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열린 미술품 경매에 출품된 이중섭의 ‘소’가 47억원에 낙찰되며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이는 해당작품의 추정가를 웃도는 가격인 동시에 지난 2010년 6월 경매에서 35억6,000만원에 낙찰된 이중섭의 ‘황소’보다도 10억원 이상 웃도는 낙찰가였다. 물론 작가의 최고가 기록은 경신됐고 이중섭의 이름 석 자는 우리나라 미술시장에서 최고가 1위부터 5위를 독차지한 김환기를 제외하고 가장 비싼 작가로 적히게 됐다. 싸우려고 어깨를 들어 올린 소를 그린 ‘소’는 세로 28.2cm 가로 45.3cm의 작품으로, 김환기의 전면점화와 비교하는 아주 작은 그림이다.
이번에 낙찰된 ‘소’는 소머리가 이례적으로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 뿔과 이마, 바닥의 붉은색은 격렬한 싸움으로 피를 흘리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앞발을 살짝 들어올린 찰나에 돌린 고개는 관객을 향하고, 옹골찬 골격에 강인한 힘을 뿜어내지만 삐쩍 말라 살이 없는 가죽이 뼈에 붙어 처절한 인상이 특징이다. 불쑥 들어올린 어깨와 금세 뿔로 받으려는 자세에는 이기겠다는 의지가 오롯이 전해진다. ‘중섭’ 사인이 왼쪽 상단에 있으나 제작연도는 쓰여있지 않다.
이 작품이 이렇게 비싸게 팔린 이유가 도대체 뭘까. 박수근과 함께 한국 근대 미술사의 양대 거목이라는 이름값일까? 시장에서는 희소성을 이유로 들고 있다. 근현대 미술품 중 대표작으로 꼽힐 만한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이중섭의 소 그림은 아홉 점 정도 밖에 남지 않는데 대부분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어 거래 할 수 있는 작품이 시장에 나오기 어렵기 때문이다.
1916년 평남 평원 대지주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이중섭은 오산학교 시절, 미국 예일대에서 공부하고 파리에서 활동했던 스승 임용련을 만나게 되는데 그 당시 대부분 작가들이 일본에서 유학했던 것을 감안하면 무척이나 드문 이력이었다. 임용련은 이중섭에게 습작을 중요성을 항상 강조했는데 여기에 영향을 받은 이중섭이 다수의 드로잉을 남겼다고 알려져 있다. 이중섭이 본격적으로 미술공부를 시작한 것은 1935년 떠난 일본 유학시기였고, 이 때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를 만나게 된다. 1944년 이중섭은 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 이듬 해 마사코가 한국으로 와 둘은 결혼식을 올린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피난을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제주로 피난하게 되지만, 결국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마사코는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가게 된다. 그 후 1953년 도쿄에서 함께 지낸 5일을 끝으로 이중섭은 가족과 영영 이별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절절한 그리움과 생이별의 아픔은 이중섭이 걸작을 남기게 된 계기가 된다. 첫 아이를 잃은 이중섭은 “아이가 가는 천당 길 홀로 심심할까봐 또래 꼬마들을 그려주었다”고 하며 하루에 수십 장씩 아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또 “피란을 간 제주도에서 네 식구가 단란하게 살았던 10개월 동안은 내 생애 마지막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라며 일본으로 떠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그림을 그렸다.
총 300여 점으로 알려진 이중섭의 작품에는 소뿐 아니라 아이, 가족, 물고기, 게, 달, 새, 연꽃 등 전통소재들이 등장하고 다양한 기법과 소재로 작업되었다. 너무 가난해 종이를 살 수 없었던 이중섭은 담배 내부 포장지인 은지를 활용했고, 합판, 종이, 책의 속지에도 그림을 그렸다. 또 유화물감을 비롯해 연필, 크레파스, 철필, 못, 송곳까지 이용해 은지화, 편지화, 삽화 및 스케치 등 다양하고 실험적인 작업을 지속했다.
오는 21일 열릴 케이옥션 3월 경매에도 이중섭의 작품 두 점이 출품됐다. 앞뒤 면에 그린 양면화 ‘큰 게와 아이들’, ‘달과 게’는 1950년대 제주도 피난 이후 작품으로 추정된다. 앞면 작품 ‘큰 게와 아이들’은 세 아이가 자신보다 큰 게와 씨름을 하고 있는 데 열심히 게를 잡고 있는 아이들의 천진한 모습에서 작가 특유의 장난기가 드러난다. 뒷면의 작품 ‘닭과 게’는 닭과 게, 꽃이라는 예상 밖의 조합이 초현실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중섭의 부인인 마사코가 남긴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먹을 것이 부족해서 날마다 바닷가에 나가 게를 잡아먹었는데 그 게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게를 그린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또 다른 작품 ‘가족과 동네 아이들’은 은지화 작품이다. 제주도에서 부산으로 돌아온 이중섭은 술집을 전전하면서도 붓을 손에서 놓지 않았는데 이 시절 은지화가 등장한다. 가족들과의 이별 후 절망에 빠졌던 이중섭은 예술가들이 모이는 다방을 드나들며 큰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 어려운 시기에 틈틈이 그림을 그린 이중섭은 캔버스나 유화와 같은 재료를 구하기 어려워 양담배 포장지인 은박지에 철필로 은지화를 남기거나 합판과 작은 종이 쪼가리에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림은 내게 있어서 나를 말하는 수단밖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고 말한 이중섭. 그림을 통해 그의 삶을 바라본다.
/케이옥션 수석경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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