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복해 숨어있다는 뜻의 ‘퍼듀(Perdu)’. 나무판에 아크릴 페인트를 칠하고 자개를 배치한 다음 갈아내고 칠하고 쌓고 갈기를 수십 번씩 반복했다. 고운 색은 이지러지며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자기만의 빛을 품은 자개도 수십 겹 층위 속에 제 위치를 잡았다. 물감이 출렁인 듯한 액체적 유동성과 대리석의 견고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작가 이불의 최신작이자 요즘 그가 가장 몰두하는 작업이다.
한국의 현대미술가 중 세계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자랑하는 이불이 신작 ‘퍼듀’와 함께 6년 만의 국내 갤러리 개인전을 성북구 성북동에 새로이 개관한 BB&M 갤러리에서 다음달 27일까지 연다. 그간 이불은 제 58회 베니스비엔날레를 비롯해 ‘세계 5대 비엔날레’ 중 하나인 시드니비엔날레, 파리의 ‘팔레 드 도쿄’와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 베를린 ‘마틴 그로피우스 바우’ 등 세계 유수의 전시를 누비느라 분주했다.
분홍의 색감, 유려한 곡선 등을 보여주는 ‘퍼듀’ 연작은 ‘전사’로 불리며 센 이미지의 작업을 선보여온 이불의 평소 작업들과 사뭇 달라 보인다. 하지만 이 또한 이불이다. 작가 초기에 집중적으로 보여준 ‘부드러운 조각’ 작업들 이후, 대표작인 ‘사이보그’로 전환하기까지 수년간의 과정이 한 화면에 압축적으로 담긴 셈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올 봄 코로나로 계속 집에만 있다보니 매화와 벚꽃이 기분 좋게 눈에 들어왔고 작품의 색으로 이어졌다”면서 “조각에서는 형태에 집중하기 위해 색을 누르지만, 평면에서는 색채를 확실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직접 “색 조합의 레시피”를 만들 정도로 매혹적이다 못해 곱기까지 한 색상에 공을 들였다. 이불의 외국 전속화랑을 통해 한두점씩 공개된 ‘퍼듀’ 연작이 국내에서 한 자리에 전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자개의 날카로운 조각들을 부드러운 실크 벨벳에 붙인 콜라주 작업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불이 뚝심있게 탐색해 온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혼재를 풍경화로 그린다면 이런 모습이리라. 부드러운 껍데기의 날카로운 속내, 허름한 것의 고귀함, 원시성과 첨단의 공존이라는 역설적 미학을 실현해 온 이불답다.
작가 대표작의 변화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열쇠'같은 조각들도 내놓았다. 미생물이나 바이러스를 연상시키는 유기적 형태의 조각 ‘스틸(Still)’이다. 1990년대에 작가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이미지와 서양 고전조각의 포즈를 합성해 아름답고 관능적인 육체이나 신체 일부분이 없는 불완전한 몸의 ‘사이보그’ 연작을 선보였다. 이후 내놓은 ‘아나그램’은 사이보그를 해체해 외계 생명체와 재조합한 듯한 기괴한 형상으로 기존의 틀을 다시 한번 깨뜨렸다. 2004년작인 ‘스틸’은 ‘사이보그’와 ‘아나그램’ 사이의 전환기를 관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조각이다. “이와 유사한 나머지 한 작품은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LACMA)이 소장하고 있다”고 갤러리 측이 귀띔했다.
4m 높이의 설치작품 ‘오바드(Aubade)Ⅴ’를 5분의 1 크기로 줄여 세밀하게 제작한 ‘오바드를 위한 스터디’도 만날 수 있다. 옛 무기공장이던 베니스비엔날레 전시장 아르스날레에 놓여 위용을 자랑했던 ‘오바드’는 DMZ의 감시초소를 철거하며 나온 철재를 재료로 삼았다. 형태는 파리 에펠탑이나 러시아 조각가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를 위한 모형’ 같은 근대적 기념비의 인상이고 내용에는 한국의 복잡한 냉전시대에 대한 작가의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전시를 기획한 BB&M은 영문학을 전공한 미술평론가 제임스 리가 지난 2009년 설립한 아트컨설팅 기획사로, 이번에 갤러리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이 대표는 아트선재센터 전시부장, 광주비엔날레 전시디렉터 등을 역임했다. 허시영 공동대표는 갤러리현대, PKM갤러리, 갤러리바톤의 디렉터로 활동했다. BB&M은 이불 외에 배영환·김희천 등을 전속작가로 확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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