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전증(腦電症)은 뇌 신경세포의 기능적·구조적 이상으로 과도한 전기 방출이 일어나 발작(경련)이 반복해 일어나는 만성적인 이상 상태를 말한다. 연간 14만명가량이 진료를 받고 있지만 대한뇌전증학회는 인구의 0.5~1%인 25만~50만명이 뇌전증을 앓고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우리나라의 연령대별 뇌전증 진료인원은 20대가 15%로 가장 많지만 성인병·암 등과 달리 모든 연령대에 8~15% 안팎씩 고르게 분포돼 있다. 남성은 20대(16%), 여성은 40대(14%)가 가장 많다. 인구 10만명당 진료인원은 남성의 경우 70세 이상(447명), 10대(380명), 20대(342명) 등의 순이고 여성의 경우 10대 및 70세 이상(각 323명), 20대(262명) 순이다.
발작 증상은 과도한 전기 방출이 뇌의 어느 부위에서 시작돼 어떤 기능을 하는 뇌 부위로 퍼져가느냐에 따라 다양하다. 주변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가볍게 넘어갈 수도,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구토를 동반한 사지경련 등이 일어날 수도 있다. 고개·눈을 옆으로 돌린 채 멍한 상태로 침을 삼키는 소리를 내거나 손을 만지작거리며 껌을 씹거나 중얼거리는 듯한 행동을 반복할 수도 있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생길 수 있고 1년에 한 번 정도 드물게 나타나기도 한다. 지속시간도 환자에 따라 수초~수십분으로 다르다. 언제 발작이 일어날지 모르고 도로횡단·운전·운동 중이라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발작의 원인은 다양하다. 분만 과정에서 뇌가 산소 공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 손상됐거나 출생 후 머리를 다친 경우, 선천적·유전적 뇌 이상과 발달 이상, 뇌염·뇌수막염 등 감염성 질환, 뇌졸중·뇌종양의 후유증, 약물·알코올 중독에 따른 금단 증세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따라서 발작을 초래한 원인을 찾고 뇌전증인지 다른 원인으로 인한 발작·실신인지 구분해 적절한 치료를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저혈당증·전해질장애 등 대사이상으로 인한 뇌병증, 스트레스·우울증으로 인한 정신질환인 가성발작 등은 뇌전증과 증상이 비슷하다. 3개월~5세 어린이에게서 열이 있을 때만 경련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열성 경련이지 뇌전증은 아니며 나이가 들면 사라진다.
이상건 서울대병원 신경과 교수는 “뇌전증인데 다른 질환으로, 뇌전증이 아닌데 뇌전증으로 오진해 잘못된 치료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아 환자의 이야기·병력과 검사 결과를 잘 챙겨 정확한 진단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며 “뇌전증 환자 3명 중 1명이 심각한 우울·불안증을 겪고 있는데 우울증을 치료하면 뇌전증 증상도 개선된다”고 말했다.
신경세포의 흥분과 발작을 억제하면서 부작용이 적은 항경련제 신약도 약물치료 효과를 높이는 데 일조하고 있다. 특히 SK바이오팜이 국내와 미국 등에서 임상시험하고 있는 뇌전증 치료 신약은 약을 먹어도 2개월 동안 8회 이상의 발작을 보이는 ‘약물 난치성 환자’의 55%에게서 발작횟수가 반 이하로 줄고 일부는 완치돼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이르면 내년 중 시판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뇌전증 환자의 발작을 정확하게 잡아내 의료진에 알려주는 엠파티카의 스마트워치 ‘엠브레이스’를 의료기기로 승인했다.
박용숙 중앙대병원 신경외과 교수는 “뇌전증으로 진단받은 환자의 40%는 항경련제를 2~3년 이상 먹으면 완치되고 25%는 계속 복용할 경우 발작이 줄어드는 등 증상이 완화된다”며 “약이 안 듣는 35%의 환자 가운데 상당수도 수술로 완치 또는 증상완화를 기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수술은 과도한 전기를 방출하는 뇌 부위를 잘라내거나 방사선 조사(감마나이프 수술), 뇌의 깊은 부위나 목을 지나는 미주신경에 전선을 넣어주고 미세한 전류를 흘려주는 신경자극술을 주로 한다. 신경자극술은 증상을 완화하고 이상 전기신호를 내보내는 원인 부위를 찾아내는 데 도움이 된다.
불안·수면부족·알코올·스트레스 등 발작·재발 위험을 높이는 요인도 관리할 필요가 있다. 알코올은 발작을 유발하거나 항경련제의 혈중 농도가 적절히 유지되는 것을 방해해 발작을 심하게 할 수 있다.
홍승봉 대한뇌전증학회장(삼성서울병원 교수)은 “수술이 필요한 뇌전증 환자의 뇌 수술 부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한 뇌 자기(磁氣) 변화 검사장비(MEG·30억원)의 경우 국내에 한 대도 없어 중국·일본에서 검사를 받고 오는 사람도 적지 않다”며 “수익이 나는 장비가 아닌 만큼 정부 차원에서 구입·운영비를 지원하고 국내 병원들이 함께 사용할 수 있게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임웅재기자 jaeli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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