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림을 팔지 않기로 했다. 팔리지가 않으니까 안 팔기로 했을지도 모르나 어쨌든 안 팔기로 작정했다. 두어 폭 팔아서 구라파 여행을 3년은 할 수 있다든지 한 폭 팔아서 그 흔해 빠진 고급차와 바꿀 수 있다든지 하면야 나도 먹고 사는 사람인지라 팔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 내 그림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인사가 있기를 바라겠는가.” (1995년 3월 김환기의 글 중에서)
생전에는 그림이 안 팔린다며 한탄했던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김환기(1913~1974)가 사후 40여 년 만에 제 빛을 발하고 있다. 그의 1970년 작 노란색 전면 점화(點畵)가 27일(현지시간) 홍콩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열린 ‘제 20회 서울옥션 홍콩세일’에서 약 63억3,000만원(4,150만 홍콩달러)에 낙찰돼 국내 미술경매 사상 최고가 기록을 또다시 세웠다. 벌써 4번째 자체 경신이다. 지금 김환기가 재조명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투자 적합성+심미적 가치=지난 2014년 이우환의 ‘점으로부터’가 소더비 뉴욕 경매에서 216만5,000달러(약 26억원)에 낙찰되면서 한국 추상화의 인기는 예견됐다. 미술품을 투자 포트폴리오의 10~15% 이상 포함시키는 슈퍼리치가 늘어나고 신설 미술관이 급등하면서 ‘새로운 투자처’를 모색하는 세계미술시장의 경향이 이를 부추겼다. 최윤석 서울옥션 상무는 “저금리 기조가 지속되고 특히 금융시장 환경이 불안한 가운데 미술품이 안전투자처(safe heaven)라는 인식이 확산되는 점이 고가 미술품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키는 요인”이라며 “미술계를 둘러싼 환경적 요소가 추상화에 대한 수요 증가와 제3세계 미술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렸다”고 말했다. 여기다 김환기와 그의 작품 자체가 갖는 가치도 주목을 끈다. 최 상무는 “미술시장에서 고가에 거래되는 근대 아시아 작가의 공통점 중 하나가 동서양 미술의 조화를 시도하며 고유한 영역을 구축했다는 것”이라며 “중국의 자오우키, 산유 등이 대표적이며 김환기가 그 같은 사례”라고 꼽았다. 세계적 경매회사 크리스티는 지난 26일 이 같은 아시아 작가들만 모아 ‘미술사의 선구자’라는 기획경매를 열었고 김환기와 백남준 등 15명을 집중 조명했다.
◇환기 독주체제=이번 최고가 기록은 지난 6월 케이옥션 경매에서 1972년작 푸른색 전면점화가 54억원에 낙찰된 후 5개월 만에 9억원 이상을 끌어올린 결과다. 산술적으로는 매달 1억8,000만원씩 오른 셈이다. 8년간 한국 미술경매 사상 최고가 기록을 지켰던 박수근의 ‘빨래터’를 제치고 지난해 10월 47억 2,100만원으로 김환기가 처음 정상에 오른 후 48억 5,750만원, 54억원에 이어 63억원대까지 작품가(價)는 급등했다. 이로써 한국 근현대미술의 경매 최고가 톱5는 모조리 김환기가 휩쓸어 독주체제를 구축했다. 지난 9월 서울옥션 경매에서는 2007년 2억원에 낙찰됐던 작품 ‘15-Ⅶ-70 #181’이 다시 나와 6억3,000만원에 재판매됐다. 그림값이 10년 만에 3배 이상 상승했음을 확인시켰다.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내년께 “100억원 기록 경신은 확신한다”는 게 경매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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