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이 꼭 헌법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의제 아래에서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국가기관과 공무 담임자들이 제대로만 하면 말입니다. 그러나 현상이 기대와 상반되게 나타나면 상황이 헌법을 들춰보라고 요구하게 됩니다. 마치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상대방에게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계약서를 찾아 읽어야 하듯이 말입니다.”
최근 ‘지금 다시, 헌법’이라는 책을 발간한 차병직 변호사는 한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촛불집회 중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제1조 1항이 자주 외쳐졌던 까닭이다. 시민들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 아니고 주권 역시 국민에게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에 헌법 1조 1항과 함께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외쳤다.
따라서 개헌이 진행된다면 이 같은 헌법 1조 1항과 2항이 온전히 녹아 들어가는 개헌이 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최근 국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개헌 논의에 국민들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것 또한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바꾸기 위해 개헌을 하자는 논의가 ‘국회의원들의 권한만 강화시키는 제왕적 총리제가 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원혜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개헌의 핵심은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을 분산하는 데 있지만 이것이 국회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돼서는 안 된다”며 “국회 스스로 과감하게 기득권을 내려놓고 국민들로부터 진정성을 인정받고자 노력하는 것이 먼저”라고 말했다.
하승수 변호사는 “제왕적 대통령제가 문제이므로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를 택해야 한다는 주장은 정치 시스템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얘기”라고 주장한다. 특정한 정당이 국회 과반수를 차지한 상태에서의 의원내각제는 대통령제 못지않은 권력집중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김기식 더미래연구소장은 “이론적으로 대통령제는 3권분립이지만 내각제는 입법부와 행정부가 일심동체여서 사실상 권력이 더 집중되는 구조”라며 “제왕적 대통령제를 막고 권력분산을 이루기 위해 내각제를 도입하자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밝혔다.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의 12년 장기집권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9년 장기집권 가능성 또한 의원내각제 아래에서 나온 결과라는 것이다. 영국의 경우 한 선거구에서 다수 득표자가 당선되는 소선거구제를 기반으로 해 대처 집권 기간 동안 보수당이 40%대 득표를 했음에도 늘 과반수의 의석을 차지해 장기집권이 가능했다는 분석이다. 즉 소선거구제에 기초한 양당제에서는 의원내각제가 오히려 제왕적 총리와 권력집중 가능성이 더 높다는 얘기다.
따라서 제왕적 대통령제를 막고 권력이 분산되는 내각제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의회구성이 민주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김 소장은 강조한다. 의회가 다당제로 연정이 가능한 구조로 돼야 의원내각제가 권력분산에 어울리는 모양새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김 소장은 “지금처럼 사표(死票)가 대거 발생하는 소선거구제가 아니라 투표 결과가 의석 수와 비례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입돼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소선거구제의 경우 양당체제의 기득권을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제도이기 때문에 저항도 크다는 점이다. 지난해 20대 총선의 경우 당시 새누리당은 전국 정당 득표율이 33.50%였으나 실제 의석 비율은 40.66%를 차지했다. 더불어민주당의 경우는 편차가 더 크다. 정당 득표율은 25.54%인데 실제 의석 비율은 41.00%였다. 현형 선거구제로 엄청 이득을 본 셈이다. 반면 국민의당은 정당 득표율이 26.74%였으나 실제 의석 비율은 12.66%에 그쳤다. 정의당도 정당 득표율은 7.23%였으나 의석 비율은 2.0%에 불과했다.
김 소장은 “민주당도 현 소선거구제 아래에서 큰 혜택을 보고 있다”며 “민주당 역시 기득권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회의원들이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을 분산시키자고 하면서 자기 기득권은 내려놓지 않겠다고 하면 안 된다”며 “진정성을 보이려면 비례대표제 수용으로 자기 기득권을 먼저 내려놓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안의식 선임기자 miracl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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