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부터 매주 토요일마다 10회 분량으로 20개월 딸과 아빠가 떠난 스위스 여행기를 연재합니다. 이번 스위스 여행은 지난해 12월 9일부터 17일까지 루체른, 베른, 체르마트, 생모리츠, 취리히를 둘러본 8박9일 여정입니다. 딸과 둘이서만 여행을 떠난 ‘용자’ 아빠는 혼행(혼자여행)을 즐기며 전세계 44개국을 다녀온 자칭 중수 여행가입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딸과 관계가 더욱 돈독해진 긍정적 효과와 더불어 엄마가 이제 안심하고 딸을 아빠에게 맡겨두고 주말에 외출해버리는 ‘주말 독박육아’의 부정적 영향이 모두 나타났습니다. 10년 전 ‘혼행’을 줄기차게 다닐 당시 혼행이 대중화될 것이라 예측 못 했는데 앞으로 10년 뒤에는 아빠와 자녀만 떠나는 여행이 혼행처럼 익숙해 질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하며 여행기를 시작합니다.
스위스 취리히 공항에 도착하니 어느덧 저녁 8시. 탑승교를 넘어선 뒤 유모차를 건네 받았다. 한손엔 유모차, 한손엔 캐리어를 끌면서 입국심사대로 가니 중년의 백인 심사관이 고개를 숙이며 수아에게 묻는다.
“엄마 어딨니(Where is your mommy)?”
아내 없이 혼자 여행 왔다니 심사관이 깜짝 놀란다. 싱글남인지 궁금했을 법도 한데 심사관이 묻지는 않더라. (역시 사생활을 중시하는 서구적 마인드)
취리히 공항은 우리 인천공항처럼 기차역과 이어져 있다. 기차역까지는 아주 쉽게 잘 찾아왔지만 문제는 플랫폼이었다. 우린 첫 여정이 루체른이어서 숙박을 루체른으로 잡았다. 지하1층 플랫폼에서 기차를 타야하는데 엘리베이터를 못 찾겠다. 현재 위치 지상 3층에서 1층까지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는 보이는데 희한하게 지하 1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가 없다. (엘리베이터가 왜 지하까지 가지 않는걸까) 묻고 또 묻고해서 지하 1층 플랫폼에 도착, 무사히 탑승했다.
기차를 타는 법은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것처럼 아주 심플했다. 1.유모차에 탄 수아를 들어 올려 열차 칸에 넣는다. 2.캐리어를 들어 올려 열차 칸에 싣는다. 3.오른손으로 유모차를 끌면서 왼손으로 캐리어를 밀고 빈 자리에 앉는다.
KTX 동반석처럼 서로 마주보는 좌석인데 맞은 편에는 스위스 아주머니가 책을 읽고 있었다. 수아를 유모차에서 빼내 좌석에 앉히니 칭얼대기 시작했다. 불현듯 대학 후배가 아기와의 여행이 어려운 점에 대해 말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 역시 20개월 아기와 함께 괌 여행을 갔는데 아기가 다른 인종의 사람만 보면 겁을 먹고 안아달래서 여행 다녀온 후 몸살이 났다는 반도의 흔한 육아맘 수난기였다.
그 순간 책을 읽던 스위스 아주머니가 수아를 쳐다봤다. 수아의 눈빛이 흔들거렸고 내 심장이 쿵쾅거렸다. 수아가 칭얼대기 시작했다. 이럴 때를 대비해 태블릿PC와 필수 콘텐츠 ‘뽀롱뽀롱 뽀로로’를 챙겨왔고 뽀로로를 틀어줬다. 별로 효과가 없다. 계속 칭얼댔다. 속타는 내 마음이 전달됐는지 스위스 아주머니가 다음역에서 내렸다. 수아의 눈빛은 평온해졌고 내 가슴도 심박수 분당 70회로 돌아왔다.
취리히에서 루체른까지는 1시간 정도 걸린다. 루체른 역에 어느덧 도착, 내릴 때 역시 코끼리를 냉장고에서 꺼내듯 아주 심플하게 구분동작으로 하면 된다. 루체른은 비가 왔다. 숙소는 하드캐리 상황을 최소화하도록 기차역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잡아놨지만 방향을 잡아야 하는 일대과제가 있다. 구글맵을 켰다. 내 위치가 빨간 점을 통해 표시된다. 오른손엔 유모차, 왼손에 캐리어를 끌고 보슬비를 맞으면서 오른쪽으로 걸어가본다. 역시 처음 선택한 방향은 어김없이 목표지점과 반대 방향이었다. 왔던 방향을 돌아서 걸어가본다. 호텔 위치가 점점 가까워지고 호텔 간판이 보였다. 체크인을 하고 한국에서 가져온 컵라면과 야채죽을 먹은 뒤 꿈나라로 빠져들었다. 수아도 피곤해서 그런지 금세 잠들었다.
착한 어린이는 꿈나라에 있어야 할 새벽 2시. 수아가 울어서 깼다. 토닥토닥 엄마의 손길인냥 두드려줬지만 손의 스냅이 다르다는 걸 그녀는 역시 알고 있었다. 외할머니의 필살기인 어부바를 시현했다. 그녀가 얌전해졌다. 침대에 다시 눕혔더니 운다. 다시 어부바, 잠든 듯 해서 침대에 살짝 내려놓으니 또 운다. 다시 어부바, 침대로… 반복 3회를 하고 나니 그녀가 딥슬립에 빠져들었다
잠을 끊어서 잔 탓에 살짝 피곤하긴 했지만 휴가 기간엔 아침에 일어날 때 몸이 참 가볍다. 조식 포함으로 호텔을 예약했기에 가벼운 기분으로 식당으로 갔다. 전날 야채죽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수아는 원래 유럽 아기였던냥 크로아상을 빠른 속도로 해치우기 시작했다. 크로아상을 리필해줬더니 또 순식간에 해치웠다. 크로아상 2개와 과일로 배를 채운 그녀는 아침 일정을 위해 호텔을 나오는 순간, 유모차에서 꿀잠을 자기 시작했다.
이날 날씨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흐렸다. 비도 추적추적 내렸다. 그렇다고 호텔방에만 있을 순 없으니 슬슬 일정을 시작했다. 루체른에 가본 사람은 누구나 들른다는 리기산을 가기로 했다. 리기산은 여러 코스가 있지만 루체른호수(피어발트슈테터)를 지나는 유람선을 탄 뒤 피츠나우 나룻터에서 내려 산악열차로 갈아탄 후 리기쿨룸 전망대까지 가는 코스를 택했다. 비가 와서 그런지 유람선에 대기 인원도 별로 없다. 11시 8분에 출발하는 유람선을 끊고(스위스패스를 사전에 구매해서 유람선은 공짜였다) 시간이 30분 정도 남았기에 바로 옆에 있는 관광명소 카펠교를 둘러봤다. 루체른호수는 죽기전에 봐야할 명소 101곳에 포함될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을 지녔다고 가이드북에 적혀 있지만 날씨가 우중충하니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풍경보다 오히려 옆 사람 구경이 더 재밌었다고나 할까. 웬 커플이 근처에서 서로 스낵을 먹여주며 애정 행각을 벌이는데 한창 먹을 것에 관심이 많을 나이인 20개월 수아가 그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수아는 문화센터에서 배워 온 몇 안 되는 스킬 중 하나인 양손을 고스란히 모으고 “주세요”하는 손짓을 이 커플들에게 하고 있었다. 커플들이 관심을 안 기울이니 입으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아~아~” 소리를 내며 내게도 입이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한국에서 온 헝그리 베이비의 애절한 몸짓을 아빠로서 그대로 두고 볼 수 없기에 가방을 이리저리 뒤져 간식을 꺼냈다. 헝그리 베이비를 위한 긴급 구호활동을 마치니 어느덧 피츠나우에 도착했다.
유람선에서 내려 산악열차를 타려고 플랫폼으로 갔다. 코끼리 냉장고에 넣는 법처럼 심플한 유모차 열차에 태우기를 매뉴얼대로 하려 했더니 여러 사람이 도와주려 한다. 캐리어도 없어 아주 심플했는데도 말이다. 열차는 산을 올라 올라 리기산 전망대역에 도착했다. 원래라면 한없이 푸른 하늘과 하얀 설경이 어우러진 엽서와 같은 풍경이 기다리고 있어야 하겠지만 실상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하늘과 유모차가 도저히 굴러가지 않을 상태의 눈밭이 펼쳐져 있었다.
“아~ 나는 도대체 왜 이 어린 아이를 데리고 이역만리로 온 것인가.”
어딜 둘러볼 데조차 없었다. 다음 열차를 타고 하산하는 게 정답이었다. 눈을 피하기 위해 실내에 들어왔다. 한시간 가량을 대기해야 했다. 수아는 그새 또 유모차에서 잠들었다. 앞으로도 계속 날씨가 이러면 어쩌나 걱정이 밀려온다.
왔던 코스 그대로 루체른까지 돌아왔다. 여전히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이런 날씨에 딱히 갈 데가 없다. 눈앞에 쿤스트뮤지엄(현대미술관)이 보인다. 스위스패스를 가진 나는 무료입장이고 만 2세 미만인 수아도 당연히 무료였다. 루체른 기차역 바로 옆 KKL건물 4층에 있는 이 미술관은 현대미술관답게 역시 봐도 의미를 잘 모르겠다. 수아도 작품들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뭔가를 했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며 숙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내일은 날씨가 좋아야 할텐데… <3편에서 계속>
/강동효기자 kdhy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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