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10년 8월 22일 서울 남산 예장자락의 통감관저에서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의 제3대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한일병합 조약 문서에 도장을 찍는다. 대한제국이 국권을 완전히 상실한 경술국치(庚戌國恥)다. 이 조약을 근거로 35년간의 뼈아픈 일제강점기가 시작된다. 일제는 우리나라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남산의 중턱에 조선신궁을 세우고 메이지 일왕을 제신으로 숭배하게 했다. 경술국치 현장인 남산 예장자락은 일제강점기 무단통치의 전초기지가 됐다가 해방 이후에는 중앙정보부가 들어서 100년 가까이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곳으로 남아 있었다.
서울시는 이처럼 오랜 기간 감춰져 있었던 역사의 흉터를 들춰내 남산 예장자락 속 남산길 1.7㎞ 구간을 내년 8월까지 역사탐방길로 잇는다고 21일 밝혔다. 탐방길을 걸으며 쓰라린 국권 상실의 현장을 기억하고, 상처를 치유하자는 뜻으로 아예 ‘국치길’로 이름 붙였다.
국치길은 한일 강제병합 조약이 체결된 통감관저 터에서 시작한다. 이후 1910∼1939년에는 조선총독 관저로 쓰인 곳이다. 이 길은 강제병합 이후 조선총독부가 설치된 서울애니메이션센터로 이어진다. 1921년 전기수리공으로 변장한 김익상 의사가 잠입해 폭탄을 투척한 항일 의거의 현장이기도 하다. 청일전쟁(1894∼1895년)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일제가 세운 갑오역기념비를 거쳐 1925년 일제가 만든 신사인 조선신궁 터에서 국치길은 끝난다.
진희선 서울시 도시재생본부장은 “남산은 해방 이후에도 중앙정보부가 위치해 시민들이 관심을 두고 찾아올 수 없는 곳이 됐다”며 “그러다 보니 과거 이곳에서 우리가 나라를 잃었고, 일본이 식민지배를 위한 시설을 설치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많지 않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국치길의 각 기점에 표지석을 세워 잊혀가는 역사를 꼼꼼히 알려주기로 했다. 표지석은 덕수궁 인근에 있던 국세청 별관 건물을 허무는 과정에서 나온 조선총독부 산하 체신사업회관 건물의 폐콘크리트 기둥으로 만든다. 역사의 ‘파편’을 재활용한다는 취지에서다.
시는 오는 22일 독립유공자들과 국치의 현장을 함께 걷는 역사탐방 행사를 연다. 김구 선생 증손 김용만씨, 이회영 선생 후손인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의원과 윤봉길·장준하·백정기 선생 후손이 참석한다. /김민정기자 jeo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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