무너졌다. 인구 감소는 지방마다 겪는 현상이지만 탈원전 이후 울진의 공동화 현상에 가속도가 붙었다. 행정자치부 주민등록 통계에 따르면 울진 인구는 지난해 4만 8,716명으로 탈원전이 본격화한 2017년에 비해 2,258명(4.4%) 감소했다. 이는 직전 3년간 인구 감소 1,130명(2.2%)의 두 배에 이른다. 이희국 울진 북면 발전협의회 회장은 “울진은 국제통화기금(IMF) 한파조차 비켜간 곳이었다“며 “1980년대 초 울진에 원전이 들어선 후 이런 불황은 처음 겪는다”고 말했다.

경북 울진군 북면 한울 원자력본부 인근에는 묻 닫은 ‘함바집’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울진=오승현 기자


원전 추진 때 총리·장관 내려왔는데…코빼기도 안 보여


울진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영덕군은 ‘잃어버린 10년’으로 홍역을 앓고 있다. 정부는 12일 영덕군 영덕읍 일대의 천지원전 1·2호기 건설 예정 구역을 공식 해제했다. 2012년에 지정된 지 10년 만이다. 보상 단계에서 원전을 포기한 경우는 처음이다. 이 바람에 영덕군은 정부로부터 받은 원전유치특별지원금 380억 원을 토해내야 할 처지다. 도세를 제외한 순수 연간 세수가 210억 원에 불과한 작은 자치단체인 영덕군으로서는 날벼락이나 다름없다. 줬다 빼앗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게 영덕군의 입장이다. 외려 원전 취소에 따른 직·간접적 경제 피해가 3조 원을 넘는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영덕군 관계자는 “지원금 반환 문제도 있지만 가장 큰 피해자는 원전 부지에 편입돼 10년 동안 재산권 행사에 제약을 받은 지역 주민들”이라며 “원전 건설도, 백지화도 정부에서 한 일인데 민원이 군으로 몰려 곤혹스럽다”고 말했다.

원전 백지화로 보상 받지 못한 토지는 전체 면적의 19%인 261만㎡(79만 평)에 이른다. 이런 처지의 땅 주인은 683명이다. 한수원은 이주 보상비 445억 원을 지출했지만 원전 백지화로 헛돈을 쓴 꼴이다. 이광성 천지 대책위원회 위원장은 “원전을 추진할 때는 총리와 장관이 영덕에 와서 온갖 장밋빛 청사진을 내놓았지만 지금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는 2014년 말 당시 정홍원 국무총리가 영덕을 방문했을 때 정부가 제시한 ‘영덕 10대 제안 사업’ 팸플릿을 보여줬다.

정부는 신한울 3·4호기 사업 기간을 오는 2023년까지 연장한 채 사업 추진을 보류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원전 주민 피해와 한수원 매몰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천지원전이 백지화한 영덕도 마찬가지다. 두 곳의 상황은 약간 다르지만 지역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나라가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는 불만을 쏟아냈다. 탈원전 현장은 이렇듯 분노와 한숨이 넘쳐 나고 있었다.

/울진·영덕=권구찬 선임기자 chan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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