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상암동 북카페’로 출근한다고 자조 섞인 농담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한 줄기 위로가 된 건 라디오 프로그램의 한 코너 ‘세계문학전집’에서 책을 읽어주던 시간이었다. 책을 좋아하다보니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하지만 그 시간 외에 회사 생활은 견디기 어려웠다. (당시 그는 MBC 아나운서였지만 뉴스 진행을 일 년 가까이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을 해야 하는데 몸이 침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날 회사를 떠날 때가 왔다는 걸 알았다. 다음 행보에 대한 계획은 없었다. 사직서를 낸 뒤 훌쩍 떠났다. 돌아왔을 때 그의 머릿속을 지배한 생각은 책방을 차리겠다는 거였다. 지난해 11월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동네 책방 ‘당인리책발전소’를 열고 이어 일 년이 채 안 돼 위례신도시에 두 번째 책방을 연 김소영(31·사진) 비플랜트 대표의 이야기다. 비플랜트는 김 대표가 운영하는 동네 책방의 법인명이다.
#동네책방은_여유롭다고?
“책방을 차린 건 저를 치유하려는 목적이 컸어요. 처음에는 큰 책방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나에게도 휴식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죠.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당인리책발전소를 연 것도 매일 남편과 산책하며 지나치다가 정이 든 곳이었기 때문이었어요”
퇴직금을 털어 가게 자리를 구했고 힘닿는 대로 인테리어도 직접 했다. 그렇게 카페에 가까운 독서 공간인 당인리책발전소가 문을 열었다. 책이 접근하기 어려운 게 아닌 커피 한 잔처럼 일상에서 함께하는 존재가 되길 바랐다.
그는 “책방 주인을 한다면 책도 자주 읽고 여유롭게 가끔은 손님들과 책 이야기를 하는 저를 상상했는데 현실은 정반대였다”며 “식당이나 빵집, 세탁소처럼 몸 쓰는 일도 많고 굉장히 고된 자영업이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아침에 문을 열기 전에 출판사들이 보낸 책을 정리하고 진열하는 데는 모두 사람의 손이 필요했다. 중간중간 망가진 책을 반품하는 과정도 그랬다. 이런 노동에 비해서는 매출이 박하다는 게 그가 일 년간 책방을 운영하면서 깨닫게 된 부분이다.
“책을 한 권 팔 때 책값의 75%는 출판사와 저자에게 주고 나머지 금액으로 책방을 운영해요. 박리다매로 팔아야 살아남을 수 있어요. 하지만 책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사는 제품이죠. 책을 거래하고 유통하는 사람들이 큰 이익을 얻지 못해요”
#창업이 적성에 맞더라
사실 그는 창업이라는 선택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했고 대학에서는 토론팀에서 활동했다. 회계 수업을 들어본 적도 없고 엑셀을 다루기는커녕 스스로 컴맹이라고 칭할 정도였다. 흔한 전·월세 계약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보통 창업을 한 사람들은 컨설팅 회사나 대기업에서 일한 경우가 많지 않은가. 잘할 수 있을지 두려움이 앞섰다. 하지만 직장인이었던 김소영과 창업자 김소영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창업한 뒤 큰 수확은 무엇이든지 부딪혀 볼 수 있는 사람으로 변했다는 거예요. 직장에서 늘 저를 막아선 건 조직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이었어요. 문제를 발견해도 지적하기도, 해결하겠다고 나서기도 쉽지 않았죠. 창업하고 나서는 모든 걸 책임져야 하고 사소한 일로도 싸워야 하는 게 쉽지 않지만 모든 걸 스스로 해야 한다는 점에서 묘하게 희열이 있어요 ”
그는 “특히 사내정치에 신경 쓰지 않고 하루 종일 문제를 해결하는 데 머리를 쓴다는 게 좋다”며 “매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무엇을 할지 기대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월요병은 없느냐고 묻자 주말이 더 바쁜데 월요병이 있을 리가 있느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퇴사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조언으로는 ‘왜 퇴사를 하는지’를 고민하기를 권했다.
“상사가 싫어서라면 더 괜찮은 상사가 있는 곳에 가면 되고 지금 하는 일이 싫다면 다른 일을 하는 회사에 취직하는 방법이 있어요. 이게 아니라 내가 무엇인가를 만들고 싶고 도전하고 싶은 거라면 창업을 해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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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책방을 한다고 해도 단순히 책이 좋아서가 아니라 가지고 있는 돈, 시간 등 자원에 대한 분석과 서적 유통 과정을 철저히 분석한 뒤에 최선을 다한다면 승산은 있다고 말했다. 특히 조직에서 나오면 하루하루가 불안할 것 같은 사람들이 있지만 창업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것은 아니라는 게 그의 조언이다.
그는 지난해 4월 방송인 오상진씨와 결혼을 한 뒤 반년 만에 창업을 시작했다. 신혼생활에 시작하다 보니 가정과의 양립이 쉽지 않기도 하다. 그는 “서로가 원하는 일을 할 때 가정을 꾸리는 일에 대해 서로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다”며 “오히려 결혼을 한 뒤였기 때문에 창업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저녁마다 따뜻한 밥에 찌개를 끓이는 일이 드물지만 가끔 시간 내서 한두 시간이라도 데이트를 하는 순간을 만끽하려고 한다는 생각이다.
#편의점, 카페만큼이나 필요한 동네 책방
지난해 11월 서울 합정동에서 당인리책발전소를 열고 나니 이미 대형 서점을 비롯해 개성있는 여러 동네서점이 있었다. 반면 책방을 찾는 고객 중 많은 이들이 동네에서는 북 토크나 책방을 접할 기회가 없다 보니 지방에서 찾아왔다.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책을 즐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2호점의 시작이 됐다.
“카페나 편의점은 동네에 꼭 있어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하는데 책방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필요하면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되니까. 하지만 책방 주인이 큰돈을 벌지는 못하더라도 동네 책방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그 동네에 가져오는 힘이 있어요. 요새는 책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몰린다는 생각에는 많이들 공감을 해주시는 것 같아요”
이 때문에 주거단지가 발달한 신도시지만 아직 동네 책방이 없는 위례신도시에 2호점을 세웠다.
동네 책방의 역할에 대한 뚜렷한 철학도 생겼다. 그는 “동네 책방이라면 마을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미리 파악한 뒤 제안을 해야 한다는 걸 느꼈다”며 “20∼30대 젊은 층이 찾는 1호점과 가족 단위 고객이 많이 찾는 2호점은 책을 매입하는 기준도 다르다”고 말했다. 동네 책방이라고 해서 꼭 책을 좋아하는 마니아만 대상으로 책방을 운영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다. 위례점에는 아이를 위한 책 전시 공간을 마련했고 아동 베스트셀러 리스트도 제공한다. 인터뷰 중간에도 책방에는 유모차를 끌고 와 아이와 함께 오래 시간을 보내는 부모들이 눈에 띄었다. 아이들은 자유롭게 책을 골라보고 엄마들은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위례신도시 중앙광장의 뒤편에 위치한 스타벅스가 있는 건물 2층의 독특한 녹색 공간인 이곳은 문을 연지 한 달 만에 지역의 커뮤니티로 자리잡고 있다. 책발전소위례 오픈 기념으로 유튜브 크리에이터 도티,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 등 저자를 초청한 북토크에는 공간 사정상 150명까지만 초청할 수 있었는데도 지원자만 5,000명 가까이 몰렸다.
#커뮤니티와 라이프스타일의 중심이 되는 동네 책방
그의 목표는 단순한 책 판매가 아니라 동네 책방에서 책을 읽거나 사는 행위 자체를 하나의 문화 현상이나 라이프 스타일로 만드는 것이다. 책방이 동네 커뮤니티의 중심이 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책을 파는 공식도 바꿨다. 가령 최근 트래블코드가 출판한 ‘퇴사 준비생의 런던’이라는 책의 초판본은 ‘비플랜트’ 전용의 한정판을 판매하는 이벤트를 벌이고 있다. 이 초판본은 이후 발행된 판본과 디자인도 다르고 미술품처럼 고유번호가 매겨져 있다. “책은 소모품이 아니라 소장하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는 가치 제안을 하고 싶었어요” 그는 앞으로 소비자와의 접점을 늘리는 온라인 몰을 만드는 등 동네 책방의 한계를 벗어나 다양한 이벤트를 벌일 계획이다.
최근 다른 동네 책방이 문을 닫고 있는 가운데 유명인이라서 2호점까지 낼 수 있었던 것 아니냐는 시각에 대해서는 “실제로도 그렇다고 생각을 하지만 앞으로 이를 키워가는 건 제 몫”이라며 여유를 보였다.
“방송인이란 많은 사람들이 차려준 밥상에서 밥을 맛있게 먹는 사람인데 저는 이제 밥상을 차리는 사람이 됐잖아요. 지금은 맛있게 밥상을 차리는 일이 재밌는 것 같아요”
/정혜진기자 made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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