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 상호교류의 해’ 행사 통해
다양성·포용의 영국 예술 소개
쌍방향 문화 교차·융합 이끌어
마틴 프라이어(62) 주한영국문화원장은 한국 문화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깊이를 자랑한다. 주말이면 서울부터 지방까지 다양한 도시를 누비며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몸으로 배우고 걸쭉한 콩국수와 한국 사람도 그 참맛을 알기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평양냉면을 즐기는 파란 눈의 영국 신사다. 지난 2013년9월 한국에 부임, 임기를 약 6개월 남겨둔 프라이어 원장이 일방향의 문화 전수가 아닌 쌍방향의 문화 교차와 융합을 상징하는 인물이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익숙한 것도 낯선 시선을 통해 재해석하면 달리 보이는 법이다. 그는 이 깨달음을 문화원 주요 사업에 녹여냈다. 대표적인 사업이 지난해 2월 시작, 이달 말 종료를 앞둔 ‘2017-2018 한영 상호교류의 해’ 행사다.
14일 서울 중구 정동 주한영국문화원에서 만난 프라이어 원장은 이번 행사의 가장 큰 성과는 “한국인들에겐 생소한 영국의 현대 예술가들과 한국 예술가들의 만남을 통해 영국 문화의 정수를 소개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꼽았다.
문화원은 1년간 서울을 비롯해 부산, 대전, 전북 전주 등 전국 17개 도시에서 공연, 전시, 영화, 건축, 문학, 과학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최신 영국 문화와 한국 아티스트의 만남을 시도했다. 이 기간 진행한 행사만 184개에 달한다. 기존의 교류 행사와 달랐던 점은 양국 아티스트의 화학적 융합과 컨텍스트의 상호 번역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불협화음의 전시’가 대표적이다. 프라이어 원장은 “영국문화원 소장품 중 사회 변화와 참여를 담아낸 작품들을 양국의 큐레이터가 엄선해 선보였는데 당시 한국엔 촛불혁명의 열기가 남아 있어 더욱 강렬한 메시지를 남길 수 있었다”며 “인종, 인권, 페미니즘, 노동자의 권리 등의 이슈에 다양한 목소리를 내온 영국의 아티스트와 새로운 사회를 염원한 한국 관객이 맞닿아 서로의 목소리를 확인할 수 있는 행사였다”고 강조했다.
여왕, 셰익스피어, 신사의 나라 등 영국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대부분 전통, 격식, 고전에 머물어있다. 그러나 프라이어 원장이 내세우는 현대 영국 문화예술의 정수는 다양성(diversity)과 포용(inclusion)이다. 최근 1년간 한국인들에겐 생소하지만 현대 영국 예술의 문법으로 유럽 무대에서 주목받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대거 소개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영국은 한국보다 앞서 도시 쇠퇴와 고령화를 겪었고 이를 예술로 풀어내는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며 “문화를 통한 도시재생 사례인 셰필드와 부산 예술가의 만남을 주선한 것, 노인층과 장애인 관객을 겨냥한 새로운 예술의 교류를 시도한 것도 양국의 문화가 대화할 수 있는 소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소개했다.
그래서 한·영 상호교류의 해 폐막작 타이틀은 ‘아름다운 다름’이다. 영국의 장애인 예술공연 단체인 마크 브루 컴퍼니와 국내 대표 안무가 김보라의 신작 ‘공·空·Zero’을 시작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 무용수로 구성된 세계적인 무용단 칸두코 댄스 컴퍼니와 시각장애인부터 전신장애인, 할머니 등의 몸으로 인체의 미학을 탐구해온 안은미의 ‘굿모닝 에브리바디’ 등이 잇따라 관객을 만난다. 프라이어 원장은 “장애인이나 노인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니라 팔이나 다리가 없어도 최고 수준의 예술을 보여주는 무용수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우리는 심미적 즐거움을 얻고 감화될 것”이라며 “장애나 노화로 몸의 기능이 저하된다는 것이 참여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패럴림픽과 이번 폐막공연을 통해 자연스럽게 전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투 운동 무조건 덮기 대신 사회적 숙고 필요”
피카소·우디 앨런도 여성관 심각
문제된 예술인 죄는 확실히 묻되
업적 지우기 앞서 충분한 논의를
그는 지난해를 기점으로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미투 운동에 대해서도 다양성과 포용의 관점에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프라이어 원장은 “우디 앨런은 숱한 문제를 일으켰지만 여전히 전 세계인에게 감동을 주는 영화를 내놓고 있고 우리가 추앙하는 피카소 역시 심각한 여성관을 지녔던 인물”이라며 “시대의 가치가 변하면서 예술도 변해야겠지만 그들을 교과서에서 삭제하고 문학관을 폐관하는 등의 삭제조치는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문제가 된 예술인들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함께 확실하게 죄를 묻되, 그들의 업적을 역사에서 지우기 이전에 충분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살아온 세상은 갈등을 통해 새로운 관용과 인정의 가치를 얻게 됐고 한국의 촛불혁명 역시 공적 삶에 대한 높은 잣대, 한국인들의 달라진 부패 인식을 반영한 사건”이라며 “그릇된 행동을 일삼은 일부 예술가들 개인과 그들의 작품에 어떤 권위를 부여할지에 대해 우리 역시 균형점을 찾아가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약 4년 6개월 한국에 살면서 그는 달항아리 수집가가 됐다. 사람의 손을 거쳐 탄생한 도자기는 공장에서 빚은 것처럼 완벽한 좌우대칭은 않지만, 작품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장인들의 특성을 담아내 고유하다는 점은 프라이어 원장을 매료시켰다.
프라이어 원장은 “한국을 떠날 때 내 짐 가방 안에는 분명 달항아리가 들어있겠지만 실제로 내가 담아가는 것은 식민국가에서 전쟁을 거쳐 부유한 나라가 되기까지 쌓아온 한국의 역사와 에너지, 가치를 보존하면서도 끊임 없이 전진하려는 에너지”라며 “영국에 돌아가서도 한국 문화를 전파하는 홍보대사 역할을 하고 싶다”며 웃었다.
한편 그는 오는 8월 임기를 마치고 영국문화원 중동아프리카(MENA)지역 부본부장으로 부임한다.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사진=이호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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