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 수출을 두고 10년간 진행돼온 한미 간 통상 분쟁이 연내 판가름 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이 한국산 세탁기 수입을 막기 위해 각종 보호무역 조치를 남발하자 국내 업체들은 현지 생산을 확대했고 맞물려 국내 생산 기반과 일자리는 급속히 줄어왔다.
26일 관계 부처에 따르면 미국의 세탁기 세이프가드(긴급 수입제한 조치) 관련 세계무역기구(WTO)의 패널 심의 결과가 연내 확정될 예정이다. 이번 심의는 미국이 지난 2018년 수입 세탁기에 대해 세이프가드를 발동하자 한국이 WTO에 해당 조치를 제소한 데 따른 것이다.
미국이 세이프가드를 발동한 것은 반덤핑관세를 통해서는 한국 제품의 수입을 막기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앞서 미국 상무부는 2012년 삼성전자와 LG전자에 최대 12.15%의 반덤핑관세(예비 판정)를 부과한 것을 시작으로 수입제한 조치를 지속해왔다. 두 업체가 반덤핑관세를 피해 생산 기지를 중국으로 옮기자 미국은 중국 현지 법인에 최대 111.09%의 반덤핑관세를 매기며 압박을 이어갔다. 삼성과 LG가 베트남과 태국으로 생산 기지를 재차 옮기며 관세를 피하자 미국은 ‘한국이 반덤핑조치를 무력화하고 있다’는 자국 세탁기 업체의 청원을 수용해 전 세계 세탁기에 대한 수입제한 조치를 발동했다.
삼성과 LG는 자사 제품으로 미국 업체들이 피해를 보고 있지 않다며 세이프가드가 부적절하다고 반박한다. 자사 제품과 월풀 등 미국 업체 제품 간 경쟁이 미미하다는 주장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과 LG는 분리 세탁이 가능하며 인공지능(AI) 기술을 접목한 첨단 제품을 내놓고 있는 반면 월풀은 세탁 기능이 우수한 제품을 만드는 데만 주력하고 있다”며 “각사 제품을 선호하는 수요자층이 분명히 구분돼 경쟁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삼성과 LG 측은 세이프가드가 발동된 2018년 이후 양사가 수출 대신 현지 생산량을 늘려 제품을 판매하고 있는 만큼 세이프가드를 유지할 명분이 사라졌다고 지적한다.
한국이 이번 세이프가드 분쟁에서 승소하면 미국과 세탁기 수입을 놓고 벌인 통상 공방에서 두 번째 승리를 거두게 된다. 앞서 한국은 미국이 한국산 세탁기에 반덤핑관세를 부과하면서 활용했던 덤핑률 산정 방식(제로잉)이 WTO 협정 위반이라는 결과를 2016년 받아낸 바 있다.
다만 이번 분쟁에서 승소하더라도 실리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세이프가드가 철회되더라도 삼성과 LG가 미국으로 생산 기지를 이미 옮긴 터라 수출 개선 효과가 크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실제 미국의 보호무역 조치가 시작되기 직전인 2011년 5억 7,100만 달러에 달했던 한국의 대미 세탁기 수출 규모는 2018년 1억 6,200만 달러로 급격히 줄었다.
승소국은 상대국에 세이프가드에 따른 피해 보상을 요구할 수도 있으나 한미 관계를 감안할 때 미국에 피해 청구서를 내밀기도 쉽지 않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WTO 패널 심의 결과에 불복해 상소할 경우 상소 기구가 사실상 마비된 상태인 터라 사건이 영구 미제로 남을 가능성도 있다. 한 통상전문가는 “미국이 10여 년간 보호무역 조치를 남발하는 동안 국내 생산 기반은 없어졌고 관련 일자리도 모두 사라졌다”며 “삼성과 LG가 해외로 생산 기지를 옮긴 상황에서 승소한다한들 상처뿐인 승리가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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