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철강 수입품 25% 관세 부과 방안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나프타) 재협상의 ‘바기닝 칩(협상용 카드)’으로 활용하겠다고 천명하면서 우리 통상당국에도 비상이 걸렸다. 국가면제와 품목제외 적용을 받기 위해서는 자동차 시장 추가개방이나 원산지 기준 강화 등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협상에서 미국 측의 요구를 두 손 놓고 들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미국이 ‘화약고’인 농산물을 건드릴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8일(현지시간) 산업통상자원부의 한 관계자는 “앞으로 232조와 관련된 추가 협의를 미국과 하는데 한미 FTA 개정 협상과 시기적으로 겹치니까 상호 영향을 미치는 것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백운규 산업부 장관은 9일 서울 강남구 그랜드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열린 ‘중견기업연합회 최고경영자(CEO) 조찬 강연회’ 직후 기자들과 만나 “(철강) 관세가 한미 FTA 협상 기간과 같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그 틀 안에서 미국과 많이 협의해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협상으로 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미국은 NAFTA 재협상에서 철강 관세를 볼모로 삼겠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천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규제 조치 서명식에 앞서 열린 각료회의에서 나프타 재협상을 거론하며 “만약 우리가 합의에 도달한다면 두 나라에 관세를 부과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오는 4월부터는 멕시코가 7월 있을 대선 모드에 돌입하는 만큼 NAFTA 재협상 결론을 내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 3월을 넘길 경우 11월 미국 중간선거까지 결론을 내는 게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FTA와 더불어 ‘나쁜 무역협정’으로 꼽은 나프타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배수진을 친 것으로 풀이된다.
문제는 이 불똥이 한미 FTA로 자연스럽게 옮겨붙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당장 이달 중순께 미국 워싱턴 D.C에서 한미 FTA 개정 3차 협상이 열릴 예정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서명 이후 관세 부과 안이 시행되기까지 유예된 시간은 단 15일에 불과하다. 더욱이 대안을 제시하는 ‘안보협력국’과 관세 부과 면제를 협상하는 창구는 한미 FTA 개정 협상의 파트너인 미 무역대표부(USTR)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예외조항을 양자협상에서의 바기닝 칩으로 쓰고 있다”며 “중국과 유럽연합(EU)이 보복카드를 얘기하고 있지만 미국이 가진 더 강력한 카드가 많이 있기 때문에 쉽게 나서지 못할 텐데 우리는 거기에 비하면 대응할 수단이 더욱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번 위기를 무사히 넘겨도 파고는 계속 이어질 수 있다. 미국은 철강 관세 부과안 협의차 미국을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경제 책사인 류허 중국 중앙경영도소조 판공실 주임에게 무역흑자를 1,000억달러 줄이라고 요구한 것으로 알려진다. 미국은 무역법 122조에 근거해 최장 150일 동안 모든 수입품에 15%의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 철강 관세와 똑같은 일이 다시 한 번 반복될 수 있는 셈이다. 미국 정부가 중국을 겨냥해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지식재산권 문제에서 우리가 딸려 들어갈 가능성도 높다.
자칫 전선이 우리 정부가 ‘레드라인’으로 선을 그어놓은 농업 분야까지도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미 미국은 지난해 한미 FTA 공동위원회 특별회기 1차 회의에서 농산물 추가 개방을 요구한 바 있다. 또 자동차시장 추가개방과 의약품 약가 보장, 원산지 검증 기준 강화 등도 별 어려움 없이 얻어갈 수 가능성도 높다.
일단 정부는 예외 품목을 확보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날 산업부는 민관합동 긴급대책회의를 열고 미 당국과의 협의도 진행하겠지만 이와 병행해 유럽연합(EU) 등 주요국과의 공조를 통해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미국과의 경제외교 채널을 복원하면서도 다자주의 틀을 활용한 전략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보복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보복의 확신 시대’인 만큼 스마트한 보복을 하면서도 이슈별로 WTO와 같은 다자체제를 통한 공조를 잘 활용할 수 있는 현실주의적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세종=김상훈기자 ksh25th@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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