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철강이 무너지기 불과 석 달 전인 지난 1996년 10월. 재정경제원(현 기획재정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이유로 국제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에 ‘A1’인 우리나라 국가신용등급을 ‘Aa2’로 상향 조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한 달여가 지난 11월에는 보도자료를 통해 무디스가 정부의 요청보다 한 단계 낮은 ‘Aa3’로 신용등급을 올릴 것이라는 성급한 전망을 내놓았다. 이에 앞선 1995년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우리나라의 신용등급을 ‘A+’에서 ‘AA-’로 한 단계 격상시킨 전례가 있기 때문에 그만큼 자신감이 넘쳤다.
실제 거시지표는 나쁘지 않았다. 1996년 우리 경제의 성장률은 7.6%. 1994년(9.2%), 1995년(9.6%)보다 다소 둔화했지만 위기를 걱정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민간소비(7.6%)를 비롯해 기업 설비투자(9.6%), 건설투자(7.3%)도 견고한 성장세를 이어갔다. 한승수 당시 경제부총리가 1997년 신년사에서 “올해는 개혁·개방을 완성시켜야 하는 해”라고 말한 것도 당시 분위기를 잘 나타낸다. 이 같은 거시지표의 호조는 물가(4.9%)와 경상수지 적자(-238억달러), 그리고 단기외채(외환보유액 대비 211.4%), 고용불안 등에 대한 우려를 덮었다.
한보철강의 부도는 이 같은 한국 경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180도 바꾼 사건이었다. 당장 외채 문제가 불거지면서 ‘외채 망국론’이 고개를 들었다. 1994년 OECD에 가입한 후 그해 12월 외환위기를 겪어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멕시코 꼴이 날 수 있다는 우려가 쏟아졌다.
우리나라의 신용등급 상향을 저울질하던 무디스는 한보 사태 이후 국내 금융기관의 등급을 오히려 강등시켰다. 이후 우리나라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고 난 뒤 S&P를 시작으로 무디스·피치 등도 줄줄이 우리나라 국가신용등급을 깎아내렸다. 연초 800원대 중반이던 월평균 원·달러 환율은 12월에는 1,500원에 육박했다.
1996년과 2016년의 국가신인도는 비슷하다. 2015년 12월 무디스는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Aa3’에서 ‘Aa2’로 한 단계 상향 조정했다. 전체 21개 등급 중에서 세 번째로 높은 등급으로 일본(A1)보다도 두 계단 위다. 지난해 8월에는 S&P가 우리나라 국가신용등급을 무디스와 같은 단계인 ‘AA’로 한 계단 높였다.
하지만 실물지표는 2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늙었다’. 지난해 우리 경제는 2.7% 성장하는 데 그쳤다. 그나마 10.9% 증가한 건설투자가 성장률 절반을 떠받쳤다. 내수 침체로 소비자물가는 1% 상승하는 데 그쳤다.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985억달러), 낮은 단기외채 비율(외환보유액 대비 29.6%), 충분한 외환보유액(3,711억달러)이 그나마 외부 충격에 대한 안전판 역할을 하고 있지만 트럼프노믹스가 시동을 걸면서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다. /김상훈기자 ksh25th@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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