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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시대의식을 되묻다

[민중미술가 주재환·김정헌 '유쾌한 뭉툭'展]

쓰레기 경고문 붙은 빈 액자·권력에 뺏긴 친구 작품 재해석

주재환, 꼼꼼한 시선으로 삶을 패러디

김정헌, 세상 향한 비판 투박하게 그려

내달 8일까지 '통의동 보안여관'서

‘민중미술’ 대표작가인 김정헌(왼쪽)과 주재환. /사진=조상인기자




원로미술가 주재환(78)이 ‘유쾌한’ 씨라는 별명을 갖게 된 것은 2000년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그의 첫 개인전 ‘이 유쾌한 씨를 보라’가 계기였다. 날 선 비판의식을 그림에 꾹꾹 눌러 담은 김정헌(72)을 ‘뭉툭’이라 칭한 것은 1997년 작가 겸 이론가인 박찬경의 평론이었다. 비영리 전시공간인 서울 ‘통의동 보안여관’에서 다음 달 8일까지 열리는 김정헌과 주재환의 전시에 ‘유쾌한 뭉툭’이란 제목이 붙은 이유다. 1980년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만나 40년 가까이 우정과 동료애를 지켜온 두 사람의 2인전은 이번이 처음이다. 둘은 민주화운동 등을 배경으로 강한 사회적 메시지를 던진 1980년대 ‘민중미술’의 대표작가다. 백발이 될 정도로 세월의 더께가 앉고 심지어 ‘세상이 변했다’고도 하는 요즘이지만 예리하게 세상을 보는 두 작가의 시대정신은 여전하다. 전시에는 과거 대표작과 미공개작, 신작이 다양하게 선보였다.

전시장 1층에서 주재환의 최신작이 관객을 맞는다. 금장 화려한 빈 액자 위에 ‘이 쓰레기를 버리신 입주민께서는 폐기물스티커를 부착하여 주세요. ○○아파트관리소장’이라고 적힌 경고문이 붙어 있다. 이 액자가 실제 버려졌던 쓰레기장 사진, 그것을 고스란히 주워들고 오는 주 작가를 찍은 사진이 액자 아래에 나란히 걸렸다. 작품 제목은 ‘왜?’. 삶의 곳곳을 탐험하고 연구하듯 꼼꼼히 들여다보는 작가의 시선, 날카롭고 재치 넘쳐 ‘패러디의 거장’이라 불리는 그의 관심사를 보여준다. 알약과 캡슐커피·봉지커피 등으로 만들어 꼭 로봇처럼 보이는 인물상은 장난기와 기발함을 동시에 품었다. 성냥개비와 소주병 뚜껑으로 작업한 ‘절규’는 제 몸까지 활활 태울 듯 외치는 비명이며, 몇 통의 껌을 재료로 그린 ‘껌 댄스’는 폭격 아래 외마디 비명도 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과 다름 아니다. 진지함과 엄숙함, ‘먹물의 허위의식’을 집어던진 주재환을 향해 김정헌은 ‘주격조 선생’이라 부르며 “항상 옆에 비껴앉아 가끔 한마디씩 던지는데 대개 한마디가 촌철살인”이라며 “우리가 받들어 모셨던 서구미술의 신화를 산산 조각내는 패러디 작품들이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 김정헌을 향해 주재환은 “아직도 담배 태우니 딱하지만 건강한 중생…흥이 나면 얼쑤 어깨춤, 통 크게 술값 쏘는 걸출한 품격의 사내”라며 ‘김품격’이라고 받아쳤다.

주재환 ‘왜_’ 2018년, 액자와 폐기물경고장,사진 등으로 이뤄진 설치작품, 63x50cm /사진제공=통의동 보안여관


2층은 김정헌의 작품들이 채웠다. 계단부 벽에 걸린 선홍빛 그림은 ‘신학철의 실락원(Lost Paradise)’이다. 동료화가 신학철이 지난 1989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연행될 때 검찰에 압수된 그림 ‘모내기’를 선묘불화 형식으로 그리고 그 위에 무릉도원을 상징하듯 복숭아와 조화를 설치한 작품이다. 무죄판결을 받았음에도 그림을 돌려받지 못하는 친구를 위해 화가가 택한 최선의 몸부림이었으리라. 1998년에 그린 이 작품은 20년 만에 처음 공개전시에 걸렸다. 1985년에 광주교도소 벽화 ‘꿈과 기도’ 제작을 위해 벽돌 벽지 위에 목탄으로 그렸던 드로잉 작품도 33년만에 두루마리에서 풀려났다. 민중을 주인공으로 소박하다 못해 투박하게 그리는 그림이지만 김정헌의 회화에는 문인화의 품격이 감돈다. 삼면 제단화 형식으로 그린 1995년작 ‘경제 정치 종교’에서 보여준 비판의식은 종이박스를 펼쳐 그린 최신작 ‘벽돌 한 장으로 남은 조선총독부’나 ‘신 몽유도원도와 신문지 빈대떡’ 등에 고스란히 전해진다. 달라졌으나 결코 다를 바 없는 세상을 향한 작가의 응어리가 감지된다.

김정헌 ‘신학철의 실락원(Lost Paradise)’ 1998년작, 캔버스에 아크릴과 조화설치, 140x140cm /사진=조상인기자




이번 전시를 기획한 박수지 큐레이터는 “김정헌과 주재환의 근작을 (1980년대의)‘민중미술’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라며 “두 작가는 우리가 쉽게 ‘동시대’라고 부르는 ‘지금’이 유발시키는 고민들을 지속적으로 탐구해 오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에 지난 여름부터 약 1년간 준비하면서 젊은 작가인 강신대·이우성·홍진훤 등이 두 사람의 작품세계를 평하는 ‘동료비평’ 성격으로 전시 얼개를 잡았다.

한편 통의동 보안여관은 1936년에 서정주가 동료들과 문학동인지 ‘시인부락’을 만든 유서깊은 곳으로 광복 이후에는 지방에서 상경한 예술인들이 장기 투숙하는 공간으로 유명했다. 2004년 여관 폐업 후 건물을 인수한 최성우 일맥문화재단 이사장이 역사적 공간을 보존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아 2007년부터 벽 떨어지고 계단 삐걱거리는 낡은 곳이 과거와 현재를 잇는 독특한 전시장으로 살아남았다. 최성우 대표는 지난해 보안여관 옆에 ‘보안1942’를 신축해 지하1층 전시장 외에 북카페와 게스트하우스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 지하2층 바닥은 통유리로 제작돼 공사 중 발견된 조선시대 유구 흔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민중미술’은 1980년대를 대표하는 미술의 한 부류지만 주재환과 김정헌의 예술은 지금도 펄떡이는 ‘동시대미술’이다. 80년 넘은 옛 보안여관이 현재와 어우러지는 것과 꼭 닮았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주재환의 설치작품, 김정헌의 드로잉 등 근작 전시 전경. /사진=조상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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