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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언어정담] 체르노빌, 끝나지 않는 아픔을 노래하다

작가

알렉세예비치 '체르노빌의 목소리'

피폭 무릅쓴 사랑, 고통의 과정 등

참사가 빚어낸 비극 담담하게 묘사

아픈 이 보듬는 '작가의 자격' 입증





철저히 사실에 근거한 다큐멘터리형 글쓰기는 과연 건조하고 메마른 객관적 글쓰기일까. 건조하고 메마른 객관적 글쓰기만으로는 감동을 줄 수 없는 것일까. 감동은 다정하고 촉촉한 감수성에서만 나오지는 않는다. 사실의 힘 자체가 주는 감동이야말로 다큐멘터리형 글쓰기의 매력이다. 사실에 입각한 글쓰기야말로 가장 강렬하면서도 직접적으로 생생하게 감성을 자극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사실적 글쓰기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 작가가 바로 스베틀라나 알렉세예비치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원전문제에 대해 침묵하던 전세계에 경종을 울렸다. ‘체르노빌? 그건 수십 년 전에 있었던, 머나먼 나라의 원전사고 아니야? 우리와 무슨 상관이야?’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체르노빌의 참사는 지구상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무시무시한 비극임을 일깨워주었다. 또한 재난이라는 것이 단지 원인과 결과만으로 분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후로도 오랫동안 결코 끝나지 않는 상처와 후폭풍’을 껴안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문제작이다.





사랑하는 남편이 원전 사고시 소방수로 화재를 진압하러 갔다가 피폭을 당한 뒤, 남편은 이제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거대한 원자로’가 되어버렸다고 선언한 의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남편의 마지막 병상을 지키려 하는 아내의 이야기. 피폭 지역에 가까이 살고 있던 여성이 언니네 집으로 피신을 하러 가니, 친언니가 친동생에게조차 문을 열어주지 않고 아예 얼굴도 보여주지 않은 채 피폭 당할까봐 문전박대를 하더라는 이야기는 얼마나 끔찍한가. 가족이 가족을 배신하고, 가족이 가족을 버리게 만드는 참사의 한복판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오직 그 원전 가까이 산다는 것’만으로 평생 고통받고 있다. ‘당신은 영웅적인 사명을 안고 조국을 구하는 미션을 완수하는 애국자’라는 식의 홍보에 속아 원전지역복구를 위해 투입되었다가 본인도 방사능에 노출되어 평생 장애와 질병을 앓게 된 수많은 사람들. 원전지역 복구인력으로 투입된 아버지의 안전모를 마치 훈장처럼 자랑스럽게 쓰고 다니다가 뇌종양에 걸려 고통스럽게 죽어간 다섯 살 소년의 이야기. 어느 이야기 하나 쓰라리고 참혹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이런 글을 쓰기 위해서는 고통의 한가운데서 함께 아파하는 마음과 그 고통에 거리를 두고 그 모든 과정을 통찰하고 상상하는 큰그림을 그려내는 드넓은 퍼스펙티브(시각)가 필요하다.

때로는 원전 피해에 수십년 동안 고통 받는 당사자의 마음이 되어보고, 때로는 심지어 원전사고를 은폐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부패관리들의 입장에서도 사태를 내려다볼 수 있는 다자간 시점이 필요하다. 알렉세예비치는 이런 분열적 시점에 관한 천재적 직관을 발휘한다. 단지 취재의 성실함만이 아니다. 그가 살아오면서 배우고 읽고 느끼고 경험했을 모든 상처와 인문학적 지식이 총망라되어야만 이토록 풍요로운 진실의 다성적 울림이 가능하지 않을까. 단지 피해자의 억울함만을 강조하는 다큐멘터리였다면 우리는 이토록 커다란 감동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특별히 내세우지 않지만 바로 그 가만히 들어주는 듯한 보이지 않는 청자의 시점이야말로 작가의 엄청난 역량이 필요한 지점이다. 때로는 흐르는 눈물을 그저 흐르는 대로 내버려두고 함께 고통받는 생존자와 끌어안고 울 수 있는 따스한 마음이 필요하고, 때로는 절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려하지 않는 피해자들의 한사코 닫힌 마음을 열기 위해 온갖 지극정성을 쏟아야한다. 때로는 가해자나 방관자에 대한 노여움조차 냉정하게 숨긴 채, 한사코 거짓말을 늘어놓는 그들을 인터뷰하는 용기도 필요했을 것이다. 고통받는 자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마음, 그 안에서 치유의 불꽃을 피워올리는 용기,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끝내 고통받는 자의 편에 서는 용기. 알렉세예비치는 과도한 문학적 가공 없이도 오직 가만히, 끈기있게, 단 한 번도 지루해하거나 귀찮아 하지 않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야말로 작가되기의 첫걸음임을 온몸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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