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의 오로라가 미술관 안으로 들어왔다. 부슬부슬 내리는 작은 빗방울의 장막 사이로 무지개가 일렁인다. 착시지만, 알면서도 황홀하다. 꽃을 꺾어 방에 놓고 집안에 정원을 두어 자연을 곁에 붙들고자 했던 것이 인류의 오랜 취미이자 소망이었다면, 오로라와 비와 무지개를 가졌으니 그 꿈이 이뤄진 듯하다. 덴마크 출신 현대미술가 올라퍼 엘리아슨(49·사진)의 신작 ‘무지개 집합(Rainbow Assembly)’이다. 어두운 공간을 꽉 채운 지름 13m의 검은색 원형 구조물이 얇은 이슬비의 커튼을 만들었고, 관람객은 그 안팎을 오갈 수 있다.
“무지개는 빛, 물, 눈이 특정한 각도를 이뤘을 때 보이기 때문에 시선에 따라 각자 다른 곳에서 무지개를 봅니다. 보세요, 여기서도 관객들이 제각각 다른 곳을 바라보며 무지개를 만나죠. 한 작품 앞에서도 다양한 시선이 공존하니, 내가 움직이면 나의 관점도 달라집니다. 내 작품에서 관객은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자이자 작가이고, 나는 기계 제작자일 뿐입니다.”
놀랍고도 새로운 경험을 안겨준 그의 대규모 개인전이 ‘올라퍼 엘리아슨:세상의 모든 가능성’이라는 제목으로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내년 2월 26일 까지 열린다. 1990년대 초기작부터 근작까지 22점을 한 자리에 모은 흔치 않은 기회다.
우선 그의 작품은 시각 뿐 아닌 후각·청각 및 온몸의 감각으로 느끼고 경험한다는 사실을 알고 가자. 매표소에서 전시장으로 향하는 길에 만나는 천장에 매달린 검은색 회전식 ‘환풍기’가 관람의 시작이다. 바람만 느끼든 선풍기를 따라 뛰든 각자의 몫이고 자유다. 전시장 앞에서 눈보다 코가 먼저 작품을 감지한다. 북유럽의 순록이끼로 벽 전체를 뒤덮은 엘리아슨의 대표작인 ‘이끼벽’. 인공적 공간인 미술관에서 맞닥뜨린 뜻밖의 자연을 ‘스스로 자각’하면 그것으로 관람은 충분하다. 여느 그림을 감상하듯 뚫어져라 이끼를 살피며 의미를 찾을 필요는 없지만 신기한 식물이라 가까이서 보게 만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 앞에는 휘감긴 이중나선 한 쌍이 끝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더 많이 감긴 ‘강한 나선’과 상대적으로 느슨한 ‘부드러운 나선’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있는 이 작품에서 작가는 “참된 권력과 그 균형”을 얘기한다.
거울 같은 스테인레스스틸 판 수백 개로 만든 만화경 형태의 ‘자아가 사라지는 벽’은 “나 자신 만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파편화 된 나를 둘러싼 주변 모든 것을 보여주는 벽”이다. 또한 신작 ‘당신의 예측 불가능한 여정’은 우주를 끌어다 놓은 듯 검은 바탕에서 천 여 개의 유리구슬이 반짝이며 오리온 성운을 이룬다. 구슬에 거꾸로 맺힌 ‘지금의 나’를 만날 수 있다. 어두운 모서리 공간에 매달린 프리즘과 유리가 느릿하게 움직이면서 빛을 투과해 다채로운 색과 형상을 보여주는 ‘당신의 미술관 경험을 위한 준비’ 또한 발길을 붙든다.
수학과 과학을 비롯해 건축·공학 등을 작품에 접목시켜 철학·정치·사회 등 다양한 분야를 이야기하는 엘리아슨은 단연 제일 잘 나가는 현대미술가 중 하나다. 2003년 베니스비엔날레 덴마크국가관을 대표한 엘리아슨은 그해 런던 테이트모던 터바인 홀에 ‘날씨 프로젝트’로 노란 인공 태양을 띄우는 등 ‘초록빛 강’ ‘뉴욕시 폭포’ 등 인공적으로 조성한 유사(類似) 자연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일시성과 비물질성으로 상대성과 다원성을 말하는 그 탁월한 어법 뒤에는 수학자·과학자·미술사가·요리사를 포함한 90여 명 스튜디오 동지들과의 협업이 깔려 있다.
전시장이 아닌 아트샵에서 만날 수 있는 그의 대표작은 ‘리틀 선(Little Sun)’. 전기를 사용할 수 없는 오지 사람들을 위한 휴대용 태양광 발전기인 해바라기 모양의 ‘리틀선’을 두고 작가는 “손에 작은 발전소(power plant)를 쥐고 있으면 힘 있는(powerful) 사람이 된 기분”이라고 소개했다. 수익금은 동남아와 아프리카 지역에 전기를 공급하는 사업에 쓰인다. 자연과 인공의 조화, 예술과 기술의 융합을 추구하는 그가 돈과 권력의 균형 있는 분산을 시도한 셈이다.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는 어린 엘리아슨에게 부모는 “지구를 밀어내라, 밀어내”라며 응원했고 그 후로 작가는 예술이 주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됐다고 한다. (02)2014-6900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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