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음.음.아~ 아아, 아 아 아…”
음란한 상상을 자극하는 여성의 신음이 흘러나온다. 삼청로 국제갤러리 1관. 소리는 반복적이며 장면에 따라 강도가 달라진다. 음악을 전공해 시각예술가로 활동하는 작가 오민의 영상작품 ‘바나나’. 벽면의 모니터에서는 바나나 껍질을 벗기고 썰고 갈아 주스로 만들고 이를 컵에 나눠 붓는 장면이 과정별로 하나의 의식처럼 진행 중이다. 말끔한 전시장의 우아한 적막을 깨지 않게끔, 동시에 은밀한 감상을 위해 음향은 헤드폰으로만 들을 수 있다. 작가는 청각정보와 시각이미지를 색다르게 결합해 다양한 예술형식을 구사한다. ‘바나나’ 외에도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소나타를 기하학적 이미지로 보여주는 신작도 함께 선보였다.
오민을 비롯한 김영나·김희천·남화연·베리띵즈·이윤이·EH가 참여한 그룹전 ‘유명한 무명’이 이달 말까지 국제갤러리 1,2관에서 열린다. 작가들의 공통점은 미술 이외 분야의 전공자로, 별도의 생업을 두고 있으며 각자의 업계에서는 뛰어난 실력을 뽐내는 유명인이라는 것. 즉 미술계에서나 무명일 뿐 나름 ‘유명한 무명’인 셈이다.
그래픽디자이너 김영나는 색색의 기하학적 모양들을 전시장 벽면에 그린 월페인팅을 선보였다. 점·선·면과 색이라는 순수미술의 기본 조형요소를 보여준 것인데, 색과 형태와 그 배치 등으로 소통하는 디자이너의 역량이 얹혀져 이미지들은 말(言)로는 다 담지 못할 풍부한 이야기를 재잘대는 듯하다. 자신의 전공인 건축을 잠정적으로 접고 ‘취직’을 택한 김희천은 “노동하는 자아와 (예술)작업하는 자아의 갈등을 스스로 다독이고자, 일하는 중간중간에 딴생각 하듯 혹은 작업하는 기분으로 동영상을 찍었”고 1년간 모은 1,600개의 동영상을 스크린세이버(화면보호기)로 만들어 내놓았다. 자신의 일상과 현실을 스크린에 옮긴 격이다.
순수미술 전공자인 남화연의 경우 조각과를 나왔지만 대학 졸업 후 한번도 조각작업을 선보인 적 없이 영상작업에 주력했다. 그는 지난해 제56회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도 비디오작업으로 참여했다. 이번 전시에서 이례적으로 선보인 조각 신작은 환경파괴로 탄생한 돌연변이 백합 조각들로 자연과 인간의 미래를 고찰했다.
7팀의 작가들 모두 재주가 많은 ‘다빈치형 예술가’라 불릴 만하다. 동시에 ‘진정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더 긴 시간을 ‘해야 하는 일’에 매달려야 하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이들을 찾아내 하나의 전시로 엮은 초빙큐레이터 김성원 서울과학기술대 조형예술학과 교수의 능력이 돋보인다. 은둔과 사라짐에 대한 열망으로, 자신의 문학과 삶이 알려지지 않도록 “내 작품을 불태워 달라”고 유언해 더 유명해진 프란츠 카프카를 예로 든 김 교수는 “스타시스템이 파고든 미술계, 국내 최정상인 대형 상업화랑에서는 보기 힘든 작가들이지만 서로의 ‘다름’에서 새로운 상상이 탄생했다”며 “‘유명한 무명’은 작가로서의 생존전략일 뿐 아니라 관객 스스로도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전략적 가치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31일까지. (02)735-8449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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