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업계의 고질적인 저가 수주가 낳은 아이러니일까. 법정관리에 돌입한 STX조선해양의 1조2,000억원 규모 선수금환급보증(RG)과 관련해 상당수 선주들이 배를 그대로 인도받겠다고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워낙에 싸게 계약한 만큼 선수금을 돌려받기보다는 배를 지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제살깎기식 조선업계의 저가 수주가 되레 RG콜을 막는 웃지 못할 상황이 현실화되고 있다.
2일 금융권과 법원 등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파산부는 STX조선에 배를 발주한 선주들이 RG콜을 행사할 수 있는 상한선으로 최대 공정률 90% 이하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이는 당초 예상됐던 80% 공정률보다 크게 높은 것이다.
선주가 RG콜을 제기할 수 있는 공정률이 90% 정도로 정해진다면 공정률이 90% 이상인 배는 계속 건조되고 그 이하 공정률의 선박은 RG콜 대상이 된다.
RG콜 대상이 되면 선주들은 배를 지을 당시 지급한 선수금을 RG를 발급한 금융기관으로부터 그대로 돌려받는다. 법원이 90% 이하 공정의 선박에 대해 그대로 선수금을 보전해주겠다고 하니 상식적으로 보면 선주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선주들은 오히려 RG콜로 보상받기는커녕 STX조선이 법정관리 상태임에도 건조된 배를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마디로 저가 수주가 낳은 씁쓸한 풍광이다. STX조선해양이 워낙 저가 수주를 해왔던 터라 선주들 입장에서는 STX조선에 발주한 선박 가격을 가지고는 이제 어딜 가서도 배를 지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실제 STX조선이 지난 2013년 자율협약에 들어갈 당시 채권단은 일부 터무니없는 저가 수주에 대해 제동을 걸었다. 채권단은 선주들에게 건조 포기를 주장하며 이를 RG콜로 변상해주겠다고 설득한 사례가 있다. 하지만 선주들은 RG콜로 인한 현금 대신 선박을 그대로 인도받지 못하면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며 맞섰다. 당시에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선주들로서는 RG콜로 현금을 돌려받는 것보다 배를 인도받는 것이 이익이었기 때문이다.
STX의 법정관리 신청 후에도 법원과 채권단은 선주들이 RG콜을 행사해 선수금을 받아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채권단의 한 관계자는 “STX조선은 저가 수주가 대부분이라 이를 그대로 건조하는 것보다 채권단이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RG콜로 현금을 돌려주는 게 낫다는 판단”이라며 “배를 그대로 짓는 것은 선주들 좋은 일만 시키는 격”이라고 말했다.
저가 수주로 선주들이 RG콜 대신 선박 인도를 바라는 생소한 풍경은 앞으로 다른 조선사의 구조조정 과정에서도 되풀이될 가능성이 크다. 채권단 관계자는 “배를 짓는 것보다 선수금을 돌려주는 게 나은 상황이라는 것은 국내 조선업계의 저가 수주 풍토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대변한다”고 전했다.
/김보리기자 bori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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