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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상 장기영…그 치열한 생애]'불도저 추진력' 뒤엔 남다른 치밀함
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2016.05.01 18:12:12한국일보가 눈부시게 성장하자 당대 최고의 기업인이 백상에게 경제신문사를 같이 만들자고 제의해왔다. 백상은 이를 정중하게 고사했다. 한국일보를 창간한 지 2년밖에 안 지난데다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판단에서다. 해방 직후인 1947년 백상의 주도로 설립한 서울경제연구회 멤버들이 경제지 창간을 모색했음에도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1960년에야 서울경제신문을 창간한 사실에서 엿볼 수 있듯이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백상의 추진력 이면에는 남다른 신중함이 있었다. 돌다리도 수없이 확인한 후에야 건너는 면모는 ‘일간스포츠’ 창간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서울경제 창간 직전 한국올림픽위원회(KOC) 상임위원을 맡았던 백상에게는 스포츠신문 창간 제의도 숱하게 들어왔다. 그러나 백상은 끝내 기다렸다. 서울경제신문의 4면을 전면 스포츠면으로 활용하는 기간만 8년을 거쳤다. 백상이 스포츠신문 창간을 기다린 것은 무엇보다 서울경제가 잘나갔기 때문이다. 1960년대의 서울경제신문은 1개면 전면을 스포츠에 할애한 유일한 일간신문이었다. 종합지들도 스포츠면을 따로 제작하지 않던 1960년대에 백상은 가뜩이나 좁은 지면이 더 좁아져 경제 기사를 올리는 기회가 적어진다는 우려에도 서울경제에 스포츠 1개면을 고정시켰고 이는 보기 좋게 들어맞았다. 스포츠 기사를 원하는 일반 독자들은 서울경제를 앞다퉈 찾았다. 서울경제를 통해 스포츠 신문의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스포츠전문지가 1963년 첫선을 보였는데 그 이름이 바로 ‘일간스포츠’였다. 그러나 이때 나온 일간스포츠는 서울경제를 모태로 창간된 일간스포츠와는 전혀 다른 신문이었다. 주간지인 ‘일요신문(요즘의 일요신문과는 별개의 매체)’이 갈아입은 옷의 제호가 바로 ‘일간스포츠’였다. 일요신문이 변한 일간스포츠는 매일 4면을 발행하면서도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전면적인 스포츠신문 발행 1년2개월 동안 지지부진한 성과에 그쳤던 일간스포츠는 1964년 10월 경제지로 발행 형태를 바꿨다. 제호를 일간경제신문으로 변경하고 편집도 서울경제신문과 똑같이 4개 면에 1개 면을 스포츠에 할애하는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일간경제신문의 경영 성과도 신통치 않았는지 1년 뒤인 1965년에는 제호가 현대경제일보로 다시 바뀌었다. 사라졌던 ‘일간스포츠’라는 제호는 1969년 백상 장기영이 새로 창간하는 스포츠신문의 제호로 채택하면서 화려하게 재탄생했다. 서울경제신문이 모태였던 일간스포츠는 신문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독자를 확보한 일간지로 자리 잡으며 스포츠 대중화를 선도하는 매체로 떠올랐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한국 대표를 맡을 만큼 체육에 관심이 많으면서도 일간스포츠를 창간할 때까지 서울경제를 통해 장기간의 사전 준비를 거쳤던 백상 장기영의 신중함과 치밀함, 판단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남은 이야기가 한 가지 더 있다. 스포츠신문으로 자리 잡지 못한 옛 일간스포츠는 일간경제신문과 현대경제일보를 거쳐 신군부가 탄생한 1980년 이후 한국의 대표적인 경제신문으로 뛰어올랐다. 강제폐간당한 서울경제신문의 빈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은행연합회와 전경련의 출자를 받아 자본 충실화를 기하고 이름도 한국경제신문으로 바꿨다. 복잡하게 얽힌 서울경제와 일간스포츠, 한국경제신문이라는 제호에는 백상과 서울경제신문의 옛 영광과 애환의 흔적이 담겨 있는 셈이다. -
[백상 장기영…그 치열한 생애]부총리 취임 일성 "물가 때려잡겠다"…열정·패기로 한국성장 길터
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2016.05.01 18:12:04한국은행을 떠난 백상 장기영이 지난 1952년 4월28일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했을 때 세인들은 놀랐다. 조선은행 청진지점 시절부터 쌓아온 인맥을 바탕으로 실업계에 투신할 것이라는 관측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지인들의 동정 어린 시선도 없지 않았다. 군소신문이 난립하고 사이비 기자가 판치던 시절이어서 언론과 기자에 대한 평판이 땅에 떨어진 시기였기에 더욱 그랬다. 엘리트 의식이 강한 금융계에서는 아까운 인물을 하나 잃었다는 평까지 나왔다. 그러나 백상의 생각은 달랐다. 본인이 활발한 대외 기고활동을 펼쳤을 만큼 신문에 대해 개방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다. 해방 직후 일본으로 떠나는 조선은행 청진지점의 일본인 동료들에게 ‘다음에는 신문 기자가 되어 상하이에서 다시 만나자’라고 석별의 정을 나눴다는 일화는 반 농담조였지만 언론에 대한 관심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언론인으로서 백상은 가히 미다스의 손처럼 손대는 일마다 성공을 만들어냈다. 조선일보 사장으로 취임한 백상은 공무국에 내려가 문선작업을 독려하고 가판을 직접 챙겼다. 백상이 재임한 2년 동안 부수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백상이 조선일보를 타의로 나올 때는 새로운 매체를 만들려는 백상에게 유능한 인재들이 따라 붙었다. 태양일보를 인수해 1954년 6월9일 창간한 한국일보는 언론계에 선풍을 일으켰다. 한국일보는 특히 상업지를 표방했다는 점이 다른 신문들과 달랐다. 사회의 목탁이라는 허명과 정론지라는 타이틀에 빠진 채 정치 뉴스를 주로 쏟아내던 당시 언론 풍토에서 뉴스의 가치에 따라 독자로부터 인정받고 광고주에게서 광고 게재를 의뢰받는 상업지를 표방했다는 점은 시장주의자로서 백상의 신념에서 나왔다. 백상의 시장 중시는 7년 후 서울경제신문 창간으로 이어지게 된다. 서울경제신문과 한국일보 창간 무렵은 백상 장기영이 신문 제작에 가장 심혈을 기울인 시기로 꼽힌다. 사장실에 야전침대를 설치하고 철야로 제작을 독려했으며 매일 아침 논설실·편집국 합동회의를 주재하며 사설의 제목과 집필 방향을 정하고 직접 사설도 썼다. 덕분에 서울경제와 한국일보는 젊고 다양하며 내용이 깊은 신문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급속하게 세를 불려나갔다. 서울경제는 창간 직후부터 어떤 경제지와도 견줄 수 없는 부동의 1위로 뿌리내렸고 한국일보도 1960년대부터는 ‘정상이 보인다’며 신문 업계 1위를 향해 내달렸다. 신문 발행인으로서 백상의 감각은 남달랐다. 서울경제는 창간 일주일 뒤부터 ‘경제인 왕래’라는 고정란을 신설해 김포공항을 오가는 주요 인사들의 출국과 입국 예정일, 해외에서의 일정을 간략하게 실었다. 이를 위해 공항에 전담기자를 배치했는데 인원도 적은데 공항만 맡을 여유가 어디 있느냐는 불평이 없지 않았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해외 비즈니스나 공무원의 출장이 극히 적었던 시대에 누군가가 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면 그 자체로 중요한 경영정보가 될 수 있다는 백상의 생각은 기대 이상의 효과를 나타냈다. 최고경영자나 고위직 공무원 같은 독자들의 반응이 좋았을 뿐 아니라 서울경제 기자들도 양질의 취재원들과 보다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는 계기가 됐다. 길목과 핵심을 중시하는 백상의 안목이 가져온 개가였다. 한국 언론에 항공기 시대를 연 주인공도 백상이다. 백상은 기자란 모든 관점에서 사물을 봐야 한다며 항공부를 창설하고 단발기와 쌍발기, 헬리콥터를 잇따라 사들여 다양한 항공사진을 서울경제와 한국일보에 실어 지면의 질을 끌어 올렸다. 5·16 직후 신문제작용 종이가 부족할 때는 몸소 작은 비행기에 몸을 싣고 서울과 부산을 하루에 두 번씩 왕복하며 신문용지를 실어 날랐던 적도 있다. 수해로 배달이 불가능한 지역이라도 생기면 백상은 항공기로 신문을 싣고 가 학교 등의 옥상에 뿌렸다. 독자와의 약속이 가장 중요하다는 신념은 부수와 사세 확장으로 이어졌다. 백상은 1964년 5월11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단행한 개각에 따라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입각했다. 개각 때마다 부총리 또는 재무부 장관으로 하마평이 나돌던 백상이었지만 외견상 개각은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실제로 박 대통령은 백상을 오래전부터 눈여겨보고 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61년 여름 칠레월드컵 출전을 앞두고 공산권인 유고슬라비아 선수단의 방한도, 우리 대표팀의 원정도 용납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찾아간 장기영 당시 대한축구협회장은 ‘자칫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설득한 끝에 최종 예선전을 치를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은 당시부터 백상의 능력을 눈여겨봤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식량난인 한창이던 1963년 8월 한국이 세계적인 곡물 부족 사태 속에서도 일본 미쓰이물산을 통해 캐나다산 밀가루 10만톤을 수입한 적이 있었는데 이를 막후에서 성사시킨 백상에게 박 의장은 고마운 감정을 숨김없이 표시했고 부총리 기용으로 이어졌다. 공식 외교 경로로도 진행할 수 없었던 곡물 수입을 위해 백상을 일본 내 인맥을 총동원, 미쓰이는 물론 미쓰비시도 물량을 대주는 협조를 얻어냈는데 한국이 수입한 캐나다산 밀가루는 당초 한국처럼 심각하지는 않지만 식량난을 겪고 있던 일본 국내용을 한국으로 돌린 것이어서 식량 밀사로서 백상의 공로는 더욱 돋보였다. 장관이나 측근들의 경쟁을 유도하고 힘을 집중해주지 않는 통치 스타일로 유명했던 박 대통령이 유독 백상에게만큼은 경제운용의 전권을 주고 경제부처 장관 인사권까지도 공유한 데는 신뢰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정일권 국무총리도 백상에게 ‘정일권 내각이 아니라 정일권·장기영 연립내각’이라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경제는 백상에게 맡겼다. 어느 누구보다 강력한 권한을 갖고 경제부총리로 입각했지만 정작 상황은 최악이었다. 3공 출범과 동시에 민생고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으나 연이어 터지는 의혹사건과 1월 직할기업체(국영기업체)의 임금 인상 요구 데모, 2월의 3분 폭리 사건, 3월의 한일회담 반대 대학생 데모, 4월 국유재산 불하 의혹 사건을 거치며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특히 경제는 더욱 좋지 않았다. 도매 물가가 1962년 9.5% 상승에서 1963년에는 21%, 1964년을 통틀어서는 36.4%나 수직 상승하는 인플레이션 속에서 외환 고갈과 식량난 등 난제가 산적한 상태였다. 더욱이 5월 단행된 환율 인상으로 일반 국민은 물론 재계의 정부에 대한 불만과 불신도 심해지고 있었다. 경제난국 속에 등장한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취임식에서 ‘불도저’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취임사를 날렸다. ‘물가를 때려잡고 저축을 늘릴 테니 6개월만 참고 기다려달라.’ 백상의 호언대로 경제는 점점 펴져갔다. 여기에는 경제기획원에 힘을 몰아준 박 대통령의 리더십도 있지만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정력적으로 일하던 백상의 열정이 크게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한국 경제는 백상이 경제부총리로 재임하던 기간 중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고속성장 가도에 들어섰다. 경제기획원도 백상이 서울경제신문·한국일보 발행인으로 복귀한 1967년 10월까지 최강 경제부처로서 한국 경제의 고속질주를 이끌었다. 백상은 남북대화에서도 북측 대표단을 능수능란하게 상대해 대화를 주도했다. 북측 대표단이 서울의 많은 자동차를 보고 ‘전국에서 모으느라 수고했다’고 비아냥거리자 ‘아니, 자동차 모으는 것은 힘들지 않았는데 저 빌딩들을 다 옮겨오는 게 힘들었다’고 맞받아친 일화가 유명하다. 국회의원으로, 국제올림픽 위원으로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백상은 유신 이후 기자들을 해직시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금융제재를 받으면서도 회사를 키워나갔으나 1977년 4월11일, 심장마비로 운명하고 말았다. 향년 61세였다. 수많은 사람들의 애통 속에 백상은 떠나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백상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더욱 강해졌다. 백상이 남들처럼 평균 수명대로 살았다면 여야의 극한 대치도, 서울경제의 1980년 강제 폐간도 없었고 남북관계도 보다 잘 풀렸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갈수록 짙어졌다. 백상이 운명했을 때 시인 미당 서정주는 ‘백상을 처음 만났을 때 소사(말단 직원)인 줄 알았는데 사장이라고 해서 놀랐다’며 ‘그의 혼이 살아서 우리의 앞을 밝혀달라’고 소망했다. 백상 장기영 탄신 100주년, 불꽃같이 치열한 삶을 살았던 백상의 뜻은 오늘날 하늘 아래에서도 영원히 살아 있다./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백상 장기영…그 치열한 생애]"피란 온 학자·시인 굶어가고 있다" 戰時 신용대출 밀어붙인 장기영
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2016.05.01 16:15:47<대한민국을 살린 중앙은행의 전시 신용대출> 금융인으로서 백상 장기영의 보이지 않는 공로가 있다. 백상은 전회(前回)에서 봤듯이 한국은행의 탄생은 물론 1970년대 초반까지 국내 최고 엘리트 집단으로 손꼽히던 ‘한은 조사부’의 기틀을 닦는 등 굵직굵직한 업적을 남겼으나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전시 신용대출’이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의 발전이 보다 더뎠을지도 모른다. 백상과 함께 조선은행·한국은행에서 일했던 원로 몇 분은 당시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6·25전쟁으로 부산까지 밀렸을 때 장기영 조사부장이 느닷없이 ‘개인에 대한 신용대출이 절실하다’는 건의안을 올렸다. 조사부의 업무영역도 아니거니와 적법성 논란도 일었다. 일제강점기인 조선은행 시절에는 개인 및 기업 대출을 했지만 전쟁 직전 한국은행법이 통과된 후 중앙은행으로 자리 잡은 마당에 개인대출이 가능하지 않다는 반대가 일었다. 결국 백상은 개인 신용대출안을 통과시키고 집행했다. 백상은 ‘피란 온 학자와 문인·예술가 저명인사들이 전쟁 통에 굶어가고 있다. 이들이 굶어 죽거나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빠질 경우 이 전쟁에서 적을 물리쳐도 나라를 재건하는 비용과 시간이 몇 배나 들 것’이라는 논리를 펼쳤다고 한다. 당시 한은이 급히 추린 지원 대상은 300여명. 한 사람당 5만원씩 개인대출을 해줬다. 백상의 선린상업학교 2년 후배로 당시 한국은행 서무과장을 지내고 훗날 은행감독원장과 국민·조흥은행장을 역임한 문상철(101세)옹은 몇 년 전 기자와 만나 “당시 돈 5만원은 요즘 기준으로 한은 중견 행원의 두 달치 봉급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며 “이런 대출로 핵심 인재들이 기아를 면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대출금을 받아갔던 사회 저명인사, 지도층인사들 가운데 대출금을 갚은 인사는 불과 몇 명 안 됐다고 한다. 청렴하기로 유명했던 가인 김병로 등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후일담이 씁쓸하지만 인적 자산, 특히 뜻은 있는데 어려운 여건의 인재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백상 장기영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일화다. <금융제재 받으면서도 유신체제 저항하는 기자 보호> 백상 장기영은 기자들에게 곧잘 불호령을 내리면서도 속으로는 누구보다 아꼈다. 경제부총리 재임시에도 기자들과 일문일답을 즐겼다. 상대적으로 개성과 자존심이 강한 기자들이 백상을 스스럼없이 ‘왕초’라고 불렀다는 점은 존경 받는 리더십으로서 백상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대목이다. 백상은 어떤 위기가 와도 사람을 내치지 않았다. 유신 초기 정부의 언론 통제가 강해지면서 기자들이 권력의 종용으로 직업을 잃는 사태에서도 서울경제신문과 한국일보에서는 해직 기자가 없었던 이유도 백상이 기자들을 보호했던 덕분이다. 실은 가장 먼저 정부의 통제에 반발한 곳이 서울경제와 한국일보의 기자들이었다. 1973년 11월7일 편집국 기자들은 언론자유를 요구하는 철야 농성을 벌인 데 이어 보름 후에는 150여명이 모여 ‘언론자유 확립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다른 언론사에도 이 같은 움직임이 확산되자 정부는 언론사 사주들을 윽박질러 기자들을 내쫓았다. 가장 먼저 기자들이 움직였던 서울경제신문과 한국일보에도 정권 차원의 압력이 가해졌다. 광고가 쉽지 않았고 금융권 대출도 막혔다. 백상은 정계의 실력자 두 사람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사람들을 큰 가슴으로 포용하는 게 더 낫다. 자르면 다 길거리로 나서 더 시끄러워질 수 있다. 정부에 저항하려고 기자들을 붙잡고 있는 게 아니니 금융제재를 풀어달라’라는 요지였다. 간곡한 부탁과 설득에도 정권은 듣지 않았다. 은행은 물론 보험과 단자까지 막혀버린 금융제재는 1년 반 동안 이어졌다. 백상은 물론 간부급 기자들까지 이리저리 뛰며 어음을 구해 자금을 융통, 회사를 꾸려나가면서도 기자들을 지켰다. 당시 금융제재가 없었다면 1977년 급서한 백상의 수명이 좀 더 길어졌을지도 모른다. 지근거리에서 백상을 지켜봤던 권혁승 전 서울경제신문 사장(백교문학회 회장)은 “백상은 편집국이라는 곳을 각양각색의 가치관과 역사관을 지닌 사람들이 자유롭게 일하는 곳으로 여겼다”며 “사주라고 기자를 마음대로 내쫒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요컨대 유신 정권은 기자 해고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 백상이 미웠으나 국제무대에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기에 직접 해치지는 못하고 금융제재라는 수단을 동원했는데 여기에서도 ‘왕초’답게 끝까지 버텼다는 것이다. 60세 짧은 생을 살다 간 백상의 50대 중후반 최대 관심사는 정권의 압력에서 기자를 보호하는 데 있었다는 얘기다.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백상 장기영…그 치열한 생애]새벽 4시 시장점검서 불호령…경직된 관료사회 흔든 백상
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2016.05.01 16:15:28“장관 비서실에는 5개의 초인종, 13대의 전화, 남자 비서 3명, 여자 비서 4명이 있었습니다. 집무실과 제1·2응접실은 언제나 만원이었어요.”(손명현·당시 부총리비서실 근무)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은 도통 성과가 나타나지 않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본궤도에 올릴 2대 부총리로 백상 장기영 선생을 발탁했다. 그러나 40대 신문사 사주를 경제수장으로 맞는 관료사회의 반감은 엄청났다. ‘육성으로 듣는 경제 기적 편찬위원회(위원장 진념)’가 지난 2013년 출판한 ‘코리안 미러클’에는 백상이 관료사회를 어떻게 장악해나갔는지 실감 나게 묘사돼 있다. 백상은 공무원 조직의 질서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거침없이 지시했고 회의에도 격식이 없었다. 회의는 한꺼번에 2~3개가 열렸고 백상은 회의실을 오가며 의사결정을 내렸다. 물가 등 핵심 현안이 국장·차관보·차관을 건너뛰어 과장과 부총리의 결재만으로 통과될 때도 허다했다. 장관실을 활짝 개방하다 보니 장관실은 늘 공무원들과 민원인들로 북적거렸고 백상이 속사포처럼 지시하고 호통치는 소리가 복도까지 울려 퍼졌다. 백상 하면 당시 공무원들이 떠올리는 것은 악명 높은 심야 ‘녹실회의’다. 공식 경제장관회의에 앞서 정책을 사전조율 하는 회의인데 서울 세종로 기획원 3층 부총리실 옆 소회의실(녹실)에서 열렸다. 회의는 예고 없이 오후7시에야 소집됐고 장 부총리는 뜻이 관철될 때까지 경제장관들을 물고 늘어지며 밤이 깊도록 회의를 끝내지 않았다. 그의 집무실에는 ‘회이불의(會而不議), 의이불결(議而不決), 결이불행(決而不行)’이라는 경구가 붙어 있었다. 만나서 회의하지 않는 것, 회의하고 결정 내리지 않는 것, 결정하고 행하지 않는 것 등 세 가지를 경계하라는 의미다. 실천하지 않으면 못 견디던 그의 성격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말이다. 당시 물가는 서민층의 먹고사는 문제가 걸린 가장 민감한 이슈였다. 백상이 부총리로 취임한 해인 1964년 도매물가 상승률은 35.4%까지 치솟았다. 백상은 서민층의 생필품인 ‘쌀과 구공탄’의 가격 상승을 막겠다며 여기에 ‘흑백전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물가는 신앙이다”라고 외치며 현장점검도 강화했다. ‘신앙’이라는 말 때문에 출입기자들은 오전4시에 나서는 시장점검을 ‘물가안정 새벽기도회’라 부르기도 했다. 그 결과 1965년 도매물가 상승률은 10%까지 잡힌다. 백상은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도 주저하지 않았다. 1960년대 우리나라 금융 시장은 고리 사채 시장만 비정상적으로 컸다. 금리 현실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금융권과 정치권의 거센 반발로 감히 누구도 앞서지 못하고 있었다. 백상은 밀어붙였다. 당시 실무작업을 맡은 김용환 전 재무부 장관은 훗날 “금리 현실화의 감독과 주연은 모두 백상이었다”고 회고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필요한 ‘실탄’을 마련하기 위해 외자 도입의 길을 뚫었던 것도 백상이다. 상업차관을 끌어들여 화학·시멘트 등 대규모 공장들을 짓기 시작했다. 훗날 과도한 외자 의존과 비리 사건 등이 문제가 되기는 했지만 이 재원을 바탕으로 1965년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이연선기자 bluedash@@sedaily.com 자료=코리안 미러클 -
[사설] 百想 장기영이 한국경제에 던지는 혁신의 메시지
오피니언 사설 2016.04.28 19:05:24서울경제신문과 한국일보의 창업자인 백상(百想) 장기영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재조명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28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시대의 거인, 백상이 남긴 유산’ 세미나에서도 참석자들은 백상이야말로 시대를 앞서 간 선각자이자 혁신가였다며 난마처럼 뒤엉킨 오늘의 한국 사회가 그의 정신을 본받아 새로운 미래로 도약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백상은 1960년대 경제개발기에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맡아 한국 경제 대도약의 중요한 발판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경세가였다. 그의 부총리 재임 초기는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지리멸렬한데다 통화개혁 실패로 경제침체가 가속화하면서 민심까지 흉흉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백상은 혁신적 경제개혁과 시장자유화를 통해 5개년계획을 정상궤도에 올리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가 단행했던 금리현실화와 개방화 정책이 시장 참여자 간의 자유로운 경쟁을 촉진하고 외자 도입까지 이끌어내 오늘날 한국 경제의 초석을 다진 것은 물론이다. 김준경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이 “백상이 시장친화 정책을 강력하게 실천함으로써 수출주도 공업화를 성공으로 이끄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평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백상은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는 벤처기업가이자 진정한 의미의 멀티플레이어였다. 그는 ‘국민경제의 옹호자’로 자처하며 국내 최초의 경제지와 스포츠신문 등을 잇따라 창간한 데 이어 정치·스포츠 등 사회 여러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심상민 성신여대 교수는 백상을 “창조경영인이자 미디어 벤처기업가”라고 정의했다. “가장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좋은 창조를 낳는다”며 혁신적 사고와 변화를 주창했던 백상의 우렁찬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그리운 이유다. 작금의 한국 경제는 방향을 잃은 채 창조적 돌파력과 추진력을 갖춘 새로운 리더십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 백상은 혁신과 도전정신이야말로 위기에 몰린 한국 경제의 유일한 탈출구라는 메시지를 우리 모두에게 던지고 있다. -
[백상 장기영…그 치열한 생애]사람·신뢰 중시...한밤 폭풍우로 배 잃은 선주에 신용대출
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2016.04.28 18:58:02한국 현대사에 그보다 굵고 다양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은 결코 흔치 않다. 은행원에서 시작해 언론인을 거쳐 경제부총리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국회의원으로 60 평생을 살았다. 시와 문학을 사랑해 예술인을 후원하는 데도 아낌이 없었다. 그는 누구인가. 바로 백상이다. 서울경제신문 창간 사주이기에 앞서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선구자 백상 장기영 선생이 오는 5월 2일 탄신 100주년을 맞는다. 서울경제신문은 이에 백상의 뜻을 오늘날에 되살리기 위한 특집을 2회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 주> 여기 두 개의 문장이 있다. ‘뛰면서 생각하라’와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물가의 동심원처럼 퍼진다.’ 전자는 불도저처럼 난관을 돌파했던 백상을 상징한다. 같은 제목의 책까지 나왔다. 후자는 백상의 미국 기행문 ‘태평양공로(太平洋空路·1955)’의 한 구절. 명문장의 예시로 교과서에도 올랐었다. 불도저와 명문장가. 백상의 면모를 이처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대비도 없다. 백상은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1916년 5월2일 경기도 고양군 한지동(현 서울시 한남동)에서 태어난 백상은 밖에서 뛰놀기를 즐기는 개구쟁이였으나 한남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고는 1등을 도맡았다. 백상은 ‘성적이 나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1등을 했다’고 회고했지만 ‘뜻밖의 1등’은 평생 이어졌다. 수재들만 입학할 수 있다는 선린상업에서도 최상위권에 들었다. 선린상업 우수졸업생에게는 경성고등상업(서울대 상대 전신) 무시험 입학 특전이 부여됐으나 백상은 1934년 진학 대신 취업을 택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진 탓이다. 진학을 단념한 그가 택한 직장은 당시에는 거대한 다국적기업이던 조선은행. 견습을 마치고 스무 살에 발령 받은 조선은행 청진지점에서 백상은 마음껏 재능을 발휘했다. 1943년에는 행내 현상논문 모집에서 ‘뜻밖의 1등’으로 만주 여행이라는 부상까지 누렸다. 백상의 당시 논문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저축과 물가, 그리고 인플레’라는 논문은 당대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다카다 야스마 박사의 이론과 케인스 이론을 접목했는데 ‘한국경제의 도약을 이끈 최고의 금융정책’으로 평가 받는 1965년 9월 금리현실화의 이론적 배경으로 작용했다. 조선과 일본을 통틀어 일류대 출신이 즐비한 조선은행에서 1등을 차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엄청난 독서에서 나왔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까지 청진지점에서 백상이 독파한 4,000여권의 경제와 문학 서적은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내내 자양분으로 작용했다. 청년 백상이 책보다 사랑했던 대상도 있다. 사람. 사람과 신뢰를 중시한 백상의 면모를 말해주는 일화가 있다. 태풍으로 배를 날린 선주가 이리 뛰고 저리 뛰었으나 배를 잃고 한탄하고 있을 때 슬그머니 다가온 백상이 대출을 권했단다. ‘담보가 없는데 어떻게 돈을 빌리냐’는 선주의 반문에 백상은 ‘폭풍우를 뚫고 배를 구하려 한밤중에 뛰어다니는 당신의 정신이 바로 담보’라며 지점장에게 대출안을 올렸다. 조선은행 초유의 신용대출은 기적적으로 이뤄져 선주는 재기하고 소련군 진주 후에는 남하해 국내에서 손꼽히는 재벌 그룹을 이뤄냈다. 일개 주임이 어떻게 신용대출을 할 수 있었을까. 인정받았던 덕분이다. ‘군사정권에 저항했던 한은총재’로도 유명한 민병도 전 한은총재(퇴임 후에는 경춘관광 회장)가 남긴 말이 있다. 일본 게이오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입행한 신입행원 민병도는 일본인 상사들로부터 ‘조선은행에 장기영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민족적 자부심을 느끼고 감동한 나머지 백상을 찾아 평생 우정을 나눴다. 일본인들에게 높게 평가 받으면서도 백상은 민족적 자부심을 잃지 않았다. 백상은 행세한다는 사람치고 드물게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례로 손꼽힌다. 그러나 ‘장기영’ 이름 석자를 지켜내며 해방을 맞이한 백상은 위기를 맞았다. 시장경제를 부인하는 소련군이 진주하자 애지중지하던 장서를 놔두고 청진을 떠났다. 대부계 장부 일체를 들고 남하한 백상은 본점에 찾아가 ‘조선은행 청진지점 서울출장소’라는 간판을 걸고 대출 영업을 계속했다. 하지만 경제상황은 극도로 나빴다. 패배를 확인한 조선총독부가 미군이 진주하기까지 고의적으로 화폐를 남발한 탓이 컸다. 백상은 이에 서울신문 1946년 2월8일과 9일 연이틀 실린 ‘화폐가치 안정대책의 원칙’이라는 기고문을 통해 ‘일본이 통화를 남발한 부분을 대일 청구권에 포함시키되 일단 미국에 대신 받아 새로운 조선은행권 발행과 경제건설에 활용하면 초물가고를 잡고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다’는 논리를 펼쳤다. 백상의 이 같은 아이디어는 경제부총리 재임 시 외자도입 활성화정책으로 빛을 발했다. 한국은행 조사부를 키워내며 승승장구하던 백상은 한국은행에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대신해 물러나며 은행원의 뜻을 꺾었지만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언론계의 첫 출발인 조선일보에서도 백상은 기적을 일궈냈다. 사장으로 재임하던 2년 동안 백상은 부수 13배 신장이라는 기록을 세우고 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젊은 조국에 맞는 새로운 언론 창달에 나선 것이다.(계속)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백상과 오랜 개인인연"... 김무성 전 대표 본지 주최 행사 '깜짝' 참석
정치 정치일반 2016.04.28 18:57:114·13총선 결과에 책임을 지고 사의를 밝힌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보름 만인 28일 공식석상에 모습을 보였다. 서울 중구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열린 서울경제신문 주최 ‘백상(百想) 장기영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다. 김 전 대표는 최근까지 지인들과 만나 당선사례를 하고 총선 기간에 고생한 당직자들과 식사하며 격려하는 등 개인 일정 정도만 소화해 왔지만, 이번처럼 외부 행사에 모습을 보인 것은 처음이다. 김 전 대표 측 관계자는 “서울경제를 창간한 백상 장기영 선생과 김 대표의 부친께서 개인적인 인연이 있는 것으로 안다”며 “이 때문에 외부 행사임에도 어렵게 참석을 결정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김 전 대표는 이날 사실상의 여당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음에도 공개발언을 극구 사양했다. 김 전 대표는 행사 시작전 영빈관 정원에서 참석자들간 담소자리에서 참석자들이 “수고하셨다”고 인사를 건네자, 연한 웃음을 지은 채 조용히 악수만 했다. 취재진이 다가가자 김 전 대표는 한 두발 뒤로 물러나며 “난 지금 카메라를 피하고 싶은 심정”이라며 연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행사가 시작되자 김 전 대표는 안경을 꺼내 쓰고 ‘백상이 남긴 유산’을 주제로 한 세미나 발표집을 한장 한장 넘기며 열독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 전 대표는 행사장에서 18대 국회 당시 ‘원내사령탑 동기’인 박지원 신임 국민의당 원내대표와 단둘이 따로 떨어진 곳에서 5~6분간 대화를 나눠 이목을 끌었다. 김 전 대표 선대와 백상 장기영 선생간 인연으로 행사에 참석했지만 침묵 행보는 이어가면서 당분간 정치적 행보도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따라 내달 3일로 예정된 원내대표 경선이나 이후의 비상대책위원회 구성 등에도 불개입 원칙을 고수할 것으로 관측된다. /김홍길기자 what@@sedaily.com -
<백상 탄생 100주년 세미나> "백상의 명성·기상 걸맞게 서울경제 위상 되찾을 것"
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2016.04.28 18:47:02이종환 서울경제신문 부회장은 “창간 사주 백상의 명성에 걸맞은 서울경제신문의 위상을 되찾겠다”고 강조했다. 이종환 부회장은 기념사에서 “오늘 모인 모든 분들은 백상 장기영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며 “저도 백상의 호흡을 느끼며 기자생활을 시작했던 기억이 아직도 뚜렷하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은 “다방면에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업적을 남긴 백상이지만 경제학도로서의 백상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다”면서 “백상이 조선은행 재직 시절 발간한 한국 최초의 경제동인지 ‘경제평론’을 보면 그 학문적 깊이와 성찰이 요즘의 시각으로도 놀라울 정도”라고 말했다. 이어 “서울경제는 백상의 이 같은 면모를 그대로 담고 있는 신문”이라고 강조하면서 “조선은행을 시작으로 언론과 문화·외교·정치·체육계로 지평을 넓힌 백상처럼 서울경제도 경제종합지라는 위상을 바탕으로 정치와 사회·문화·스포츠 등으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 부회장은 “백상이 살아계실 때 서울경제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위를 인정받고 부동의 1위 자리를 지켰다”며 “서울경제 임직원들은 혼신의 힘을 모아 백상의 명성에 걸맞은 위상을 되찾아오겠다”고 힘줘 말했다. 이어 서울경제가 백상의 기운을 받을 수 있도록 원로·선배들이 각별한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했다. 이 부회장은 “백상의 고귀한 뜻과 기상이 서울경제를 넘어 세상에 널리 퍼지기를 바란다”는 말로 기념사를 끝맺었다./조민규기자 cmk25@@sedaily.com -
<백상 탄생 100주년 세미나> 심상민 "백상은 언론벤처 창업자, 미래 콘텐츠 크리에이터"
경제·금융 경제동향 2016.04.28 18:41:57백상 장기영 선생은 언론사(史)에서도 거목이었다. 부총재를 끝으로 한국은행에서 나온 후 그는 지난 1952년 제10대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한다. 이후 태양신문을 인수해 1954년 한국일보, 1960년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지인 서울경제신문을 창간한다. 백상은 한국일보와 서울경제신문을 통해 생전 내내 ‘언로(言路)’의 선두에 서 있었다. 나아가 자매지 코리아타임스·소년한국일보·일간스포츠 등을 거느리며 대중문화 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다. 이날 백상의 언론 부문 업적을 소개한 심상민 성신여대 교수는 “백상은 언론 부문을 초월한 미디어 기업가였고, 또 저널리즘이라는 국한된 영역을 벗어나 미래 지향적인 콘텐츠 크리에이터였다”라고 평가했다. 특히 백상의 언론관에 대한 일화들은 우리나라의 ‘기자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기사는 발로 써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지금까지도 언론인들이 귀감으로 삼는 말이다. 심 교수도 이날 “납이 녹아서 활자가 되려면 600도의 열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활자화되는 기사는 600도의 냉정을 가지고 써야 한다. 이 양극을 쥐고 나가는 게 신문”이라는 백상의 평소 신념을 청중에게 소개했다. 언론의 독립성도 그가 강조했던 항목이다. 그는 사주였지만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당시 같이 일했던 언론계의 원로들은 백상을 “다혈질이고 매사 직접 챙기고 사실상 자신이 편집국장이기도, 심지어 기자 역할까지도 서슴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심 교수는 이 같은 그의 개인적 성향뿐만 아니라 언론사의 사주로서의 역량도 높이 평가했다. 그는 백상을 ‘미디어 기업가’ ‘언론벤처 창업자’ ‘콘텐츠 크리에이터’ ‘한류, 창조경제 선구자’ 등으로 표현했다. 특히 그가 사주 시절 기자들과 얽혀가며 했던 집단적 의사결정은 시대를 앞선 경영 방식이라고 소개했다. 백상은 대중문화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심 교수도 “신문기자는 시인이 돼야 한다. 시와 그림이 가득 찬 신문 이것이 장래의 신문이다. 신문 제목 하나하나가 시”라는 백상의 소신을 강조했다. 1960년대 당시 서울경제신문 1면에 매주 시가 올라왔던 것도 백상의 이 같은 소신 때문이었다. 백상은 대중문화 발전과 관련된 취재에도 전폭적인 지지를 했다. 심 교수는 “인간문화재 취재를 많이 했던 예용해 기자를 백상이 전폭적으로 지지해줬는데 이는 우리 차 문화를 널리 알린 ‘뿌리 깊은 나무’라는 결과를 낳았다. 이를 통해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창업주가 녹차 산업을 일으켰고 이게 현재 서경배 회장의 녹차 화장품으로 대표되는 ‘K뷰티’로까지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심 교수는 황석영 작가의 ‘장길산’의 탄생 비화도 밝혔다. 그는 “백상이 당시 집 한 채 값을 주면서 장길산이라는 소설의 조사를 위해 쓰라고 줬는데 보름 만에 술을 마시는 데 돈을 다 써버렸다. 돈을 다 쓰고 찾아온 그에게 다시 그에 버금가는 돈을 주며 돌려보냈던 게 백상”이라고 말했다. 심 교수는 마지막으로 “사양산업에 접어들고 있다는 신문도 새로운 콘텐츠 포맷을 만들어야 독자의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며 “백상에게서 이 같은 우리가 가야 할 미래 지향점을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김상훈기자 ksh25th@@sedaily.com -
<백상 탄생 100주년 세미나> 정동구 "전쟁상흔 국민에 스포츠 통해 희망심어"
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2016.04.28 18:40:43“오승환 선수가 몸담고 있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지난 1958년 한국에 왔었다는 것을 알고 계신가요?” 정동구 태평양아시아협회 회장(전 한체대 총장)은 백상 장기영 선생을 ‘스포츠로 국민에게 희망을 준’ 인물로 기억했다. 다방면에서 수많은 업적이 있지만 국민 개개인의 마음 구석구석까지 챙기는 백상의 큰 뜻은 체육 부문의 업적을 보면 그대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정 협회장은 먼저 1955년 11월14일 백상이 사장으로 있던 한국일보가 주최한 ‘9·28 서울수복기념 부산-서울간 역전 마라톤 대회’를 꼽았다. 그는 “당시에만 해도 아스팔트 도로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면서 “전쟁의 상처에 힘들어하던 전국 각지의 국민들이 장장 520㎞에 달하는 흙길을 에워싸고 마라톤 선수들을 응원하는 모습은 우리 스포츠 사에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장면”이라고 강조했다. 4년 후 인천·서울 간 국제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등 역전 마라톤 대회는 이후 한국 마라톤 중흥의 초석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의에 빠진 국민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백상의 노력은 해외 스포츠팀의 초빙으로도 이어졌다. 정 협회장은 “지금은 자취를 감췄지만 한때 고교야구의 장이었던 동대문 야구장에서는 1958년 미국 메이저리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한국 대표팀 간 친선 경기가 열렸다”며 “백상의 초대로 방한한 파란 눈의 야구선수들이 카퍼레이드를 펼치는 모습에 국민들은 한때나마 마음의 상처를 씻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듬해인 1959년 9월에는 세계적인 아이스쇼 팀 ‘홀리데이 온 아이스 쇼’가 백상의 초청으로 방한, 현재 광화문 문화체육관광부 자리에 만든 특설링크에서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선린상업학교 시절 농구 선수로 활동했던 그에게 스포츠는 단순한 게임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백상은 항상 “스포츠를 모르면 촌놈”이라고 강조했다. 정 협회장은 이를 두고 “스포츠의 페어플레이 정신과 끝까지 정정당당하게 임하는 스포츠맨십이 백상의 일상에 배어 있다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체육 부문에서 백상이 남긴 업적은 스포츠맨십 확산을 넘어 스포츠 외교로 이어졌다. 1966년 아시아경기연맹은 백상을 종신회장으로 추대했다. 백상은 또 1967년부터 10년에 걸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의 배경에도 백상이 세계 스포츠계에 마련해놓은 인맥이 크게 작용했다는 평가다. 정 협회장은 “백상은 국제 스포츠계에서 한국의 위상을 한 단계 높였던 인물”이라며 “오늘날 올림픽에서 10위권에 이름을 올리는 스포츠 강국 대한민국은 백상이 초석을 다진 덕분에 가능했다”고 말했다./조민규기자 cmk25@@sedaily.com -
[백상 탄생 100주년 세미나] 장재민 "불도저 이미지 강했지만 누구보다 자상했던 분"
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2016.04.28 18:28:02장재민 서울경제신문 이사회 의장의 가슴에는 아버지 백상 장기영 선생의 ‘자상함’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다. 강력한 추진력 때문에 세상은 백상을 ‘불도저’라 기억하지만 속마음은 그 누구보다 따뜻했다는 것이다. 장 의장은 이날 환영사에서 “선친의 유업인 서울경제신문 이사회 의장, 그리고 가족 대표로서 이 자리에 서니 감회가 남다르다”며 참석자들을 맞았다. 그는 이어 “많은 분들이 백상을 일컬어 불도저라고 하지만 그분은 강한 이미지와 달리 다정다감하고 자상한 배려로 가족은 물론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격려와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말했다. 장 의장은 시계를 10대 시절로 돌렸다. 그는 “1961년 10월로 기억한다. 당시 11세였던 저는 심한 천식으로 굉장히 아파 겨울에는 학교도 못 다녔었다”고 회고했다. 장 의장은 “한국 축구단을 이끌고 이스라엘 원정을 가셨던 아버지께서 갑자기 저와 어머니에게 홍콩으로 빨리 오라고 하셨다”며 “홍콩 공항에 내리니 거짓말처럼 천식이 싹 없어졌다. 이를 계기로 홍콩에서 3년 반, 이후 미국 LA에서 지금까지 50년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장 의장에게 백상은 아버지이자, 어린 시절 지독한 천식을 고쳐준 의사였다. 항상 앞서 가는 아이디어와 비전으로 불황이나 위기마저 기회로 바꿨던 백상의 능력은 방대한 양의 독서에서 비롯됐다고 장 의장은 설명했다. 그는 “제 기억 속의 아버지는 항상 손에 책을 쥐고 계셨다”며 “특히 인문학에 대한 무한한 관심이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남다른 비전을 제시하곤 했다”고 말했다. 문화와 예술, 체육 분야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장 의장은 덧붙였다. 장 의장은 “아버님이 남기신 훌륭한 업적과 정신이 항상 모든 사람에게 좋은 영감과 발전을 가져왔으면 한다”고 말했다. 언론인 ‘백상’이 가장 그리웠을까. 그는 수많은 백상의 어록 가운데 “신문은 아무도 이용할 수 없다. 신문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는 구절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전했다. /조민규기자 cmk25@@sedaily.com -
<백상 탄생 100주년 세미나>"언론 민주화 투쟁하던 기자들 보호...백상은 따뜻했다"
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2016.04.28 18:27:40‘컴퓨터 달린 불도저’로 불린 백상 장기영 선생이지만 정작 그의 곁에서 젊은 날을 보낸 전직 언론인과 관료들은 한결같이 그의 인간미를 떠올렸다. 백상과 일하다 다른 언론사로 떠난 기자가 그 회사를 그만두자 백상이 먼저 연락해 돌아오라고 했던 일화는 28일 백상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다시 회자됐다. 서울경제신문 사장을 지낸 권혁승 백교문학회장은 “1975년 언론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다른 신문사 기자들이 정부에 의해 강제 해고될 때 한국일보와 서울경제신문 기자들은 백상이 ‘반정부 성향의 기자를 껴안아야 한다’는 편지를 권력 실세에게 보낸 덕에 해고되지 않았다”면서 “대신 신문사는 금융권에 대출이 막히는 어려움을 겪었다”고 전했다. 봉두완 북한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는 “왕초(백상의 또 다른 별명)한테 기합 받던 이야기 좀 해보자”며 사람들 사이를 오갔다. 이날 봉 교수가 펼쳐놓은 백상의 일화. “1965년 박정희 대통령과 린든 존슨 대통령이 미국 워싱턴에서 한국의 월남 파병과 관련해 정상회담을 했다. 당시 내가 워싱턴 특파원이었는데 정상회담이 끝나고 존슨 대통령이 30분 늦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에 14개 조항에 합의하면서 미스터 장이 박 대통령을 대신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느라 늦었다는 것이다. 존슨 대통령이 그렇게 얘기하자마자 백상은 그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내 이름을 크게 불러 이렇게 말하더라. ‘봉두완, 린든 존슨이 말하는 거 들었지. 신문에 꼭 실어’ 경제부총리를 하는 와중에도 본인이 편집국장인 걸로 알고 있던 것”. 이 자리에는 원로 언론인뿐 아니라 백상을 기억하는 정치·경제·문화·체육계 인사들이 모였다. 특히 김무성 새누리당 전 대표와 정세균 더 민주당 의원, 박지원 국민의 당 원내대표가 한자리에 모이자 카메라 플래시가 쉴새 없이 터졌다. 김 전 대표는 축사도 마다하고 침묵을 지켰지만 한때 여야 원내대표를 함께 지낸 박 원내대표와 환담을 주고받았다. 김인호 한국무역협회장은 “1967년 1월1일로 경제기획원 신임 사무관으로 발령 받을 때 장기영 경제부총리가 임명장을 줬다”면서 “나는 까마득한 수습사무관이었으니 같이 일할 기회는 없었지만 그래도 최고의 경제부총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박병원 한국경영자총연합회장도 “경제기획원에 있을 때 직접 모신 적은 없지만 한국 경제가 근대화하는 데 신화적인 업적을 남긴 선배라는 점은 잘 안다”고 했다. /임세원·구경우·김상훈기자 why@@sedaily.com -
<백상 탄생 100주년 세미나> 百想 장기영, 巨人의 숨결을 다시 느끼다
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2016.04.28 18:26:46“과거 1960년대에 많은 국가들이 시장친화적인 경제정책을 마련했지만 이를 실행에 옮긴 국가는 대한민국이 유일합니다. 바로 백상 장기영이라는 행동파 경제부총리가 있었기에 국가경제의 구조를 개혁하고 도약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김준경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은 28일 서울 중구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열린 ‘백상(百想) 장기영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세미나’에 참석해 구조조정이 화두로 떠오른 우리 경제 현실에서 1960년대 환율개혁·금리현실화·수입자유화 등 잇따른 개혁조치를 단행했던 백상 장기영 선생의 리더십이 재조명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원장은 “종속이론이 판을 치던 상황에서 가난한 한국이 시장친화적 정책을 채택해 실천한 것은 경이롭게 느껴질 정도”라고 말했다. 1916년생인 백상 장기영 선생은 한국은행 부총재, 서울경제신문과 한국일보를 창업한 언론인, 경제부총리(1964~1967년), 9대 국회의원,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며 다방면에 걸쳐 큰 족적을 남겼다. 정대철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는 “대한민국 시장경제의 기틀을 마련했고 정치·문화·체육·언론 등 어느 분야에서나 실천가이자 개척가로서 중심에 섰던 거인”이라며 “5개 분야에서 다섯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혼자서 해냈다”고 평가했다. 이어 “백상의 가장 큰 특징은 강한 추진력”이라며 “영국 사람이 걸으면서 생각하고 프랑스 사람이 생각한 다음에 뛴다면 우리는 뛰면서 생각해야 된다고 했던 게 백상”이라고 말했다. 정동구 태평양아시아협회장(전 한국체육대학교 총장)은 “우리를 코리아(Korea)로, 북한을 노스코리아(North Korea)로 정한 게 바로 백상”이라며 “국제 스포츠계에서 한국의 위상을 확립했다”고 평가했다. 심상민 성신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미디어 경영과 문화 관련 모델로 삼기 위해 ‘장기영학’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행사에는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 정세균 더불어민주당 의원,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 손병두 호암재단 이사장, 김인호 한국무역협회장 등 정치·경제·문화·체육계 원로와 전현직 사우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이연선기자 bluedash@@sedaily.com -
<백상 탄생 100주년 세미나> 정대철 "백상 화법엔 항상 진실성 묻어나…추진력·인간미 겸비한 정치인"
경제·금융 경제동향 2016.04.28 18:26:28“‘정치인은 내 얼굴’이라는 백상 장기영 선생의 어록은 그가 얼마나 솔직한 사람인지를 보여줍니다. 얼굴 표정을 숨길 수 없듯이 백상의 화법에는 항상 진실성이 묻어났습니다.” 정대철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국민의당 고문)는 백상을 추진력 강한 정치인인 동시에 인간미를 갖춘 정치인으로 기억했다. 경제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시절 불도저의 면목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면 국회의원·외교 부문에서는 인간미를 앞세워 상대방을 들었다 놨다 했다는 것이다. 정 전 대표는 “백상은 늘 뛰면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면서 “그런 신념 때문에 무슨 일이건 불도저처럼 밀어내는 기질과 정열이 항상 땀 흘리는 백상에게서 묻어났다”고 말했다. 경제부총리 시절, 백상의 비서실에는 5개의 초인종과 13대의 전화가 있었다.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기와 찾아오는 손님에 3명의 남자 비서와 4명의 여자 비서는 앉을 틈이 없었다. 경제부총리 백상은 비서들에게 이렇게 강조했다고 한다. “나를 찾아오는 사람은 누구든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만나게 해주세요. 우리 방 문턱은 높으면 안 됩니다. 나한테 오는 전화도 모두 다 대주세요. 내가 차를 타고 어딜 가더라도 통화하게 해주세요.” 부하 직원들에 대한 백상의 지시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동시에 이뤄졌다. 뛰면서 생각해야 한다는 백상의 지론이 행동으로 이어졌고 이는 불도저를 연상하게 했다. 정 전 대표는 “사실 대화 중에 상대방의 존재를 무시하고 자기 일을 본다는 것은 결례임에 틀림없다”면서 “다만 구습이나 형식보다는 실질을 존중하고 서로 간의 마음이 통하면 된다는 백상의 신념을 대부분이 알았기 때문에 기분 나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전했다. 정 전 대표는 “업무에서는 완벽을 추구했던 백상이지만 정치인으로서의 백상은 인간적인 면이 더 많았다”고 말했다. 솔직함과 위트, 유머를 바탕으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데 능했다는 것이다. 1973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회담. 유신체제로 탈바꿈한 한국이나 독재체제를 강화한 북한 모두 회담에 열의가 없었다. 백상은 준비했던 기조발언문을 한참 동안 읽은 후 “이것은 가서 읽으라고 시켜서 읽은 것이지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얘기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양쪽 대표 모두 실소를 금하지 못하면서도 딱딱했던 분위기는 부드러워졌다는 후문이다. 김일성 전 주석을 향한 발언도 거침이 없었다. 그는 “옛날에는 당신들이 우리보다 잘사는 것 같다는 시대가 있었지만 이제는 남쪽이 달라졌다. 북한은 이래 가지고는 안 된다”고 했고 김일성은 이 같은 백상의 솔직함에 ‘장선생, 장선생’ 하면서 대화를 이어갔다고 한다. 대일 김 수출 문제를 풀어낸 것도 유명한 일화다. 한일 경제각료회담에서 일본 대장성관리들이 법규해석론을 주장한 탓에 김 수출 문제가 난항을 거듭하자 백상은 즉석에서 언어유희로 기지를 발휘했다. 그는 “노리(김)를 노리(규칙)만 가지고 따지면 어찌 노리에루(관벽을 타고 넘어가다)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고 한참을 웃은 일본 관료들은 전향적으로 돌아섰다. 정 전 대표는 “한일 경제각료회담에서 보인 백상의 재치를 보면 그가 얼마나 매력적인 인간인지를 알 수 있다”며 “이게 바로 정치인 백상의 진면모”라고 말했다. /조민규기자 cmk25@@sedaily.com -
<백상 탄생 100주년 세미나>정·재계 등 오피니언 리더들 대거 한자리에
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2016.04.28 18:25:3328일 ‘백상 장기영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세미나’에는 각계 원로와 서울경제신문·한국일보의 전·현직 사우 등 시대를 아우르는 오피니언 리더들이 대거 참석했다. 정치계에서는 김무성 새누리당 전 대표, 정세균 더불어민주당 의원, 박지원 국민의당 원대대표 등 3당이 모두 참가했다. 경제계에서는 김인호 한국무역협회장, 박병원 한국경영자총협회장, 하영구 전국은행연합회장, 이순우 저축은행중앙회장, 장남식 손해보험협회장 등 협회장과 황은연 포스코 사장 등이 함께했다. 문화·체육·언론계에서는 정동구 태평양아시아협회장(한국체육대 전 총장), 조정원 세계태권도연맹 총재, 박우홍 한국화랑협회장, 이병규 한국신문협회장, 손병두 호암재단 이사장 등이 백상을 회고했다. 정부와 공공기관에서는 송언석 기획재정부 2차관, 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장 등이, 전직 사우들로는 제재형 한우회장, 김충한 한국이앤엑스 회장, 안택수 전 의원, 권혁승 전 서울경제신문 대표, 김진동 전 서울경제신문 주필, 임종건 전 서울경제신문 부회장, 이세정 아시아경제 대표 등 40여명이 참석했다. 백상의 가족 가운데서는 3남 장재민 서울경제신문 이사회 의장을 비롯해 장녀 장일희씨, 이순임 백상재단 이사장 등이 함께 자리했다. /이연선기자 bluedash@@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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