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상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았는데도 국민연금이 먼저 집중투표제의 근거를 신설한 것에 대해 “정권과 코드를 맞추려는 무리수”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기금운용위 산하 의결권행사전문위 일부 위원들조차 상법 개정 전에 미리 지침을 개정하는 데 우려를 표했다고 한다. 충분한 검토 없이 무리하게 추진하면 기업만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문제는 국민연금의 섣부른 결정이 엘리엇 등 헤지펀드의 국내 기업 공격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는 점이다.
엘리엇은 이달 들어 현대자동차그룹에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하는 내용으로 정관변경을 요구하는 등 경영간섭을 노골화하고 있다. 만약 엘리엇의 요구가 주총에서 안건으로 상정될 경우 국민연금은 꼼짝없이 이에 찬성해야 할 판이다. 의결권 행사지침에 집중투표제를 도입해놓고 반대표를 던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국내 대기업 주요주주인 국민연금이 투기자본의 전략에 동조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잖아도 국내 대기업은 자기주식 취득 외에 마땅한 경영권 방어책이 없는 형편이다. 이런 상태에서 사실상 대주주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집중투표제가 도입되면 기업 경영권에 심각한 위협이 될 공산이 크다. 집중투표제는 ‘1주=1표’가 아니라 주당 선임하는 이사 수만큼 표를 주고 이를 한 명에게 몰아줄 수 있도록 한 이사선임 제도다. 이 때문에 투기자본의 이익을 대변할 인물을 손쉽게 이사회에 밀어 넣을 수 있는 수단으로 변질될 소지도 다분하다.
이렇게 부작용이 많은 집중투표제를 국민연금이 서둘러 채택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집중투표제는 대기업의 경영권 방어책 등을 고려해 신중히 접근할 필요가 있다. 마침 지침을 최종 의결한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에서 다른 안건에 밀려 제대로 된 토의도 없이 집중투표제가 처리됐다니 다시 진지하게 논의하는 게 바람직하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