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000억달러 규모의 대외부채에 대해 디폴트(채무불이행)을 선언한 아르헨티나. 국가 부도의 위기 속에서 아르헨티나는 2005~2010년에 걸친 채무조정에서 채권자 93%를 설득해 원금의 4분의 3을 탕감받기로 했다.
하지만 폴 싱어 회장이 이끄는 엘리엇매니지먼트는 달랐다. 당초 채권단이 아니었던 엘리엇은 2008년부터 다른 헤지펀드들과 함께 세컨더리마켓에서 채권자들이 한 푼이라도 건지기 위해 내던진 부실 채권을 계열사를 통해 헐값에 사들였다. 그러곤 원리금을 전액 반환하라고 미국 뉴욕법원에 소송을 걸었다. 엘리엇은 2012년 결국 재판에서 승소했다.
아르헨티나가 상환을 거부하자 엘리엇은 2012년 아프리카 가나에 정박 중인 아르헨티나 군함 3척까지 압류했다. 그 집요함에 전세계는 경악했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싱어 회장에 두 손을 들었다. 2015년 채권 원리금 75%를 갚는 조건으로 합의한 것이다. 6억1,700만달러를 투자해 22억8,000만달러를 벌어들이게 된 엘리엇의 수익률이 무려 392%. ‘잭팟’이라고 할만하다.
1996년에도 국가부도에 빠진 페루를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이 당시 외국으로 도피할 때 탔던 전용기를 볼모로 잡았다. 엘리엇은 액면가 2,000만달러 어치의 페루 부실채권을 1,140만 달러에 사들여 원리금을 포함해 5,800만달러를 챙겼다.
‘오마하의 현인’으로 불리는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도 엘리엇의 물고 늘어지기 전략의 희생양이었다. 버핏 회장은 지난 2017년 미국 에너지업체 온코 인수전에서 싱어 회장과 정면대결을 펼쳤다 내상을 입었다. 싱어 회장은 온코의 모기업인 에너지퓨처홀딩스의 채권을 사모아 인수 반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최대채권자 지위에 오른 뒤 버크셔의 인수제안가 185억 달러가 “너무 싸다”며 반대했다. 온코는 결국 버크셔가 아니라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한 셈프라에너지의 품에 안겼다.
이처럼 싱어 회장은 부도 위기의 국가, 지배구조 전환을 앞둔 기업을 골라가며 먹잇감으로 삼아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투자 전략을 유지하고 있다. 이른바 ‘벌처 자본가(Vulture capitalist)’의 대명사다. 썩은 고기를 먹는 대머리 독수리(벌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1944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싱어 회장은 미국 아이비리그의 로체스터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뒤 하버드로스쿨을 졸업해 변호사가 됐다. 투자은행에서 경력을 쌓던 그는 1977년 주변인들로부터 130만 달러를 끌어모아 엘리엇을 창업했다. 엘리엇이라는 이름은 그의 미들네임에서 따왔다.
엘리엇이 초반부터 성공적인 포트폴리오를 짰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1996년 특유의 벌처 펀드 투자전략을 정립하며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싱어 회장은 2015년 포브스가 발표한 미국 부호순위에서 372위를 차지했으며 그의 재산은 29억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싱어 회장과 엘리엇의 투자스타일에 대해서는 늘 논란이 크다. 일반적인 평가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악랄한 투기꾼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사례처럼 죽어가는 국가나 기업에 칼을 들이대고 목적 달성을 위해 수년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투자 방식이 이런 평가를 만들었다. ‘국가부도→ 국제금융기관의 구제금융 및 채권단의 채무 재조정→해당 나라의 글로벌 시장 복귀’라는 전후 세계 경제의 근본 질서를 무너뜨리며 이익 극대화만 추구한다는 비판도 따라왔다.
반면 일각에서는 싱어 회장을 자본주의의 파수꾼, 소액투자자들의 대변자라고 치켜세운다. 디폴트를 초래할 만큼 심각한 경제 위기는 많은 경우 정치의 부패와 맞닿아있으며 엘리엇은 이런 ‘약한 고리’를 파고들어 소액 투자자들의 이익을 제고한다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아르헨티나의 카를로스 메넴 전 대통령은 국가 예산에서 돈을 빼돌리는 횡령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페루의 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 역시 각종 비리로 복역하다 최근 건강 악화 이후 가까스로 사면됐다.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제기한 합병비율 공정성 문제부터 지난달 23일 제기한 현대차그룹을 향한 주주가치 제고방안 등 한국 정부와 기업을 향한 공격도 이런 투자전략의 연장선에서 해석할 수 있다. 지배구조를 개편하느라 방어에 취약한 기업들을 대상으로 삼되 주주권리 제고를 내세워 소액주주들의 지지를 끌어모으는 식이다.
엘리엇은 2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간 합병 과정에 한국정부가 개입했다며 투자자-국가간 소송(ISD)의 전 단계인 중재의향서를 제출했다는 사실을 밝히며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부터 국민연금까지 이어진 부정부패로 엘리엇과 다른 삼성물산 주주들이 불공정한 손해를 입었다는 게 합병 이후 명백히 드러난 사실관계”라고 강조했다.
돈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듯한 싱어 회장에게 의외의 모습도 있다.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이 주도하는 ‘더 기빙 플레지(The giving pledge)’에 서명을 한 것이다. 이는 자신의 재산을 최소한 절반 이상 기부한다는 약속이다.
또 보수적인 공화당원이면서도 ‘동성 결혼’ 입법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아들 앤드류가 동성애자인 탓으로 보인다. 그는 동성애자 인권운동을 위해 지금까지 1,000만달러 이상을 쾌척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수 겸 배우인 미트 로프와 공연을 펼칠 정도로 수준급 피아노 실력을 지닌 싱어 회장은 아들과 아들 동성 배우자와 함께 가족밴드를 구성하기도 했다.
/연유진기자 economicu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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