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서열 17위인 LS그룹의 구자열 회장은 지난달 9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정보기술(IT) 전시회 ‘CES 2018’을 둘러보고는 “첨단 기술 분야는 물론 IT와 제조업 등 모든 산업 분야에서 중국이 한국을 이미 추월했다”며 혀를 내둘렀다. 구 회장은 “우리가 중국에 배울 점이 많다”고도 했다.
중국은 과감한 규제 완화와 대대적인 연구개발(R&D) 투자, 전방위적인 고급인력 확보 노력을 앞세워 미래 산업을 선점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과거 ‘세계의 공장’ 역할에만 만족하던 데서 고부가가치 기술 확보에 직접 뛰어들었다. 중국뿐 아니라 미국과 일본·유럽 등 선진국들도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자국을 먹여 살릴 산업 육성을 놓고 경쟁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 산업 구조는 10~20년 전에 멈춰 있다. 4차 산업혁명 진입 문턱에 섰지만 여전히 반도체 등 잘나가는 일부 산업에 안주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넥스트(next)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우리 산업이 직면한 위기의 핵심으로 지목하고 있다. 반도체 등 돈 잘 버는 특정 산업에 의존하고 안주하려는 분위기에 중장기 전략과 실행력 부재, 꿈쩍 않는 규제까지 더해진 결과다.
◇미래 기약 못하는 주력 산업=삼성전자는 지난해 매출 239조원, 영업이익 53조6,450억원의 역대 최대 실적을 거뒀지만 초조하다. 사상 최대 실적을 견인한 반도체 호황 이후를 보장할 수 없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급성장하는 전장 산업과 인공지능(AI) 기술 개발에 본격 발을 들여놓았지만 글로벌 기업들과 견줬을 때 아직 시작 단계다. SK하이닉스도 메모리반도체 쏠림을 완화하기 위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 강화에 나섰지만 본격적으로 이익을 내려면 수년이 필요하다. 초(超)프리미엄 전략으로 지난해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한 LG전자 역시 창업 때부터 해온 백색가전 사업에 이익이 집중돼 있다.
자동차 산업은 되레 경쟁력이 후퇴하고 있다. 제너럴모터스(GM)의 한국 시장 구조조정 결과에 따라 내년에는 자동차 생산국 6위 지위를 멕시코에 내줄 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미래 성장동력에서의 경쟁력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최근 차세대 수소전기차 ‘넥쏘’를 선보이며 미래차 시장 공략 청사진을 공개했지만 패권을 잡기에는 갈 길이 멀다는 평가가 많다. 미래 모빌리티를 주도할 만한 핵심 기술 개발을 위한 토대가 부족하다는 점도 뼈아프다. 자율주행 분야만 놓고 보더라도 이스라엘 모빌아이, 미국 엔비디아 등 완성차 업체가 아닌 부품 업체들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조선업도 미래 담보가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구글은 자율운항 선박에 필요한 선박 지능형 인식 시스템 개발을 위해 롤스로이스와 손잡았고 중국은 아예 광둥성에 여의도 면적의 265배에 이르는 771㎢ 규모 자율운항 선박 시험 공간을 마련했다. 조선 강국으로 군림했던 한국은 미래 준비는커녕 구조조정 늪에 허덕이고 있다.
기존 주력 산업이 이처럼 주춤하고 있지만 바통을 이어받을 만한 미래 산업의 싹도 제대로 자라지 않고 있다. 드론(무인항공기)이 대표적이다. 드론은 4차 산업혁명의 총아로 불리는 미래 핵심 산업이다. 하지만 이 시장은 중국 드론 제조사인 DJI가 전 세계 70%를 장악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네거티브 방식 적용 등 파격적인 규제 완화 정책으로 산업 육성의 길을 터준 결과다. 우리나라는 갖은 규제에 발목이 잡혀 드론 산업의 씨앗조차 제대로 뿌려지지 못하고 있다.
◇규제 풀고 기술 고도화해야=전문가들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보다 많은 규제(박용만 대한상의 회장)”를 과감히 철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산업 구조가 비슷한 독일 수준으로 기업 규제가 풀리면 국내총생산(GDP)이 1.7% 올라갈 것으로 추정했다. 한 경제단체 고위관계자는 “각종 규제가 사방에 펼쳐져 있어 기업들이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기보다는 기존 사업에 안주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며 정부와 정치권의 규제 완화를 호소했다.
일부 산업에 집중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유망 산업으로 보다 활발하게 전파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산업응집력 지수는 25위로 20년 전의 21위보다 4단계 하락했다. 산업응집력 지수는 기술 수준과 경쟁력 있는 제품이 얼마나 연결됐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순위가 떨어졌다는 것은 반도체와 같은 고부가 산업이 다른 산업으로 확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조철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우리나라 기업들이 기존에 강점을 가지고 있는 기술을 더욱 고도화하는 데 집중해야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한재영·조민규기자 jyha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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