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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여는 수요일] 갈대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5.01.22 05:00:00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날카로운 잎 서걱거리는 무사들이 울고 있을 줄 몰랐다. 바람 불 때마다 일제히 물결칠 때 한마음으로 환호하는 줄 알았다. 무리 지어 있 -
[시로 여는 수요일] 언제 삶이 위기 아닌 적 있었던가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5.01.14 17:39:14언제 삶이 위기 아닌 적 있었던가 껴입을수록 추워지는 것은 시간과 세월뿐이다 돌의 냉혹, 바람의 칼날, 그것이 삶의 내용이거니 생의 질량 속에 발을 담그면 몸 전체가 잠기는 이 숨막힘 설탕 한 숟갈의 회유에도 글썽이는 날은 이미 내가 잔혹 앞에 무릎 꿇은 날이다 슬픔이 언제 신음 소릴 낸 적 있었던가 고통이 언제 뼈를 드러낸 적 있었던가 목조계단처럼 쿵쿵거리는, 이미 내 친구가 된 고통들 그러나 결코 위기가 우리 -
[시로 여는 수요일] 손목을 부치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5.01.08 05:30:00편지를 부친다는 게 손목을 부치고 운다 편지를 쓴다는 게 자서전을 쓰고 운다 세상에, 주소를 쓰면 언제나 제 주소를 쓰고 편지봉투 같은 바지 하나 벗지 못하는 네가 손톱 같은 우표 한 장 붙이지 못하는 네가 근이양증(筋異養症), 근이양증…… 편지를 부친다는 게 손목을 부치고 운다울지 말아요. 근이양증으로 떨며 편지 한 장 부치지 못하고 돌아오는 그대. 네 걱정을 한다는 게 내 푸념만 했다고 울지 말아요. 모든 글은 자 -
[시로 여는 수요일] 동백은 지고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12.17 17:55:04당신은 막막한 바다를 보고 나는 당신 열두 자 깊은 눈빛을 보고 있네 당신은 쓸쓸한 바다의 맥을 짚고 나는 당신 울멍울멍한 고독을 살피네 동백은 지고 동백 지고 물새마저 흰 날개를 접은 삼양 검은 바다는 창백한 등대 불빛을 감추고 떨기나무 불온한 그림자를 감추고 벼랑 같은 고독을 감추고 아득해져서는 어찌해 볼 수 없도록 아득해져서는 나는 당신 불경한 맥을 짚고 당신은 내 아찔한 심장소리에 눈을 씻네당신도 동백이 -
[시로 여는 수요일] 못을 빼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12.11 06:00:00티브이 광고에 잘못 한다에서 못을 빼니 잘 한다가 되었다 잘못 먹었다에서 못을 빼면 잘 먹었다 잘못 살았다에서 못을 빼면 잘 살았다 잘못 가르쳤다에서 못을 빼면 잘 가르쳤다 잘못 배웠다에서 못을 빼면 잘 배웠다 자주 써먹어 녹슬지 않은 못, 빼면 이렇게 뜻이 달라진다 꾸중이 칭찬으로 부정적인 말이 긍정적인 말로 바뀐다 제자리 잘 박힌 못이 문장을 완전히 바꿔 놓는 것이다 티브이 광고뿐이랴, 드라마에서도, 뉴스에서 -
[시로 여는 수요일] 폭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12.03 17:40:36싸락눈으로 속삭여봐야 알아듣지도 못하니까 진눈깨비로 질척여봐야 고샅길도 못 막으니까 저렇게 주먹을 부르쥐고 온몸을 떨며 오는 거다. 국밥에 덤벼봐야 표도 안 나니까 하우스를 덮고, 양조장 트럭을 덮는 거다. 떼로 몰려와 그리운 이름 소리쳐 부르는 거다. 어른 아이 모다 눈길에 굴리고 자빠뜨리며 그리운 이의 발목을 잡는 거다. 전화를 끊고 정거장을 파묻는 거다. 다른 세상으론, 비행기 한 대 못 뜨게 하는 거다. 철 -
[시로 여는 수요일] 꽃이 보이는 날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12.01 14:49:39길가에 꽃이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가 가까이 있어도 먼 산 같은 날 길가에 꽃이 보이는 날은 그대가 멀리 있어도 내 곁에 있는 날꽃이 보이지 않는 날은 마음이 몸을 앞설 때이다. 시각적 소실점이 심리적 소실점으로 전환되었을 때다. 대개 팽팽한 긴장감 속에 골몰해 있을 때다. 무언가를 쫓고 있거나 무언가에 쫓길 때다. 사물을 보고 있으나 사물이 보이지 않는다. 꽃이 보이는 날은 마음이 돌아와 몸과 함께 거닐 때다. 목표 -
[시로 여는 수요일] 바다를 본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11.19 17:43:54성산포에서는 교장도 바다를 보고 지서장도 바다를 본다 부엌으로 들어온 바다가 아내랑 나갔는데 냉큼 돌아오지 않는다 다락문을 열고 먹을 것을 찾다가도 손이 풍덩 바다에 빠진다 성산포에서는 한 마리의 소도 빼놓지 않고 바다를 본다 한 마리의 들쥐가 구멍을 빠져나와 다시 구멍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바다를 본다 평생 보고만 사는 내 주제를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나를 더 많이 본다저런,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더니. 강릉 -
[시로 여는 수요일] 남의 이야기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11.13 06:00:00주말 저녁 무렵 아내가 내민 음식물 쓰레기통을 비우러 밖에 나왔는데 아파트 옆 동 쪽으로 걸어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에 깜짝 놀랐다 영락없는 내 어머니였다 돌아가신 지 삼 년 된 어머니가 다른 모습으로 아직 이승에 살고 계신 건 아닐까 하는 생뚱한 생각으로 한동안 쳐다보았다 어제 퇴근길 사내아이의 아빠, 하고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딸만 둘인 내가 모르는 사내아이의 아빠, 하고 부르는 소리에 왜 돌아보았을까 -
[시로 여는 수요일] 길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11.05 17:42:09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 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 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곳 온갖 사람 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 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 -
[시로 여는 수요일] 풀잎 기둥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10.30 06:00:00황하 협곡 병령사 비탈길을 따라 삐죽이 뻗어내린 바위너설에 누군가 풀대를 꺾어 받쳐 놓았습니다. 오늘도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까닭이었습니다. 천 길 낭떠러지 아슬아슬한 바위너설을 가냘픈 풀대 하나로 받쳐 놓았군요. 그 풀대를 짚고 바위가 굴러 떨어지지 않는군요. 바위가 짊어진 아득한 하늘이 계곡 아래로 굴러 떨어지지 않는군요. 병령사 협곡을 가보지는 않았어도 왠지 저 모습을 본 듯하고말고요. 아이 손을 잡고 가 -
[시로 여는 수요일] 채송화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10.22 17:47:16이 책은 소인국 이야기이다 이 책을 읽을 땐 쪼그려 앉아야 한다 책 속 소인국으로 건너가는 배는 오로지 버려진 구두 한 짝 깨진 조각 거울이 그곳의 가장 큰 호수 고양이는 고양이 수염으로 알록달록 포도씨만 한 주석을 달고 비둘기는 비둘기 똥으로 헌사를 남겼다 물뿌리개 하나로 뜨락과 울타리 모두 적실 수 있는 작은 영토 나의 책에 채송화가 피어 있다구두 한 짝이 유람선이 될 수 있다면, 깨진 조각 거울에 떠가는 구름 -
[시로 여는 수요일] 활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10.15 17:49:05빈병 실은 리어카를 끄는 할머니 허리 활처럼 하얗게 굽는다 할머니 생애에 쏘지 못한 화살이 남아서일까…… 언덕을 넘어 팽팽하게 휘어지는 허리노을 너머 고소한 냄새가 난다던 할머니들이 있기는 했다. 참깨 서리를 하려는지 온몸을 낫으로 구부려 천국으로 떠나셨다. 깨 터는 소리인가 싶어 귀 기울여 보면 빗소리이곤 했다. 언덕 넘는 저 할머니, 평생의 내공으로 당겼으니 얼마나 멀리 날아가겠는가? 어느 은하 어느 별자리 -
[시로 여는 수요일] 손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10.01 17:55:14예전엔 얼굴을 보아 알겠더니 요즘엔 뒤를 보아 알겠네 예전엔 말을 들어 알겠더니 요즘엔 침묵을 보아 알겠네 예전엔 눈을 보아 알겠더니 요즘엔 손을 보아 알겠네그래요. 얼굴과 말과 눈은 앞세우는 것이고, 뒤와 침묵과 손은 뒤따르는 것이지요. 앞이 큰소리치는 것들이라면, 뒤는 묵묵히 약속을 수행하는 것들이지요. 예전엔 얼마나 많은 웃음에 속고, 얼마나 많은 말들에 솔깃하고, 얼마나 많은 눈빛들에 헛된 믿음을 보였던 -
[시로 여는 수요일] 벌집
오피니언 사외칼럼 2024.09.24 17:49:51벌집을 들여다본 일이 있는가. 구멍마다 허공이 담긴 그 집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사랑은 모텔에서 프로포즈는 이벤트로 아이는 시험관으로 장례는 땡처리하듯 화장으로 또는 배 밑으로 밀어 넣는 뼈 시린 수장(水葬)! 티브이와 왕따와 듣보잡들과 안방까지 쳐들어오는 흙탕물을 나눠 마시며 어디로 가는 것인가. 살처분하고 남은 닭과 돼지와 오리를 퀵 배달로 시켜 먹고 구멍마다 허공이 담긴 그 집에서는 지금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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