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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반란?' 장대리 박과장의 수상한 취미활동

평범한 목요일 오후 8시, 서울 뚝섬 근처의 인적 드문 좁은 골목길. 한참 돌아가던 수제화 공장의 각종 기계 소리와 불빛이 하나 둘 꺼지고 난 뒤 고요와 정적 그리고 썰렁한 기운이 감도는 음침한 동네로 변했다. 뒤늦게 퇴근하려는 몇몇 공장 근로자들이 셔터를 내리고는 서둘러 바쁜 걸음으로 지하철역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낮고 허름한 공장과 상가 건물들 사이를 비집고 2층의 한 창문에서 반짝 불이 켜졌다. 곧이어 정적을 깨는 자동차 몇 대와 택시가 서더니 뜬금없는 직장인 무리들이 웅성웅성 모였다. 그들의 말소리가 고요한 골목 전체에 울린다. 말끔히 정장을 차려 입고 백팩을 멘 직장인들이 내리고는 불빛이 켜진 검은 계단 속으로 사라졌다.
▲직장인들의 영혼이 깨어나는 시간, 20시

높은 빌딩이 우후죽순처럼 솟아있는 직장가도, 오밀 조밀 낮은 빌라들이 모여있는 주택가도 아닌 불꺼진 수제구두 공장들만이 듬성 듬성 있는 이 곳에 대체 넥타이 부대가 들이닥친 이유는 뭘까. 혹시 다단계 업체나 사이비 종교는 아닐까 반신반의하면서 불빛이 새어나오는 2층의 한 상가로 들어선다. 끼익- 낡은 상가만큼이나 오래된 철문과 문틀의 이음새가 맞지 않아 기분 나쁜 마찰음을 낸다. “오셨어요? 저희는 거의 다 모여서 몇 분만 오면 시작할게요.”철문 너머로 보인 이 곳의 모습은 실로 놀라웠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와이셔츠에 정장을 입고 있던 딱딱한 직장인의 모습은 온데 간 데 없고, 박시한 반 팔에 스키니한 청바지 혹은 삐딱하게 눌러쓴 스냅백, NBA 유니폼에 나이키 조던화를 신은 흔히 클럽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다들 탈바꿈되어 있었다. 모든 기계의 전원이 꺼진 컴컴한 공장들이 가득한 바깥 세상과는 달리 이 곳 실내의 모습은 한마디로 요지경 세상이 따로 없다. 고작 철문 하나를 사이에 둔 이 두 세상의 공기 온도가 이렇게 다르다니. 아기 자기한 부엌과 포근한 쇼파가 놓인 거실, 그리고 깔끔한 화장실까지 갖춰진 이 곳은 평범한 레지던스 같다. 단 한 가지만 뺀다면.

이 곳 거실의 한 켠엔 특별한 스테이지가 있다. 사람 키만 한 스피커 2대와 온갖 버튼이 달려 있는 음향 조절 기계 그리고 머리 위로 핀 조명이 비추고 있는 1평 남짓한 그 곳, 바로 DJ스테이지다. 일반 가정집과 클럽의 조화, 여태 보지 못했던 두 공간의 낯선 컬래버레이션으로 연신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살피자 다른 직장인이 말을 걸어온다. “인테리어가 신기하죠? 여기처럼 이렇게 갖춰진 곳이 흔하진 않아요. 저희끼리는 여기를 그냥 공장이라고 불러요. 음식도 만들어 먹고 음악도 만들며 놀고 다 알아서 만들어야 되니까요.” 날이 선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어 꼬깃 꼬깃 걷어 올린 그는 구석에 놓인 백팩에서 커다란 헤드셋과 USB를 꺼내 스테이지에 오른다. “DJ들에게 헤드셋과 USB는 직장인들의 키보드와 마우스와 같은 존재예요. 작업의 기본이죠.” 익숙하다는 듯 믹스셋에 USB를 꽂고 한쪽 귀에 헤드셋을 쓴 그는 조금씩 흘러나오는 음악에 모든 신경과 감각을 집중한다.



“오, 오늘은 원바비(1Bobby)님이 선방으로 가나요?” 쇼파에 앉아 폰을 만지던 김과장도, 부엌을 뒤적이던 박대리도, 여기저기 자유롭게 흩어져있던 직장인들은 디제잉이 시작되자 DJ스테이지 근처를 둘러싸더니 이내 비트에 맞춰 앞뒤로 목을 움직이거나 발을 구른다.

▲‘남들 다하는 뻔한 운동 말고 즐길 수 있는 것’, 퇴근 후 디제잉

“디제잉을 배우기 전까진 주짓수도 해보고, 캘리그라피 등 좀 특이해 보이는 취미활동은 거의 다 해봤어요. 남들 다하는 헬스나 요가 같은 운동은 배우는 게 뻔하니까 한 달이면 금방 질리더라고요.” 한쪽 귀에 헤드셋을 걸쳐 쓴 그는 비트에 맞춰 고개를 까딱까딱 흥을 타는가 싶더니 금세 분주한 손길로 요리조리 음향 이펙트를 조절한다. 요즘 한창 딥하우스 음악에 빠져있다는 직장인 10년차 과장인 백유광 씨는 딥하우스 중에서도 프로그레시브 하우스(progressive house· 덥, 다운템포 등 다양한 요소를 결합해 일반적인 하우스 음악보다 복잡한 구조를 띠는 음악 장르로 다소 무겁고 가라앉은 분위기가 매력인 음악)을 즐겨 듣는다고 했다.

“제 연차 정도 되면 제3의 사춘기를 겪는 것 같아요. 청개구리 같은 청소년기와 회사 짬밥 좀 먹고 방황기가 오는 직장인 3년차를 지나 이제 내 인생 뭐하지라는 시기가 오죠. 웬만한 것에는 흥미를 못 느끼겠더라고요.” 그의 차분한 목소리와는 달리 과감한 그의 손길이 DJ이팩터에 닿자 순식간에 호랑나비 트로트가 딥하우스 멜로디에 믹싱돼 몽환적인 음악이 재탄생됐다.
“전혀 상상도 못했던 두 음악이 섞이니까 신기하죠? 이게 디제잉의 매력인 것 같아요.” 아무리 직종이 달라도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다고, 어딜가나 대한민국 직장인들이라면 겪는 사회생활과 인간관계 그리고 뻔한 페이퍼 업무까지 죄다 복붙한 삶을 살다보면 금세 권태를 겪기 마련이다. 그 결과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신만의 특별한 취미를 가진다는 것 만으로도 힐링된다고 말하는 직장인들이 적지 않다.

▲직장인 2명 중 한 명, ‘(자신을 )사축…돈버는 기계’로 생각해…

지난 8월 취업포털 잡코리아는 직장인 1,152명을 대상으로 취미에 대한 직장인 인식을 묻는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57.8%가 즐겨 하는 취미생활이 있다고 답했다. 반면 취미가 없는 직장인들의 경우 ‘금전적인 여유가 없고(30.7%), 먹고 살기 바쁘며(27.2%), 피곤해서(20.8%)’라는 이유로 취미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꼽았다.





특히 여기서 눈에 띄는 점은 취미 여부에 따라 이후 질문의 응답 차이가 크게 벌어졌다는 것이다. 취미가 없는 사람의 65%가 “내가 돈버는 기계로 느껴진 적 있다”고 답한 반면, 취미가 있는 직장인들의 44.3%만이 동일한 대답을 했다. ‘일상이 무료하고 맥 빠진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란 질문에서 취미가 없는 직장인들의 74.1%가 그렇다고 응답했다.

취미 여부가 일상의 만족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난 셈이다. 그렇다면 직장인들이 선호하는 취미는 뭘까. 직장인 84.5%는 당장 돈을 벌 수 있거나 향후 이직, 창업 등 수입으로 연결되는 소위 ‘돈 버는 취미’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취미생활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에 대한 질문에 ‘일상의 즐거움, 행복감(64.5%)’이 1위, 2위는 ‘건강,체력(33.7%)’로 각각 꼽혔다. 직장인들이 손쉽게 시작할 수 있는 취미생활 TOP 5는 운동(35.3%), 영화 드라마 감상(28.6%), 여행(13.5%), 맛집 탐방(12.2%) 등이 조사됐다.

▲ ‘저녁이 있는 삶…’ 김영란법 때문?

지난 9월 28일부터 시행된 김영란법, 딱 한 달이 지난 지금 취미 생활을 즐기거나 자기계발에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등 직장인들 사이에서 새로운 ‘밤’ 문화가 빠르게 형성되고 있다. 직장인들에겐 ‘암묵적인 회식날’로 정해져 있었던 목요일 저녁약속이 가장 먼저 사라졌고, 업체 미팅과 저녁 식사 약속도 잇따라 줄어 들었다. 김영란법 적용대상자인 공무원 최 모(33)씨는 퇴근 후 곧장 미술 학원들이 밀집한 홍대로 향한다. 공직 특성상 일주일에 3번 이상이던 저녁 술자리가 김영란법 시행 뒤 모두 취소됐기 때문이다. 그간 잦은 회식 때문에 취미생활을 즐길 생각 조차 못했던 그는 김영란법이 시행되자마자 대학 시절 배우고 싶었던 동양화를 배워보기로 했다. 대기업 홍보팀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혜정(30)씨도 최근 스윙댄스 동호회에 가입했다. 그는 “김영란법이 시행되고 난 후, 빽빽하게 달력에 채워졌던 저녁 약속이 사라지니 왠지 모를 허한 기분이 들었다”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즐겁게 살을 빼고 싶다”고 의욕을 불태웠다. 특히 한 포장 물류 회사의 기술 영업팀에서 근무하는 장규일 씨는 “업무 특성상 지방 출장이 잦고 거래처 사람들과 회식이 많아 디제잉 모임이 있는 날이면 갑작스럽게 참석 못 하는 날도 종종 있었다”며 “최근 김영란법 시행 뒤엔 디제잉 커뮤니티에 가입하는 직장인들이 확실히 늘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예전엔 엄두도 못 냈던 중국어 회화, 그래픽 수업 등록은 물론이거니와 퇴근 후 독서 클럽부터 건프라 모임, 스포츠 댄스 그리고 미술학원까지 다방면으로 주경야독(晝耕夜讀)하는 직장인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면서 새롭게 확산되는 新풍속도다.

▲직장인들이 살 맛 나는 사회? 1인 1취미가 보편화된 분위기가 정착되어야…

갓 입학한 대학 새내기들이 동아리에 입성한 것 마냥 신나는 음악 비트에 맞춰 다 같이 방방 뛰기도 하고 아는 노래 구절이 흘러나오면 다 함께 떼창을 부르기도 하며 직장인들의 릴레이 디제잉은 약 3시간 동안 이어졌다. 모임이 끝나면 으레하는 고깃집 뒤풀이를 할 필요가 없었다. 부엌과 냉장고가 마련돼 있었기 때문에 대학생 MT에 온 듯 자유롭게 요리도 하고 시켜먹기도 하고 모든 것이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다 이뤄지는 놀이터 공간이었다. 온갖 영혼과 열정을 탈탈 털어 불태운 직장인들의 일탈 시간은 자정을 1시간 앞둔 채 마무리 됐다. 밤12시면 마법이 풀리는 신데렐라처럼 DJ Zunk는 다시 박 프로그래머로, DJ RG100은 백과장으로, DJ point01은 영업사원의 신분으로 돌아왔다. “어휴 밤공기 한 번 시원하다” 집에 복귀하면 고작 4~5시간 가량 밖에 못 쉬고 다시 회사로 출근해야겠지만 땀과 함께 온갖 스트레스를 배출하고 나니 심신이 개운해졌다. 오늘도 내일도 하루 종일 보고서와 상사와 회의 등과 씨름하는 대한민국 직장인들. 구깃해진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내리고 벗어둔 자켓을 탁탁 털어 다시 입고선 집으로 향했다.



지난 6월 취업포털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남녀 직장인 1,485여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 직장인의 82.8%는 출근만 하면 우울해지는 ‘회사 우울증’, 70%는 번아웃 증후군(의욕적으로 한 가지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적 · 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며 무기력해지는 현상) 등 각종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전문가들은 만병의 근원이라 불리는 직장인들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취미생활 등과 심리적 공백을 메워줄 다른 일에 몰두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실제 직장인들 10명 중 8명은 ‘새로운 취미생활을 가질 의향이 있는 것’으로 조사돼 직장인들이 행복한 삶과 취미 생활에 대한 인식이 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 날 만난 ‘퇴근후 디제잉’ 커뮤니티에서 활동 중인 직장인들은 한결같이 “직장인들이 회사에만 모든 에너지와 시간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자신의 가치를 잃지 않도록 1인 1취미 문화가 확산되길 바란다”고 입을 모았다.

/정가람기자 garam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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