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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Life] 세계적 단색화 작가 박서보 "행위의 반복성이 단색화의 핵심"

<300만원서 15억 된 '연필묘법'>

1982년 전시때 안팔렸지만

단색화 열풍 타고 관심 끌기 시작

지난해 홍콩경매선 14억에 거래

英·佛 등서 개인전 초대도 잇달아

<"변화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격정적 표현의 앵포르멜 운동' 등

특정 화풍으로 불리는데 동의 안해

21세기 그림 과도한 공격성 벗어나

시대의 고뇌·고통 치유해줘야죠

화가 박서보 인터뷰/권욱기자




미술 아카이브 기관인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이 최근 전문가 집단을 대상으로 ‘한국 추상미술의 대표작가’를 설문한 결과 김환기와 박서보(85·사진), 이우환 순으로 의견이 모였다. 생존 작가 중 최고로 꼽힌 박서보는 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주도하고 한국 미술의 세계화에 이바지한 공이 높이 평가됐다. 김환기가 한국적 추상미술을 개척했다면 박서보는 한국적 미술 유파로 세계적 관심을 받고 있는 ‘단색화’를 이끌었다. 가히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박서보 화백을 지난 5일 서울 마포구 성산동 서보문화재단에서 만났다. 4시간 이상의 인터뷰 동안 그는 한순간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다만 창밖에 장맛비가 굵어지고 빗소리가 요란해지자 수장고와 작업실에 혹여나 물 새는 곳은 없는지 신경이 쓰일 뿐이었다.

◇300만원에서 15억원이 된 연필묘법=“1982년 갤러리현대 전시 때 ‘연필 묘법(‘묘법’ 연작 중 연필로 반복적 선·곡선을 그은 작품)’ 100호가 300만원이었는데도 안 팔렸죠. 2000년대 미술 시장이 한참 좋았을 때 3,000만원 정도 했었나? 지금은 똑같은 게 15억원이라더군요.”

30여년 만에 그림값은 500배로 뛰어올랐다. 1980년대 한국 화단에서는 구상미술이 사랑 받았다. 아니면 한국화였다. ‘벽지 같다’ 소리를 듣는 추상화는 비빌 언덕이 없었다. 그나마 외국에서 좀 알아줬다. 2006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박서보의 ‘묘법’은 3,000만원대에 거래됐다. 그러던 것이 ‘단색화’ 열풍을 타고 관심을 끌기 시작해 지난해 11월 말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1975년작 연필 묘법은 약 14억원(수수료 포함)에 팔렸다.

지난해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전으로 벨기에 보고시안재단이 주최하고 국제갤러리가 후원한 ‘단색화’전은 박서보가 세계적 작가로 명성을 다지는 분수령이 됐다. 데미안 허스트 등 정상급 작가를 보유한 영국 최고의 화랑인 ‘화이트큐브’에서 올해 초 한국인 최초로 개인전을 열었다. 공식 개막 전에 작품은 이미 다 팔렸다. 화이트큐브는 내년 9~10월께 신작으로 또 한번 개인전을 열자고 제안한 상태다. 화이트큐브가 2년도 채 안돼 잇달아 개인전을 여는 것도 극히 이례적이다. 프랑스 ‘페로탱갤러리’가 파리는 물론 뉴욕과 홍콩에서 연이어 박서보의 개인전을 연 것도 특별하기는 마찬가지다.

“한평생 팔리지도 않는 그림을 그린 게 뒤늦게 빛을 보네요. 고생했던 아내는 수십 년 쓰레기더미처럼 천대 받던 그림이 세계적 전시장에 걸린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더군요. 1958년 덕수궁미술관에서 현대미술가협회 전시가 있었는데 당시 1,000호짜리 서너 점을 붙인 초대형 작품을 내놓았어요. 그런데 셋방살이 전전하며 이사 다니는데 둘 곳이 없어 결국 태웠건만 물감이 두꺼웠던지 잘 안 타더라고요. 몇 년 뒤 그 동네를 지나는데 무허가 판잣집의 지붕이 된 내 그림이 보이지 뭡니까. 비록 가난한 판잣집에 살지만 덮고 사는 그림을 위로로 삼아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더랬어요.”

◇혁명가가 되고 싶었던 화가=어쩌다 화가가 되었냐는 물음에 “처음에는 혁명가가 되고 싶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내 어릴 때는 동대문 쪽에는 우익, 남산에는 좌익이 모이던 시절이었고 그게 유행이었어요. 그 시대에 혁명가는 하나의 꿈이었죠. 하지만 6·25전쟁을 겪으며 그 꿈은 접었습니다.” 그림의 인연은 중학교 시절 선생님의 권유로 참가한 포스터 공모전이 시작이었다. 형이 쓰던 말라붙은 물감에 뜨거운 물을 부어 소박하게 그려낸 포스터가 전국 1등상을 받았다. 또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안성에는 이당 김은호가 활동했던 곳이라 그의 작품을 모사할 기회가 많기도 했다. 똑같이 따라 그린 ‘미인도’를 두고 사람들이 구별 못 할 정도였으니 재주는 탁월했다. 그러나 홍익대 동양화과 합격증을 받아온 아들을 본 부친은 보름 가까이 식음을 전폐하고 몸져누웠다.

“아버지가 총각 때부터 사주를 보면 상처(喪妻) 후 둘째 부인이 낳은 셋째 아들이 세계적 인물이 될 거라는 얘기를 수차례 들으셨대요. 그게 바로 접니다. 법률가인 아버지의 뒤를 이을 것이라 기대했던 아들이 ‘환쟁이’가 된다고 하니 많이 속상하셨던 모양입니다.”

홍익대에서는 당대 최고의 동양화가인 청전 이상범과 고암 이응노를 은사로 만났다. 그러나 1학년 첫 학기가 끝나기도 전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학교가 통째 부산으로 피란을 갔지만 그 두 교수는 함께하지 못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서양화과로 이적해 만난 스승이 수화 김환기다.

“윤형근(단색화 작가 중 하나이며 김환기의 제자이자 사위)이 김환기 선생님께 ‘아무개가 박서보보다 낫지 않습니까’ 하고 물으면 ‘너 정말 그림 볼 줄 모르는구나. 박서보만큼 흰색을 잘 쓰는 작가가 없다. 박서보가 가장 크게 남는다. 두고 봐라’ 하시고는 했어요.”

아버지와 스승의 기대와 믿음이 박서보를 키웠다.





◇“변화하지 않으면 추락한다”=한국 추상미술의 역사를 짚어보건대 변화의 최전선에는 늘 박서보가 있었다. 그는 1960년대 즉흥적 행위로 격정적 표현을 보여준 ‘앵포르멜’ 운동과 1970년대 단색조 회화 경향인 ‘모노크롬’의 선두주자로 불린다. 그러나 자신은 앵포르멜이나 모노크롬 화가로 불리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선을 긋는다. 특정한 유파에 속하기보다는 독자적인 화풍임을 강조한 까닭이다.

“모든 변화가 나로부터 시작된 것은 분명합니다. 내 오랜 지론이 ‘변화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그러나 변화하면 추락한다’입니다. 앞장서서 변화해야 합니다. 하지만 남의 것을 곁눈질로 베껴 제 것처럼 보여준다면 금방 추락합니다.”

1956년 박서보는 ‘반국전 선언’을 했고 이듬해 선보인 작품이 국내 최초의 앵포르멜로 꼽힌다. 박 화백은 “서양의 앵포르멜은 정형성에 대한 저항을 뜻하는 비정형 예술이고 2차대전의 참혹함 속에서 탄생한 ‘논리’의 예술인 반면 나와 우리의 경우는 ‘자기파괴의 예술’이었다”며 “6·25를 겪고 친구와 동기를 다 잃은 나는 목가적 풍경을 우리 것인 양 자위하는 국전(國展)에 반대하는 의미로 안료를 흩뿌리고 캔버스를 걷어차 작품을 부숴 형태를 없애는 식으로 일종의 몸부림처럼 시대를 증언했던 것”이라고 말한다.

파리에 다녀온 뒤 1962년 모교 홍익대 교수가 됐으나 1966년 조직 내 갈등으로 사표를 던졌다. 고민하는 백수가 됐다.

“나에게 ‘너는 누구냐’ 질문을 던지던 시절, 서양의 미술사적 가치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어요. 노자, 장자, 불경부터 화론까지 읽고 보니 내가 동양에 대해 너무나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탐욕을 버리고 비워내야 한다, 그리는 것은 수신(修身)의 수단이고 그림은 수신과정의 찌꺼기라는 것까지 깨달음이 미쳤습니다. 당시 ‘허상’과 ‘유전질’ 연작을 하던 시기였는데 비움에 대한 깨달음을 어떻게 그림으로 구현할지 방법론이 막막했습니다.”

그러던 박 화백 앞에 세 살짜리 아들의 몸짓이 보였다. 형의 연필로 노트에 끄적여 보지만 좀체 뜻대로 되지 않자 급기야 화내듯 체념해 연필로 그렸던 것을 마구 문질러버리는 게 아닌가! 무릎을 치며 아들을 모방했다. 그 체념적인 비우기를 체화(體化)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책이나 고귀함 속에서 찾지 못하던 진리를 일상에서 찾아낸 것이 ‘연필 묘법’의 시작이다. 박서보의 작품들 중 가장 높은 가격대에 거래되는 시리즈다.

“그것이 소위 ‘단색화’지만 나는 다색주의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 등장한 모노크롬(의 작가로 분류되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자연을 정복 대상으로 본 서양과 달리 우리는 자연숭배주의가 뿌리 깊은데 이것이 근대화 과정에서 흔들려 그만 ‘중심상실시대’에 이르렀죠. 나는 자연관의 회복 운동으로 ‘무위자연’을 강조했습니다. 개념미술이 팽배하던 시기에 오히려 반(反)개념미술로 볼 수 있는 나의 단색화는 승려의 수행 같은 수없이 반복되는 행위가 핵심입니다.”

평생 변화를 추구한 그는 지금도 변화를 모색한다.

“음식이 손맛인데 그림에 왜 맛이 없겠습니까. 손 그 자체의 맛으로 가야 하는 게 아닌가, 그것이 ‘새로운 예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20세기의 예술은 걸어놓고 그것이 발산하고 뿜어내는 이미지를 받아내는 방식이었다면 스트레스와 공격성이 과도한 21세기의 그림은 마치 흡인지처럼 사람을 빨아들이고 고뇌와 고통을 흡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시대 예술이 해야 할 일입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사진=권욱기자

He is... △1931년 경북 예천 △1954년 홍익대 회화과 졸업 △1962년 국립중앙도서관화랑 ‘원형질’ 개인전 △1962~1997년 홍익대 회화과 교수 △1970년 서울화랑 ‘유전질’ 개인전 △1970~1977년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 △1973년 도쿄 무라마쓰화랑 ‘묘법’ 개인전 △1986~1990년 홍익대 미술대학장 △1994년 옥관문화훈장 수훈 △1994년 서보미술문화재단 설립 △2000년 홍익대 미술학 명예박사 △2011년 은관문화훈장 수훈 △2011년 부산시립미술관 개인전 △2012년 대구미술관 개인전 △2015년 뉴욕 페로탱갤러리 개인전 △2016년 런던 화이트큐브 개인전, 홍콩 페로탱갤러리 개인전 △주요 소장처:뉴욕 솔로몬구겐하임미술관, MoMA, 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 댈러스 래쇼프스키 컬렉션, 프랑스 FNAC, 홍콩 엠플러스(M+), 도쿄 현대미술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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