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 잘하는 게 미덕이라고요? 그럴 리가요”
적재적소에 인재를 추천하고 꿈을 펼칠 수 있게 도와주는 남자. 아시아 최대 테크(Tech) 인재 채용 플랫폼 겟링크스(GetLinks)에서 개발자·디자이너·디지털 마케터(3D 인력, Developer·Desinger·Digital Marketer)를 발굴하는 권우현(32·사진)씨는 ‘뭐든 시켜만 주시면…’이란 말은 무책임하다고 말했다. 한국과 싱가포르 기업 문화의 가장 큰 차이점이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내놓은 답이다.
권씨는 사회생활의 첫 발을 싱가포르에서 내딛었다. 신입사원 연수가 한창이던 어느 날,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 있어 질문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그는 ‘다 같이 교육받는 데 질문으로 시간을 뺏으면 민폐’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끝나고 다시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담당선배가 귀신 같이 질문을 던졌다. “정말 이해가 가느냐”고. 권씨가 우물쭈물하자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말을 이어 간 선배는 “2주의 교육기간 동안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얼마든 날 귀찮게 해도 좋아. 단 2주 후에 내 업무를 방해해선 안돼. 이해 못하고 나중에 틀릴 바엔 계속 물어보고 나중에 안 틀리는 게 낫잖아”라고 설명했다. 담당업무와 전혀 관련이 없는 일을 떠맡겨도 ‘상사의 지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떻게든 해내야 하는 한국의 기업문화와는 딴판이다.
그는 “그때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체득한 문화가 남아있었던 것 같다”며 “모르겠다, 알려달라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못하겠다’며 거절하는 것도 상상하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스페셜리스트(specialist)로 성장하고 싶다는 권씨의 희망이 날개를 달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사실 권씨는 대학시절부터 꾸준히 해외취업을 준비했다. 성격도 성적도 심지어 영어구사능력도 어느 하나 빠지는 게 없었던 대학교 선배가 꿈에 그리던 대기업에 취업한 후 어떻게 생기를 잃어가는지 목격했기 때문이다. 몇 달 만에 만난 대학 선배는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근무하는 게 일상’이라면서 회사를 ‘세븐일레븐’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정작 권씨가 놀란 대목은 따로 있었다. ‘불합리하다’고 불평하면서도 상황을 타개하려는 노력은 전무한, ‘버티기’에 돌입한 선배의 태도였다. “꿈이나 비전을 이야기하는 건 사치”라며 “현실을 모른다”고 읊조리는 선배의 모습이 권씨를 두렵게 만들었다. 권씨는 “저 모습이 나의 미래라면 바꿔야겠다고 다짐한 순간이었다”고 고백했다.
해외취업을 위해서는 영어공부가 우선이라고 판단한 그는 취미로 즐기던 축구를 영어 공부에 활용하기로 했다. ESPN·SKY SPORTS 등 스포츠 전문채널 홈페이지에서 영문 축구칼럼을 찾고 번역하기 시작한 것. 전문을 먼저 읽고 이해가 안 가는 단어나 대목은 표시해뒀다가 찾아보곤 했다. 특별할 것 하나 없지만 관심이 있는 영역을 고른 덕분에 꾸준히 할 수 있었다. 그는 “스포츠 전문용어가 많아 처음엔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재미는 있었다”며 “어느 순간부터는 영어 축구 중계도 다 들리는 수준이 됐다”고 말했다.
해외문화탐방·유학생 정착 도우미 등 학교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들도 놓치지 않았다. 학교 홈페이지·게시판을 틈날 때마다 확인하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해외 동향도 자주 살폈다. ‘Fresh graduate salary in Singapore’, ‘Singapore working pass’, ‘living cost in Singapore’ 등을 구글에서 키워드로 검색하는 식이었다. 또 한인 커뮤니티도 적극 활용했다. 그는 “아는 사람만 아는 정보는 비공개 커뮤니티를 통해 얻을 수 있다”고 귀띔했다.
그렇다고 권씨가 ‘해외 만능주의’에 빠져있는 건 아니다. 그는 외국이면 무조건 다 좋다고 생각해 본적은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오히려 해외생활 5년차에 접어들자 헛헛함이 커졌다. 타지에서 외국인으로 산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어렵기 때문. 돌봐 줄 가족도 없는데 몸이라도 아플 때면 서러움이 곱절이 된다. 엄마 손맛이 깃든 김치찌개가 그리울 때도 있다. 그러던 와중 권씨는 2015년 1월 영국계 헤드헌팅 회사의 서울 지점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그는 “한국 사람이지만 한국에서 일하는 건 처음이라 기대가 컸다”며 “그리던 가족과 집밥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설렜다”고 말했다.
그러나 2달도 채 되지 않아 기대는 실망을 넘어 좌절로 바뀌고 말았다. 한국에서 경험한 각종 ‘갑질’은 그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대학 때 어렴풋이 가졌던 ‘한국은 일하기 힘든 곳’이라는 생각은 확신이 됐다. 생각나는 일화가 있느냐고 묻자 권씨는 전화로 여러 차례 이야기를 나눴던 고객사 담당자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만나기 전까지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며 말문을 연 그는 상대방이 대뜸 “그런데 몇 살이세요?”라고 물었다며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31살 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존댓말은 자연스레 반말이 됐다. 개인 간의 만남이 아닌 회사를 대표해 만난 자리인데도 나이에 따라 서열을 정리하려는 분위기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는 “아, 어리구나. 학교는 어디 나왔나? 한국에서 나왔나?”라며 갑자기 ‘호구조사’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프로답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는 건 당연했다. 일본이 한국과 비슷한 기업문화를 가졌다는 의견도 있지만 권씨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첫 직장이 일본계 리크루팅 회사였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불필요한 보고서를 쓰느라 밤을 새운 적이 없다”는 권씨는 “(근무했던 일본계 회사에도)리포트라는 개념이 있기는 하지만 이메일로 보고하는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말단 신입사원 때 만난 본사 이사가 90도로 인사하며 명함을 건네는 등 나이를 떠나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으로 근무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직장생활을 해온 그가 연공서열이 깊숙이 밴 소위 ‘한국식 문화’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했다.
권씨는 “내가 ‘지나치게’ 운이 좋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면서도 “한 가지 분명한 건 적어도 ‘비합리적인 부분이 있다면 이상하다고 여겨지는 분위기’가 한국과는 다른 점”이라고 말했다. 권씨는 그래서 한국의 청년들에게 해외취업을 권하고 싶다고 했다. 올해 초 구글과 싱가포르의 국부펀드인 테마섹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동남아시아의 디지털 시장 규모는 2025년까지 2,000억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싱가포르·인도네시아·태국·베트남 등은 스타트업/테크 산업 육성을 공표하면서 3D인력(개발자·디자이너·디지털 마케터) 모시기에 나섰다. 때문에 해당 경력이 있거나 이 방면으로 해외취업을 꿈꾸는 이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권씨는 정형화된 인재상에 본인을 짜맞출 필요가 없다고 강조한다. 그는 “중요한 건 업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라며 “각 분야의 전문가로 성장하고 ‘서로 맞춰가며 일하는 것’의 가치를 피부로 느끼고 싶다면 일단 문을 두드리라”고 조언했다.
/김나영기자 iluvny23@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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