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보스톤의 버클리음악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홍익대 대학원(IDAS)에서 디자인을 공부한 최고경영자(CEO)의 행보는 남달랐다. ‘카지노업계의 대부’로 불린 창업주 고(故) 전락원(1927~2004) 창업주의 장남인 전필립(57) 파라다이스그룹 회장은 2005년 11월 회장 자리에 올랐지만 가급적 공개석상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은둔형 CEO로 통했다. 그런 전 회장을 미술전문 계간지 ‘아트뉴스(ARTNews)’가 최신호에서 발표한 ‘세계 200대 컬렉터’를 통해 주목했다. 전 회장은 부인인 최윤정(48) 파라다이스문화재단 이사장과 나란히 선정됐다.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올해 리스트에 포함됐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은 올해 명단에 들지 못했다.
지난 1990년부터 매년 꾸준히 세계 미술시장을 움직이는 유력 수집가를 선정해 발표해 온 ‘아트뉴스’는 12일 전 회장 부부를 새롭게 부상한 미술품 수집가(newcomer)로 홈페이지 메인화면에서 소개했다. 인천에 파라다이스시티 리조트를 설립했으며 동시대미술(Contemporary Art)을 수집한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특히 일본 현대미술가 쿠사마 야요이의 노란색 대형 호박조각과 한국작가 뮌의 샹들리에 형 작품이 설치된 영종도 파라다이스시티 내 카지노 입구 사진을 게재해 눈길을 끌었다.
중앙대 경영학과에서도 수학했지만 예술분야를 섭렵한 전 회장은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체득한 다양한 경험을 더해 ‘르네상스적 감성’을 이뤘다. 이는 동북아 관광의 랜드마크를 목표로 한 영종도 파라다이스시티 구상에 든든한 기반이 됐다. 그는 차세대 먹거리 사업군인 관광산업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예술적 즐거움을 표방한 ‘아트테인먼트 호텔’로 지난해 4월 개장한 파라다이스시티는 영국 미술가 데미안 허스트의 ‘골든 레전드’가 금빛 피부와 붉은 근육을 드러낸 페가수스 상으로 시선을 사로잡으며 33만9,000㎡(약10만평) 규모 공간에 2,700여점의 미술품을 들여 ‘미술관 같은 호텔’로 모습을 드러냈다. 세계에서 제일 몸값 높은 생존작가 중 하나인 아니쉬 카푸어의 ‘씨 커브(C Curve)’, 인도의 국보급 작가 수보드 굽타가 주방용품을 모티브로 제작한 높이 6m의 설치작품 ‘레이(Ray)’, 최근 ‘MMCA 현대차시리즈’에 선정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개인전을 개막한 최정화의 ‘금관’을 비롯해 로버트 인디애나,바셀리츠,알렉산드로 맨디니,박서보,오수환,이강소,장승택 등의 작품을 선보였다. 눈대중으로도 수백억원 이상의 가치를 호가하는 작품들이었다.
웬만한 미술관이 한 두점 소장하기도 힘든 고가의 대형 작품을 호텔 개장을 앞두고 다량 수집한 까닭에 전 회장 부부의 미술계 영향력이 급격히 커진 것으로 분석된다. 게다가 이들은 서울 중구 장충동 파라다이스 본사 근처의 주택을 건축가 승효상의 재능기부를 받아 복합문화공간으로 개조해 ‘파라다이스 집’으로 운영하며 예술가를 후원하고 있으며, 영종도 파라다이스시티 안에 ‘파라다이스 갤러리’ 개관도 앞두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제주도에 ‘파라다이스파크’ 개관을 계획하고 있어 그 영향력은 지속될 전망이다. 최윤정 파라다이스문화재단 이사장은 최근 명품 브랜드 몽블랑의 ‘몽블랑 문화예술 후원자상’ 수상자로 선정됐고 오는 18일 시상식이 열릴 예정이다.
미술계에서 권위를 자랑하는 이 명단에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 부부가 2015년과 2016년에 연달아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이 회장이 와병 중이고 홍 전 관장이 미술관에서 손을 떼면서 지난해와 올해는 명단에 들지 않았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도 용산구 신사옥에 아모레퍼시픽미술관(APMA) 개관을 준비하면서 지난 2015년과 2016년에 세계 200대 컬렉터에 올랐다. 한국인으로는 천안·서울·제주 등지에 화랑과 미술관을 운영하며 상하이 분관도 둔 김창일 아라리오그룹 회장이 2008년 이 리스트에 처음 이름을 올렸다.
한편 올해의 ‘세계 200대 컬렉터’로는 루이뷔통·디올 등 명품브랜드를 거느린 프랑스태생의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 부부, 세계적 투자거물이자 미술 애호가인 스티븐 A.코헨 SAC캐피털어드바이저스 회장 등 단골 유력자를 비롯해 13조 원의 자산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로만 아브라모비치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첼시의 구단주, 세계적 제약사 세로노(Serono)의 상속자인 에르네스토 베르타렐리, 지난해 미국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과의 환담에 초대될 정도의 투자 거물인 레온 블랙 아폴로 회장, 홍콩 재벌 뉴월드그룹의 후계자로 K11 예술재단을 설립해 미술관 개관을 내다보는 애드리언 쳉 부회장 등이 선정됐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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