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발행되는 세계적 미술잡지 아트뉴스(artnews.com)가 매년 선정하는 ‘세계 200대 컬렉터’에 한국인으로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 부부,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이 2년 연속 이름을 올렸다. 그렇다고 ‘재벌=컬렉터’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중산층의 봉급 생활자 중에서도 몇십만, 몇백만원짜리 작품을 할부로 구입하는 ‘소액 컬렉터’도 많다. 마음에 든 그림을 구하기 위해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쓰고 ‘밥을 굶을지언정 그림만 봐도 배부르다’고 말한다면 분명 미술 애호가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타났을 때 선뜻 구입하고 정기적·주기적으로 그림을 살 수 있는 통상적 의미의 ‘컬렉터’는 고소득자나 재력가인 경우가 많긴 하다.
◇누가 그림을 모으나?=“미국의 경우 투자금융회사가 빅 컬렉터이고 주식·헤지펀드를 가지고 있거나 현금운용이 많은 직업군일수록 미술품 구입에 적극적인 반면 귀족문화를 배경으로 한 유럽은 패밀리 컬렉션(가족 소장품)을 미술관을 통해 공유하거나 사회환원·대여 등의 방식으로 운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게 전민경 국제갤러리 디렉터의 설명이다. 최근에는 러시아의 석유재벌이자 첼시FC를 소유한 로만 아브라모비치 같은 ‘구단주’들이 투자목적을 겸해 거물 컬렉터로 부상했다. 홍콩의 K11아트파운데이션의 창립자일 정도로 미술 사랑이 극진한 컬렉터이면서 백화점 부호인 애드리언 쳉 뉴월드그룹 부회장처럼 ‘중국 부유층의 2세대, 3세대’도 주목받고 있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는 ‘200대 컬렉터’에 들 정도이고 엘턴 존, 앤젤리나 졸리와 브래드 피트, 제이지와 비욘세 등 유명인 컬렉터층도 두텁다.
우리나라의 컬렉터로는 기업 오너와 그들의 ‘사모님’이 첫손에 꼽힌다. 이들은 회사 이미지 쇄신을 위한 기업컬렉션은 물론 투자목적과 취향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개인컬렉션을 소장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비자금이 작품 구입 자금으로 흘러들어간 경우가 있어 마치 미술품을 소유하는 것에 ‘검은 돈’과 연관된 것 같은 부정적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그런가 하면 김창일 아라리오 회장, 안혜령 리안갤러리 대표 등 컬렉터로 시작해 화랑주가 된 경우가 많다. 유니온제약의 안병광 회장이 설립한 서울미술관을 비롯해 삼성미술관·간송미술관·토탈미술관 등 사립미술관은 컬렉터로부터 출발한 것이 대부분이다.
컬렉터의 성향은 직군별로 조금씩 다르다. 금융계 종사자는 투자목적으로 작품을 고르는 경우가 단연 많았고 이 때문에 경매 거래기록 및 통계, 환금성을 꼼꼼하게 따지는 경향을 보였다. 성공한 최고경영자(CEO)일수록 오히려 감성에 많이 이끌린다는 게 미술시장 관계자들의 일관된 목소리다. 이들은 박수근·이중섭 등 고향·모성·가족애 등을 자극하는 근대 작품에 취향을 보인다. 동시에 사업장에 걸어둘 만한 좋은 의미의 길조를 선호하며 금전운이 따른다는 황금색과 붉은색 작품을 찾기도 한다.
전문직 종사자는 작품에 대한 자기 취향이 분명한 ‘개성파’다. 경매회사 관계자 A씨는 “특히 의사들은 마니아적 경향이 강해 한번 ‘꽂힌’ 작가에게 몰두하는 편”이라며 “의사 중에도 외과의사는 물성이 두드러지는 작품, 산부인과는 인체 조각을 추구하는 식으로 나름의 색깔을 갖는다”고 말했다. 정치인의 경우 민중미술처럼 정치색이 분명하거나 강렬한 느낌의 작품을 찾고 법조계 종사자는 미술사적으로나 시장에서 검증된 근대 작가 위주로 신중하게 접근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반면 연예인 컬렉터의 경우 도상, 즉 이미지 특징이 강한 것을 선호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을 지낸 원로 조각가 최만린과 동서지간이기도 한 탤런트 최불암을 포함해 임예진·노주현 등 중견 연예인들은 수십 년 컬렉션을 축적한 유명 컬렉터이고 최근에는 ‘단색화’ 작가 박서보 화백의 작품을 구입한 장동건·고소영 부부를 비롯해 배용준과 이정재, 빅뱅의 탑, 장근석 등 젊은 셀리브리티들이 가세하고 있다. 스스로 화가 오치균의 팬을 자처하는 가수 김동률은 자신의 SNS에 그림을 포스팅하고 꾸준히 전시를 보러 다니는 등 적극적이다. 연예인 컬렉터의 경우 제프쿤스, 구사마 야요이, 고헤이 나와 등 “블링블링(반짝이고 화려한)하면서도 이미지가 강렬하고 분명한 작품”을 선호한다는 게 현장 전문가들의 전언이다.
◇컬렉터는 몇 명?=그렇다면 한국의 컬렉터는 몇 명이나 될까. 컬렉터의 정의·기준조차 애매하니 정확한 수치를 가늠하기는 불가능하지만 분명한 것은 컬렉터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이상규 케이옥션 대표와 최윤석 서울옥션 상무가 우리나라 컬렉터를 어림잡은 수치는 “500명 정도”로 일치했다. 예술경영지원센터가 매년 발간하는 ‘2015 미술시장 실태조사’에 집계된 전국 화랑 수 433개와 맞먹는다. 유통업체와 수요자(컬렉터) 수가 비등한 기형적 구조 때문에 한국 미술시장의 자생력 부족과 불황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국세청의 지난해 통계를 기준으로 보면 ‘잠재 컬렉터’에 해당하는 종합소득 2억 원 이상의 근로소득자가 4만여 명, 연간 금융소득 6,000만 원 이상의 고액 자산가는 3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서울옥션에 연회비를 내고 도록을 받아보는 정회원은 5,000명, 온라인회원은 약 4만5,000명이고 케이옥션은 도록과 리스트를 받아보는 회원 4,500명을 포함해 온·오프라인 통합회원 2만2,000명을 확보한 상황이며 이들 회원은 대체로 중복된다.
게다가 500명으로 추산된 컬렉터 중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억대의 비싼 그림’을 사는 사람은 100명도 안 된다. 미국과 유럽 등지를 오가며 활동하는 아트 컨설턴트 B씨는 “한국의 컬렉터는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격(格)을 맞추거나 비즈니스 대화에서 소외되지 않으려는 용도, 혹은 투자목적으로 주변의 입소문을 따라 사는 경향이 가장 큰 문제”라며 “한때 사모님들 사이에 강익중의 ‘달항아리’가 유행하자 강남 여염집들에 모두 비슷한 그림이 걸린 웃지 못할 풍경도 있었다”며 컬렉터의 ‘취향 결여’를 지적했다. 컬렉터 개념을 확장해 ‘예술 소비자’로 저변을 확대하려는 노력은 최근 들어 크게 늘었다. ‘화랑미술제’와 중저가 아트페어의 증가가 대표적이다. 그림을 좋아하는 컬렉터이기도 한 나효진 티아이피재활의학과의원 원장은 서울 이촌동 병원을 자신의 소장품은 물론 신진작가와 도예가들을 위한 전시공간으로 제공하고 있다. 정현석 플랫폼12 대표는 “12㎝ 크기의 몇십만 원짜리 소품, 실용적인 도자 등 작품을 생활필수품으로 여기는 풍토가 확산 되고 각자가 자신의 취향을 알게 되면 자연스레 컬렉터는 늘고 그때는 ‘컬렉터’가 더 이상 특정계층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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