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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인의 예(藝) -<10>이중섭의 황소] 일어나라 일어나라...'힘찬 소'에 담은 민족의 기상

비쩍 마른 몸이지만 꼿꼿한 모습

일제강점기 시련에도 희망 품은

한국인 표상 그려낸 '저항의 붓질'

몽당붓에서 탄생한 현란한 드로잉

흉내낼 수 없는 미학의 격조 담겨

이중섭 ‘황소’ 1953년작, 종이에 애나멜과 유채, 35.5x52cm, 서울미술관 소장 /사진제공=서울미술관




일어나라. 다시 일어나라. 단단한 발로 굳은 땅을 밀어내라. 그러면 너는 우뚝 설 수 있다. 두 무릎에 힘을 주고 머리를 들어라, 황소여. 달려라, 너의 새로운 한 발짝이 새 시대의 시작이다.

이중섭(1916~1956)의 ‘황소’는 옹골찬 골격에 강인한 힘을 내뿜지만 늘 보는 이를 응원하고 기원하게 만든다. 느리게 걸어가던 소는 앞발을 들어 올렸다가 내디디려는 그 찰나, 고개를 돌려 관객을 쳐다본다. 타고난 몸집이 컸으나 삐쩍 말라 살 없는 가죽이 뼈에 찰싹 들러붙었다. 소는 어깨를 올려 뿔로 치받으려는 자세를 취했다. 어떠한 역경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다는 단호한 외침이다.

소는 땅을 누비며 한평생 밭을 갈다 마지막에는 제 살과 뼈까지 사람에게 내어주는 희생의 동물이다. 정신과 전문의 김동화 박사는 “소의 황토색은 대지의 빛깔과 상통하며 그 뿔은 달의 모양과 흡사해 문화인류학·분석심리학적으로 볼 때 어머니에 대한 표상이라 볼 수 있다”면서 “거세되지 않은 수소로 표현된 이중섭의 소는 모성의 상징 위에 힘차고 강인한 자기 자신의 표상을 덧씌운 것”이라고 분석했다.

흰 소의 경우 좀 더 직접적으로 백의민족을 대변한다. 이중섭이 일제강점기 몸담았던 도쿄 유학생 모임의 이름 ‘백우회(白牛會)’는 흰 소라는 이름으로 우리 민족 전체를 대신했다. 이중섭은 이외에도 싸우는 소, 싸워서 피 흘리는 소도 그렸다. 병원을 들락거리며 힙겹게 버티던 1955년 무렵의 이중섭은 분노와 슬픔으로 뒤엉킨 두 마리 소를 푸른 색조 배경 위에 올려 극렬한 싸움을 붙였다. 전쟁의 암울함 속에 우리 민족이 겪어내야 했던 수난과 개인사적 시련을 함축했다. 상흔으로 ‘피 흘리는 소’는 좌절과 절망으로 몸부림친다. 유난히 슬픔에 젖은 두 눈이 인상적이다.

평양에서 태어나 어릴 적 부친을 여의었지만 비교적 유복한 집안의 막내로 자란 이중섭은 ‘행운’에 가까운 학창시절을 보냈다. 일제 시대 사회적 제약의 틈에서도 오산고등보통학교, 일본 문화학원 등 예술을 꿈꿀 수 있는 자유로운 학풍에서 공부할 수 있었고, 졸업 후 학도병으로 징집되지도 않은 졀묘한 시기의 주인공이 바로 그였다. 그의 호는 대향(大鄕). 어머니가 지어준 ‘큰 고향’이라는 뜻으로 초기작 서명에도 종종 등장한다. ‘대향’이든 ‘중섭’이든 그의 사인은 늘 반듯하고 멋스럽게 적은 한글이었는데, 일본에서 출품한 작품에도 꼭 한글로 서명했다.

이중섭은 한국적인 것에 대한 자부심과 노력이 대단했다. 학창시절부터 그리기 시작한 그 만의 ‘은지화’는 고려자기의 상감기법, 금속공예의 은입사 기법을 응용한 셈이다. 은지를 긁어냈을 때 나오는 그 오래되고 “촌스러운 느낌”을 작가는 무척 좋아했다 한다. 특히 평양에서 어린 시절 보고 자란 고구려 벽화의 영향이 컸다. 게다가 유려한 선(線)을 중시한 드로잉, 서예의 일필휘지를 연상하게 하는 필법으로 그려낸 골격은 ‘한국인 이중섭’ 만이 구현한 경지였다.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고구려 고분벽화처럼 오래된 태고의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표면처리법은 매우 의도적인 고전 연구의 결과”라며 “재료에서도 먹을 즐겨 활용하거나 종이의 지속력을 높이기 위해 황톳물을 발라 사용하기도 했다”고 설명한다. 재료뿐 아니라 미학적 측면에서도 그는 풍속화 같은 해학적 표현에 흉내낼 수 없는 격조를 얹었다. 그의 유골을 1년이나 집에 뒀을 정도로 절친했던 동료 화가 박고석(1917~2002)은 “이중섭은 전란으로 인한 극심한 재료난에도 위축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이질적인 예술양식을 극대화했다”고 평가했다.

이중섭의 그림은 전쟁통에 많이 사라졌다. 친구이자 동료였던 시인 구상(1919~2004)은 이중섭의 유작을 유채 200여 점에 은지화 300여점으로 추산했다. 이중섭에 대한 ‘팩트체크’에 수 년을 걸고 철저히 고증한 미술사학자 최열의 2014년 출간 저서 ‘이중섭 평전:신화가 된 화가, 그 진실을 찾아서’에 따르면 작품은 340여점 정도가 전한다. 가뜩이나 작품 수도 적은 이중섭이건만 보통의 서양화가와 달리 캔버스 작품은 거의 없다. 전쟁시기 물자 부족 탓이겠지만 이마저도 상당 부분은 작가의 예술적 선택으로 보인다. 그는 종이를 선호했고, 붓도 새것 보다는 닳고 거칠어진 몽당붓을 좋아했다. 종이 위에 강렬하게 과감하게 칠하는 표현주의적 채색방식을 보여주는가 하면 물감을 겹쳐 칠한 뒤 긁어내거나 연필로 누르듯 드로잉하는 방식이 날카로운 심경과 절망의 몸부림을 그려냈다. 저항적이고 강인하게 느껴지는 붓질은 딱 그만큼의 불안함,힘겨움과도 맞먹는 것이니 희망과 애수가 동시에 가슴을 치는 이유다.

이중섭 ‘투계’ 1955년작, 카드보드에 유채, 28.5x40.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이중섭이 즐겨 그린 동물은 소가 으뜸이지만 닭과 까마귀도 자주 다뤘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투계’는 닭 두 마리가 아래위로 싸우듯 대립하는 그림이다. 두 마리 새가 과격한 몸짓으로 극도의 긴장감을 이룬다. 그러나 둘은 싸우더라도 죽이지는 않을 요량으로 교묘하게, 서로에게 피해를 덜 주지 않으려 애쓰는 면이 엿보인다. 사랑하면서도 싸우는 부부처럼, 만나지 못하는 애타는 절망감이 미움이 된 듯하다. 그러고 보니 마치 태극의 붉은 색과 푸른색이 서로를 휘감은 것 같다. 이 그림은 1955년 미도파화랑에서 열린 개인전 출품작이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경험하던 시기에 제작된 그림이라 일부 평론가들은 이 작품이 남북 분단의 불행한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이듬해 이중섭의 타계 두 달 후에 출간된 1956년 11월호 ‘신미술’은 외로이 떠난 작가의 소식과 함께 이 그림을 특별 도판으로 내놓기도 했다. 물감을 바른 뒤 전통화의 몰골법으로 닭을 그린 다음 다시 잿빛 안료를 바른 다음 다시 나이프로 긁어낸 것이라 색조는 어둡지만 칠이 얇아 투명한 느낌도 풍긴다.

40년에 불과한 짧은 삶과 천재성, 광기까지 더해진 이중섭의 생은 일견 부풀려진 신화적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빈센트 반 고흐가 그러하듯 말이다. 정신병원에서 사망한 이중섭이지만 정신이상까지는 아니었고 신경쇠약에 가까웠다고 한다. 하도 주변에서 미쳤다고 하니 멀쩡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화상’을 그려 돌려본 일화도 유명하다. 그의 경우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깊었다. 그림을 팔아 번 돈으로 일본에 가 볼 요량이었으나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사는 것은커녕 해후조차 불가능하게 된 상황에서의 절망감, 어찌할 수 없는 무능감, 이별에 대한 두려움까지 심신을 병들게 했다.

외롭게 죽은 그를 허망한 풍선에 태운 건 미술시장이었다. 구하기도 어려운 작품값이 치솟았고 위작이 대거 유통돼 홍역을 치렀다. 거품이 꺼진 자리에서 작가와 작품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진 게 이중섭 탄생 100주년 즈음한 최근 몇 년 새 일이다.

종로구 부암동 서울미술관이 소장한 이 ‘황소’도 사연이 많다. 안병광 유니온약품 회장은 영업사원 초년병 시절 비를 피해 뛰어든 남의 집 처마 밑에서 본 이 ‘황소’의 포스터 이미지에서, 비바람 칠지라도 넓은 세상에 한번 뛰어들어보라는 격려와 위로를 얻었고 미술품 수집의 계기가 됐다. 이후 2010년 서울옥션 경매에 나온 이 그림은 이중섭 작품 중 최고가 기록인 35억6,000만 원에 안 회장의 품에 안겼다. 안 회장은 2년 뒤 ‘황소’를 비롯한 평생의 수집품으로 미술관을 열었다.

지금은 유작들이 걸린 미술관이 곧 이중섭의 집이지만, 망우리 공원묘지에 추모비 하나 없는 그의 안식처는 쓸쓸하다. 전쟁통에 비루하게 유지한 삶 속에서 허무와 실존을 얘기했던 그는 초라해도 당당했기에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가 됐다. 생전 이중섭은 바다 건너 떨어져 지내던 일본인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어디까지나 나는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모든 것을 전 세계에 올바르고 당당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오. 나는 한국이 낳은 정직한 화공이라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이중섭 ‘싸우는 소’ /사진제공=서울미술관


이중섭 ‘피 묻은 소’ /사진제공=서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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