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가 항암제의 효과를 공익적 관점에서 재평가해 퇴출시키는 시스템이 없어 막대한 건강보험 재정이 낭비되고 있다.
최근 개발된 항암제들은 임상시험에서 안전성·유효성을 입증해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허가 관문을 통과하면 월 수백만에서 많게는 1,000만원에 이르는 고가에 판매된다. 고가의 항암제라도 건강보험 적용(급여목록 등재)을 받게 되면 건강보험 재정에서 약값의 95%를 부담하고 환자는 5%만 본인 부담한다. 이 때문에 대형 제약사와 환자단체에서는 고가 항암제가 건강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도록 애를 쓰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과정을 거쳐 건강보험 적용을 받게 된 일부 고가 항암제는 실제 의료 현장에서 임상시험에서 보여줬던 만큼의 치료 성적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기존 약제에 견줘 효과가 미미한 경우도 있다.
췌장암 치료제로 사용됐던 엘로티닙 성분의 먹는 표적항암제가 대표적인 사례다. 제약사 주도 임상시험에서 전이성 췌장암 환자에게 젬시타빈 주사제와 함께 엘로티닙을 복용한 환자는 젬시타빈 단독 투여군에 비해 통계적으로 유의한 2주간의 생존기간 연장 효과를 보였다. 이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엘로티닙은 빠르게 건강보험 적용을 받게 됐고 고가의 항암제가 통상 진료 현장에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난 2016년 한국보건의료연구원(NECA)이 실제 처방 받은 환자의 비용·효과를 분석한 연구에서는 시판 전 임상시험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 NECA의 분석 결과 전체 생존기간은 엘로티닙을 사용한 환자에서 210일, 사용하지 않은 환자에서 207일로 유의미한 개선을 보이지 않았다. 12개월 생존율도 각각 27.0%, 27.3%로 차이가 없었다. 1인당 430만원의 비용을 더 지불했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던 셈이다.
시판 전 임상시험과 시판 후 의료 현장에서의 효과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시판 전 3상 임상시험의 환자 선정기준이 너무 까다롭기 때문이다. 제약회사는 임상시험 치료 성적이 잘 나오도록 활동도가 나쁜 환자, 뇌 전이가 있는 환자, 고령의 환자, B형간염 환자 등을 임상시험에서 제외한다. 3상 임상시험에서 안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경우 제약사에 타격이 크기 때문이다.
제약사들은 임상적 효과가 뚜렷한 환자를 대상으로 한 시판 전 임상시험을 토대로 항암제 시판허가를 받는다. 하지만 시판허가 후, 특히 건강보험 급여목록 등재 후에는 안전성·유효성 데이터가 전혀 없는 이런 환자들에게도 항암제가 사용된다. 시판 전 임상시험 디자인과 임상 결과는 일부만 공개되기 때문에 의사들도 이를 속속들이 알 수 없다. 시판허가를 받은 항암제는 의료 현장에서 모든 환자에게 처방되는 경우가 많아 효과는 그만큼 떨어지고 부작용을 호소하는 환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건강보험 급여 등재 후 고가 항암제의 유효성·안전성을 재평가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프랑스·스웨덴·호주·네덜란드·캐나다 등에서는 고가 항암제에 대해 보험 등재 후 임상자료를 수집해 재평가를 하고 있다. 효과가 없는 고가 항암제는 퇴출시킨다.
하지만 국내에는 이런 재평가 및 퇴출 시스템이 전무하다. 이런 시스템을 도입하려면 공익적 목적의 연구자 주도 실용 임상시험을 활성화하고 영국처럼 건강보험료의 일정액을 기금으로 조성하는 등 재원 마련이 필요하다. 해외의 재평가 시스템을 참고해 허가된 항암제의 장기 임상 효과를 확인하고 사용실태를 모니터링해야 할 것이다.
효과가 좋은 고가 항암제를 신속하게 도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익적 관점에서 고가 항암제의 유효성·안전성을 지속적으로 재평가해 효과가 없으면 퇴출시키는 객관적 시스템 구축이 시급하다.
김범석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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