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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문제는 신뢰다

신경립 문화부장

메르켈 獨 총리의 평전 이례적 인기

카리스마·쇼맨십과는 거리 멀었지만

신중·진솔·포용으로 깊은 신뢰 쌓아

대선 앞둔 韓 정치인 곱씹어 보기를


“한국이나 미국도 아니고, 유럽 지도자의 전기가 이렇게 많이 팔린 적은 거의 없어요. 국내에서는 워낙 인기가 없는 장르거든요. 보기 드문 현상이라 저희도 주목하고 있습니다.”

한 출판사 대표와 만난 자리에서 얼마 전 출간된 한 권의 책이 화두에 올랐다. 지난 10월 출간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평전 ‘메르켈 리더십:합의에 이르는 힘(케이티 마틴 지음, 모비딕북스 펴냄)’이다.

독일 총리에 대한 다큐멘터리식 기록이 국내 독자들 사이에서 인기라니 의외라면 다소 의외다. 회고록으로 ‘대박’을 낸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부부처럼 스타성이 강한 인물도 아니고 독일은 한국과 긴밀하게 얽힌 국가도 아니니 말이다. 한 온라인 서점 사이트에서 2014년 출간된 메르켈 총리 공인 전기의 판매 지수는 이 책의 40분의 1 수준이었다.

사실 메르켈 총리는 대중적 인기를 몰고 다닌 오바마 전 대통령 같은 정치인과는 거리가 멀다. 과학자 출신인 그에게서 화려한 언변이나 극적인 연출 능력, 압도적인 카리스마는 찾아보기 힘들다. 틀에 박힌 옷차림에 무미건조한 말투의 그는 사생활 노출도 극도로 꺼린다. 그의 남편은 세 차례나 열린 총리 취임식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쇼맨십과는 담을 쌓은 그의 무기는 정확함과 신중함·진솔함, 그리고 포용력이다. 기본에 충실한 원칙주의자, 그것이 16년간 메르켈 총리가 고수한 정체성이다. 때로 답답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말 한 마디에도 팩트를 중시하고 토론과 고심을 거듭한 끝에 결정을 내리는 메르켈 총리는 독일뿐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깊은 신뢰를 얻었다. 그 신뢰가 기반이 된 메르켈의 리더십은 글로벌 금융 위기와 유럽 재정 위기, 테러와 난민 위기 등 무수한 우여곡절을 겪은 와중에도 사회를 안정시키고 경제를 성장하게 만들어 독일을 전성기로 이끌었다.



수년간 메르켈 집무실에서 그를 관찰한 미국의 저널리스트 케이티 마틴에 따르면 메르켈 총리는 “대중을 흥분시키는 힘은 위험하다”고 여겼다. 그는 믿을 수 없는 말을 쏟아내는 대신 정확한 데이터와 냉철한 판단을 통해 자신의 어젠다를 관철시키는 일에 주력했다. “중요한 것은 내일 우리가 신문에서 읽을 내용이 아니라 2년 후에 달성할 결과”라는 말은 메르켈의 정치 철학을 오롯이 보여준다.

이런 한결같은 모습으로 16년의 총리 생활을 마친 메르켈이 공식 퇴임에 즈음해 한국에서 다시금 조명을 받는 이유는 자명하다. 우리에게도 메르켈 총리처럼 우직한 닻이 돼줄 지도자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유권자들이 마주하는 현실은 암울하다. 두 명의 주요 후보자와 그 가족까지 둘러싼 의혹은 무엇 하나 개운하게 걷히지 않았고 양측이 연일 쏟아내는 온갖 말에서는 객관적 근거도, 진정성도 찾아보기 힘들다. 정책도 안갯속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핵심 공약이던 기본소득을 돌연 철회하는가 싶더니 얼마 전에는 “삼성이 기본소득을 얘기해보면 어떻겠냐”며 느닷없이 기업을 자신의 공약에 끌어들였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아직 뚜렷한 정책 비전을 제시하지도 못하고 있다. 신뢰도, 품위도 없는 선거판에는 포퓰리즘과 상호 비방, 화제성만을 노린 퍼포먼스만 난무하다. ‘뽑을 후보가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대선의 시간까지 이제 90여 일 남짓,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우리 모두가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8일 공식 퇴임을 앞두고 이달 2일 고별 열병식에 참석한 메르켈 총리는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연대와 신뢰, 특히 팩트에 대한 믿음”을 당부하면서 “정치에서 신뢰가 가장 중요한 자산”임을 강조했다. 후보들은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메르켈이 늘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유권자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앞으로 5년 동안 누구를 더 신뢰할 수 있을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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