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출판도시 초입에 들어서 속도를 줄이고 좌우를 살피기 시작했다. 오른편에는 서가의 길이만도 무려 3.1㎞, 높이는 최대 8m에 달하는 압도적 규모의 복합문화 공간인 지혜의숲이 보였다. 지혜의숲을 지나자 왼편으로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노르웨이의 국민작가로 불리는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나의 투쟁’과 25년간 단 한번도 대중 앞에 나선 적이 없는 이탈리아 유명작가 엘레나 페란테의 ‘나의 눈부신 친구’를 소개하는 래핑 광고가 외벽을 감싸고 있어 이곳이 출판사 한길사의 건물임을 알려줬다. 책 4권을 세워 만든 모양의 건물 꼭대기에 위치한 다락방을 찾아가자 40년간 책을 만든 출판인이자 이곳의 안주인인 김언호(71) 한길사 대표를 만날 수 있었다.
수만권의 책들과 그의 정신적 스승인 함석헌 선생과 김 대표의 부모님 사진 등 다양한 볼거리(?)에 눈이 팔려 있는 기자를 향해 김 대표는 대뜸 “저는 이곳을 ‘독고(讀庫)’라고 부른다”고 말했다. ‘읽는 창고’라는 뜻이다. 김 대표는 이곳에서 수많은 책을 읽고, 쓰고, 생각하며 자신의 시간을 오롯이 책과 함께 보냈다. 지난 1976년 안암동에서 출판사를 차린 후 강남을 거쳐 파주로 장소는 바뀌었지만 김 대표는 자신의 ‘독고’에서 1970~1980년대 한국의 지성사·사상사·사회사의 풍경을 다채롭게 보여주는 한길사의 대표적 기획인 ‘오늘의 사상신서’, 1980년대 한국 지식인 사회에 인식의 일대 전환을 가져오게 한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 40년간 3,000종이 넘는 책을 펴냈다.
‘정신을 담아내는 책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수단’이라는 생각을 갖고 한 권 한 권의 책이 가진 물리적 무게 이상의 작품을 만들어낸 그에게 가장 애착이 가는 책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라 생각했지만 예상과 달리 김 대표는 망설임 없이 ‘우상과 이성’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꼽았다.
“저자인 리영희 선생님은 ‘우상과 이성’ 때문에 구속됐다. 출판일을 시작하자마자 저자를 구속되게 한 출판인이 됐다”며 “험난한 출판 행로가 보였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우상과 이성’은 발간 1주일 만에 필화사건에 휘말렸다. 일부 내용을 검찰이 문제 삼아 리영희 선생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해방전후 우리 역사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다는 인식하에 만들어진 ‘해방전후사의 인식’ 역시 친일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는 이유로 출간 직후 판매 금지됐다. 다행히 1980년 서울의 봄을 계기로 두 책은 다시 판매될 수 있었다. 이후 젊은이들은 이 책들을 반드시 읽어야 할 서적으로 생각해 많이 구매했고 베스트셀러가 된 두 책으로 인해 한길사는 인문·사회과학서를 꾸준히 낼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김 대표는 “1980년대는 모든 젊은이들이 인문·사회과학서를 들고 다니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며 “책이 사회 문제를 인식하고 어떻게 극복할지 실천하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러다 보니 당시에는 책을 정말 많이 읽었다”고 말했다.
책이 삶의 일부였던 1980년대를 회상하다 보니 책을 잘 읽지 않는 현재에 대한 걱정으로 화제가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독서시간의 부족, 다른 놀이문화의 증가 등 책을 읽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김 대표는 “스마트폰과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기계문명에 지배당하면서 책을 안 읽게 된 것 같다”고 진단했다.
그렇다고 김 대표가 새로운 기계문명을 거부하거나 피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둘 다 필요하지만, 문제는 현대인들이 기계문명을 편식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책의 힘을 믿고 있는 김 대표는 이 같은 흐름이 변화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는 “스마트폰은 패스트푸드 같은 것이다. 패스트푸드를 자주 먹으면 몸에 좋지 않다”며 “그래서 다시 종이책에 대한 가치를 생각하며 독자들이 종이책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당장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해서 당장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김 대표는 장기적으로 봤을 때 책 읽지 않는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독서 없이는 깊은 사유가 불가능하다”며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민주주의인데 책을 읽지 않으면 관용의 정신이 잘 생기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좀 더 안정적으로 흘러가려면 독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독서의 중요성을 스스로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가 역시 책 읽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평소 김 대표의 지론이다. 그는 “도서관 예산을 줄이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며 “도서관 사서를 전문적으로 키우고 서점 직원에 대한 지원을 늘리는 등 문화정책적 차원에서 도서관과 서점을 보호하고 지원해줘야 된다”고 말했다.
한국 현대 정신사·지성사와 맥이 닿아 있는 주옥같은 책들을 내왔지만 책이 다소 무겁고 어렵다는 지적을 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김 대표는 “지금 현실적으로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게 사실”이라며 “인문학책을 잘 읽지 않아 책을 다시 들게 하는 운동과 정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향후 한길사 운영방침에 대해 “창립 40주년을 맞아 독자와 함께하는 출판사가 되기 위해 앞으로 문학도 많이 하려 한다”고 말했다.
1998년 한국출판인회를 창설했고 1980년대 후반부터는 파주출판도시 건설에 참여해 국내 출판인 가운데 가장 먼저 파주출판도시에 입주하고 2005년에는 동아시아출판인회의를 조직해 동아시아 차원에서 출판·독서운동에 나서기도 하는 등 행동하는 출판인인 김 대표는 민감한 출판계 이슈에 대해서도 조심스럽지만 솔직한 속내를 드러냈다.
여러 출판인과 함께 도서정가제를 관철시킨 그이지만 김 대표는 서울국제도서전·파주북소리 등 일부 책 잔치에서만큼은 정가제를 한시적으로 적용하지 않는 방안도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서울국제도서전과 같은 국내 최대 출판축제가 반쪽짜리 책 잔치로 전락한 데는 출판계의 양대 단체인 한국출판문화협회와 출판인회의의 갈등 외에 정가제 시행으로 책을 할인판매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진 데도 그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독자들이 책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의도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도서정가제를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방자치단체의 유치 경쟁으로 잠정 중단된 한국문학관 건립 사업에 대해서는 파주가 유치해야 한다는 입장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는 “문학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그냥 취미로 해서는 할 수 없다”며 “그런 점에서 책을 만드는 동네하고 같이 가야 된다”고 강조했다.
고희를 넘은 나이지만 청년 정신으로 책을 만들어온 김 대표는 당분간 ‘독고’를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김 대표는 “빈손으로 시작해 책 3,000권을 만들고 책을 통해 한국 사회를 주도하는 생각들을 담아냈고 아이들도 다 키웠다. 이 정도면 행복한 거 아닌가 싶다”면서도 “독자들이 기억하는 책을 더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박성규기자 exculpate2@sedaily.com·사진=송은석기자
He is...
△1968~1975년 동아일보 기자 △1976년~ 한길사 대표 △1984년 대한출판문화협회 이사 및 상무이사 △1997년 서울출판인포럼 대표 △1997~2005년 파주 예술마을 헤이리 이사장 △1998~2002년 한국출판인회의 회장 △1998년~ 도서출판 한길아트 대표 △1999년 경희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1999년 북토피아 설립위원회 위원장 △2005~2006년 대한출판문화협회 수석부회장 △2005~2008년 제1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문화일반 부문) △2005~2008년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 이사 △2008~2011년 동아시아출판인회의 의장 △2009~2010년 파주출판단지 입주기업협의회 회장 △2011년~ 파주북소리 조직위원장 △2013년~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
◇대표작
△오늘의 사상신서 △해방전후사의 인식 △한국사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국토와 민중 △로마인 이야기 △혼불 △나의 투쟁 △나의 눈부신 친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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