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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나의 미술로 보는 시대] 정치적 오염 벗어나 순수미술 탐구...전후사회 중심이 되다

■냉전시대의 추상미술

20세기초 서구문명 물질주의에 환멸

점·선·면·색채만으로 생각·감정 표현

회화만의 독자성 강조한 추상주의 시작

1930년대에 獨·소련서 사실주의 재등장

파시즘·공산주의 정권 영웅화에 이용

평론가 그린버그, 이념적 혼란 시대서

외부 간섭에 동화되지 않는 고급문화로

'추상'을 가장 가치있는 미술로 평가

1950년대 중반 세계미술의 주류 돼

잭슨 폴락 ‘가을 리듬’ 1950년작.






추상미술은 간단히 말해 점, 선, 면, 색채 등 순수한 조형요소로 생각과 감정을 표현한 미술이다. 추상미술의 시작은 20세기 초였다. 유럽은 산업혁명과 기술발달로 생활은 편리해졌으나 물질주의의 만연과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이 팽배했고, 예술가들은 정신적·종교적 가치가 상실됐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들은 서양문명이 이제 생명력을 잃었다고 여기며 새로움을 갈구했다. 러시아 태생으로 주로 독일에서 활약하던 바실리 칸딘스키는 사실적인 미술은 오래된 서구문명의 부패와 물질주의를 반영한다고 하면서 이 세계와 절연된 순수한 조형요소만을 다룬 미술이야말로 미래의 유토피아적 정신이나 환경을 나타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서구문명은 새롭게 태어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르네상스 이후 사람의 모습, 인간의 활동을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의 전통은 깨지고 있었다.

미술작품에서 알아볼 수 있는 대상이나 이야기를 찾는 데 익숙했던 일반인들에게 추상미술은 과격한 변화였다. 칸딘스키, 피에트 몬드리안과 같은 화가들이 선도한 추상미술은 난해하고 어려웠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미술가의 역할은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사회, 새로운 세계로 사람들을 이끄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엘리트적 인식을 가진 미술가들은 개인의 독자적인 표현과 실험정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르주아 중산층의 관습적인 도덕관과 물질주의에 환멸을 느꼈으며, 미술은 점점 대중과 멀어지게 됐다. 이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에게는 과거와 같은 정부나 교회, 또는 귀족의 후원은 없었다. 대신 부유한 개인 소장가들이 많아지면서 후원해줬기에 크나큰 힘이 됐다. 추상미술은 20세기 미술의 대세가 됐고, 대부분의 나라에 전파됐으며, 한국에서도 1930년대 김환기·유영국과 같은 추상화가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모리스 루이스 ‘푸른 베일’ 1958~59년작.


추상미술이 발전해 갈 때 오히려 사실적인 이미지의 대중적 가능성을 간파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나치 독일과 소련 공산주의 정부였다. 1930년대 이들 국가는 사실주의를 재등장시켜 파시즘과 공산주의 정권을 영웅화시키는 목적으로 이용했다.

나치는 추상미술과 같은 모더니즘 미술을 퇴폐적인 미술로 비판하고 그 미술가들을 독일에서 추방했다. 히틀러는 인체를 영웅적으로 표현한 신고전주의적 미술을 진정한 독일 미술이라고 선언했고, 아리아 인종의 우수성을 보여주려 했다.

소련 역시 고전주의에 기초한 ‘사회주의 사실주의’ 미술을 국가의 공식 미술로 선언했다. 소련은 인민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추상미술은 서구의 자본주의 미술로 치부하였다. 인민을 선동하고 이념적으로 단합하기 위해 예술의 필요성을 높이 평가하면서 1934년 제1차 소비에트 작가회의에서는 ‘사회주의 사실주의’를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공식 미학으로 선언했다. 이후 소련의 미술작품에는 공장에서 일하는 건강한 노동자, 집단농장에서 이상적인 생활을 하는 농민들이 자주 등장했다. 또 많이 제작된 작품은 통치자를 묘사한 그림이나 조각이었다. 레닌 자신은 처음에는 개인숭배를 반대했다고 하지만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그의 초상화나 조각들이 제작됐고, 스탈린 이후에 통치자의 개인숭배는 더욱 강화됐다.

소련의 사회주의 사실주의 화가 알렉산드르 데네카 ‘새로운 공장건설’ 1926년작.


독일과 소련의 미술이 정치에 오염되면서 1930년대 미국에서는 사실적인, 또는 재현적인 미술과 추상미술에 대한 논쟁에 불이 붙었다. 뉴욕의 근대미술관(MoMA) 관장이었던 알프레드 바는 사실적인 미술은 사물을 수동적으로 재현해 ‘비(非)미술적’이며, 추상미술이야말로 미술 자체의 독자적인 법칙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하면서 추상미술을 옹호했다.

반면 1930년대에 경제공황의 수렁에 빠져있던 미국에서도 공산주의는 젊은이들에게 진보적 정치 성향으로 인기가 있었고 지식인들 사이에 상당히 퍼져있었다. 화가 스튜어트 데이비스는 마르크스주의적 평론을 쓰고 있었고 벤 샨은 미술이 사회를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추상미술을 적대시하고 이를 노동계급의 적이라고 공격했다. 그러나 1939년에 소련이 미국 지식인들이 혐오하던 나치 독일과 독소불가침 조약을 맺자 미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환멸에 빠지게 되었다.



이 무렵 등장한 인물이 바로 미술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였다. 그린버그는 원래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처음에는 좌파 잡지였던 ‘파티잔 리뷰’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소련에서 개인숭배가 팽배해지고 제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반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사람들이 알기 쉬운 사실주의 미술은 정치적으로 쉽게 오염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미술이 그 자체의 법칙 외에 어떤 외부의 간섭도 받지 않기 위해서 고도의 수준을 유지해야 하며, 이러한 순수미술은 쉽게 동화되지 않고 이념적 선전에 이용당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여기에 합당한 미술이 추상미술이었다.

나치 독일의 조각가 아르노 브레커 ‘준비 완료’ 1939년작.


1950년대에 그린버그는 미국 자유문화위원회의 위원이 되었고 ‘미국의 소리’의 라디오 강의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냉전 시기 미국의 대외 정책을 지지해 사회주의자로서의 이미지에서 벗어났다. 그린버그는 잭슨 폴록, 윌렘 드 쿠닝, 모리스 루이스와 같은 화가들을 지지하며 ‘추상표현주의’ 미술을 가장 가치 있고 지속적인 미국적 미술로 평가했다. 추상표현주의는 미국을 대표하는 미술로 각 나라에서 전시됐다. 커다란 캔버스에 물감을 뿌리고 흘리는 폴록의 작업 사진은 자유를 상징하는 의미로 인식됐다. 그린버그는 대중문화는 자본주의와 산업화로 퍼진 대중을 위한 문화 형태이며, 고급문화를 즐기기 위해 알아야 할 지식이 필요하지 않으므로 가치가 없다고 평가했다. 그의 기획에 의한 크고 작은 전시회들이 성공하면서 그린버그는 화단의 가장 영향력 있는 평론가로 등장했다. 그린버그는 인상비평, 또는 상상력에 의한 시적 문장력에 의존하던 기존의 미술비평을 고도로 이론화하고 진지한 지적 작업으로 향상시킴으로써 분석적 비평작업으로 끌어올렸다.

작업하는 잭슨 폴락의 모습. 한스 나무트 촬영.


1950년대 중반에 오면 추상미술은 가장 세계적인 양식이 된다. 냉전시기였던 1950년대에 사실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구상미술은 나치와 소련의 미술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배척받거나, 단순히 보수적이거나 구식으로 여겨져 추상 중심의 미술계의 주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곧 그린버그에 대한 공격이 시작됐다. 그 이유는 추상미술을 위시한 모더니즘 미술이 초기의 실험정신 대신 또 하나의 권위로 군림하게 되었다는 인식이 팽배해졌기 때문이다.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화가들은 그린버그가 자신이 제시한 패턴에 맞지 않은 미술가들을 배제한다고 비난했다. 실험적인 젊은 미술가들은 순수추상은 우리의 실제 생활과 지나치게 유리되어 있다고 반발하기 시작했고 미술과 생활을 결합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뒤따르게 되었다. 가장 강력한 움직임은 그린버그가 혐오한 대중문화에서 발생한 팝 아트였다.

팝 아트는 1960년대 초 앤디 워홀이나 로이 리히텐슈타인과 같은 미술가들에 의해 일어난 미술로 대중 만화나 상품광고, 간판 등 우리 주변에서 흔히 발견되는 이미지를 화면에 들여왔다. 처음에 진지하게 생각되지 않았던 팝 아트는 상업미술, 대중미술을 재평가했을 뿐 아니라 일상의 기성 이미지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창작 및 독창성, 예술가의 역할에 대한 커다란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한편 미국은 냉전시대를 벗어나 풍요로운 생활을 향유하면서 화랑의 입지가 커지게 되었고 화단을 좌지우지하던 평론가들의 역할은 감소하게 된다.

-미술사학자 김영나

△1951년 서울 △1973년 물렌버그대학 미술사학과 △1980년 오하이오주립대 미술사학 박사 △1995~2016년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2003~2005년 서울대박물관 관장 △2006~2009년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회장 △2011~2016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2016년~ 서울대 명예교수

◇저서 △‘한국 근대미술과 시각문화’ △‘20세기의 한국미술’ 1,2 △‘김영나의 서양미술사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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