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기기에 앉은 두 사람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 비명과 환호가 섞인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두 사람이 앉은 좌석은 종종 큰 움직임을 보였지만 월미도에 있는 디스코팡팡처럼 극단적이진 않았다. 그럼에도 이들의 목소리만 들어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진짜로 두 사람이 놀이기구를 타고 있다고 착각할 법했다. 그러나 두 사람 앞에 있던 사람들은 이런 ‘리액션’이 납득간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옆에 있던 진행요원은 “오늘 오신 분들 중에 리액션이 가장 크신 것 같다”며 흥을 돋궜다. 두 사람은 VR 안경을 쓰고 가상으로 롤러코스터를 타는 체험을 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최대 VR(가상현실)·AR(증강현실) 전시회’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서울 VR·AR EXPO 2018’은 4월 19일 개막하며 업게 스타트업과 관련 업체들의 성과물을 보려는 사람들로 성황을 이뤘다. 가상현실이란 말 그대로 실제와 비슷하지만 현실이 아닌 상황, 즉 ‘가상현실’을 구현해내는 기술을 뜻한다. 가상현실하면 흔히 떠올리는 거대한 안경을 쓰면 그래픽으로 구현된 가상현실을 몰입감 있게 체험할 수 있다. 증강현실은 현실에 3차원 가상 이미지를 올리는 기술이다.
홀의 중앙 끝으로 가보니 큼지막한 큐브가 여러 대 설치돼 있었다. 국내 가상현실 플랫폼 개발사인 GPM이 만든 VR 테마파크인 ‘몬스터 VR’이다. 안에 들어가면 게임은 물론이고 각종 영상과 아동 심리치료 콘텐츠까지 가상현실로 체험할 수 있다. 큐브 안에선 방문객들이 커다란 안경을 쓰고 조이스틱 비슷한 물건을 든 채로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이상호 GPM 영업1팀장은 “현재 인천 송도에 몬스터 VR 테마파크를 두고 있으며, 앞으로는 건대 스타시티점 등에도 입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VR 안경이나 모니터 등 ‘하드웨어’만으론 가상현실 기술이 완성되지 못한다. 장비와 연동할 수 있는 ‘콘텐츠’와 ‘인터랙션(상호작용)’이 가능해야 가상현실은 완성된다. GPM은 독자적인 VR 플랫폼을 통해 다른 개발사들의 콘텐츠까지 수용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안성원 GPM 사업부 매니저는 “우리 회사나 다른 개발사로부터 콘텐츠를 받은 후 이것이 우리 큐브와 맞는지 확인한 후 리스트에 추가한다”며 “리스트에 들어간 게임이나 콘텐츠는 모두 몬스터 VR에서 이용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플랫폼을 구축함으로써 다양한 콘텐츠를 확보한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GPM은 PC방 관리프로그램을 만드는 업체인 미디어웹과도 협업해 PC방에 게임 전용 몬스터 VR 부스를 설치한다는 계획이다.
왼쪽 끝엔 콘텐츠진흥원의 지원을 받은 업체들이 모인 섹션이 있다. 그 중 노래방 박스 앞에 사람들이 줄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TJ미디어와 협업해 ‘가상현실 노래방’을 만든 루시드드림(Lucid Dream)이 있는 곳이다. 이 노래방에서 남성 아이돌 그룹인 제이비제이(JBJ)의 노래를 선곡한 채로 안경을 끼면 눈 앞에서 JBJ 멤버들이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등의 경험을 할 수 있다. 점수에 따라 멤버들의 반응도 달라진다. 가령 점수가 낮게 나오면 멤버들이 노래를 부른 사람을 토닥이는 장면이 나오는 식이다. 최성기 루시드드림 CSO는 “다른 연예기획사와 연예콘텐츠기업 등과도 접촉해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곡의 성격에 맞춰 마치 실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듯한 체험도 할 수 있다. 힙합을 선곡하면 힙합 오디션 무대에서, 발라드를 고르면 결혼식 축가에서 노래를 부르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곡이랑 영상을 미리 맞춘 것이다. 여기에도 각각 설정이 있다. 예컨대 랩을 선곡하면 처음에 힙합 프로듀서가 나와 명함을 주면서 “잘 부탁해”라고 말한다. 그러다가 점수가 낮게 나오면 “누가 얘 불렀냐”며 처음에 반갑게 인사하던 프로듀서가 돌변하는 식이다. 가상현실 노래방은 홍익대, 건국대, 인하대에서 시연된 바 있다.
다시 중앙으로 가보니 여성 일러스트가 즐비한 부스가 나타났다. 위에는 풍선이 대롱대롱 달려 있어 마치 파티룸같았다. 가상현실판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미연시) 스마트폰 게임을 만든 오아시스VR의 부스였다. 게임에는 현실 여성이 등장인물로 나타나 유저와 데이트를 즐기게 된다. 신준우 오아시스VR CEO는 “각 등장인물마다 100여 개의 챕터가 있으며 각 상황마다 유저에게 선택지가 주어져 여러 시나리오로 스토리를 진행할 수 있다”며 “VR과 연동해 더 실감 나는 연애 시뮬레이션을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조금 옮겼더니 관람객들이 하나같이 둥둥 떠오른 모자와 반지를 찍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진짜 물건이 부유하는 것처럼 보였다. 증강현실 기술을 이용해 홀로그램 제품을 개발하는 홀로홀릭(Holo HoliK)의 작품이다. 디스플레이가 달린 선풍기를 돌리면 홀로그램이 떠오르는 원리다. 제임스 홍 홀로홀릭 사장은 “홀로그램을 더 선명하게 띄우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전했다.
산학협력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대학들의 과제물도 전시됐다. 아주대학교 라이프미디어협동과정 대학원생들과 교수진이 간병 VR 프로그램 전문 업체인 팀제파와 함께 개발 중인 치매노인 치료용 가상현실 기기도 그 중 하나다. 시골 풍경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해 감각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노인들이 직접 손으로 게임을 풀 수 있게 해 인지활동을 돕는 데 초점을 맞췄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석혜정 아주대 미디어학과 교수는 “기존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도구를 나열해 퍼즐처럼 맞추는 간병용 콘텐츠가 많았다”며 “저희는 여기에 약간의 스토리텔링을 추가하고 시골 배경을 구현하는 등 노인분들에게 더 친화적인 콘텐츠를 만들려고 고민했다”고 밝혔다.
이번 엑스포에 참여한 업체 중엔 업력이 짧은 스타트업이 많았다. 대부분 완제품이 아닌 개발 단계의 성과물들을 선보이고자 나온 기업들이다. 그러다 보니 창업 초기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업계 관계자들도 있었다. 실제로 대한상공회의소가 2017년 발표한 ‘통계로 본 창업생태계 2라운드’ 보고서에 따르면 2013년 기준 창업기업의 62%는 3년 내에 중도 탈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창업 초기에 연구개발(R&D)에 투자한 비용을 시장에서 회수하지 못한 탓이다.
특히 가상현실 업체들의 경우 초창기에 장비, 콘텐츠, 그리고 이 둘 사이의 인터랙션(상호작용)을 한꺼번에 개발해야 성과물이 나오다 보니 초기 R&D 비용이 만만치 않다. 한 VR업체 관계자는 “우리는 초기 비용에만 15억원이 들었다”며 “정부지원사업을 통해 대부분을 지원받긴 했지만, 지원사업에 따라 30~50%는 자비로 충당해야 해 스타트업 중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얘기했다. 정부지원을 받는다고 해도 대출로 자금을 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엑스포는 19일(목)부터 20일(금)까지는 ‘비즈니스데이’로 운영되며 업계 관계자들의 참여에 초점이 맞춰졌다. 21일(토)부터 22일(일)까지는 일반인 관람객을 대상으로 하는 ‘퍼블릭데이’로 열린다. 이번 주말에 가상현실·증강현실 성장기업들의 성과물을 직접 만나보는 건 어떨까.
/심우일기자 vit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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