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9 평양공동선언은 4월 1차 남북정상회담의 ‘판문점선언’보다 구체적이고 진일보한 내용을 담고 있다. 5개월 전 ‘완전한 비핵화’라는 추상적 표현 대신 ‘동창리 시험장과 영변 핵시설 폐쇄’라는 비핵화 실천 방안이 제시된 점도 눈에 띈다. 동창리 시험장의 경우 관련국들의 참관을 인정했다. 북한이 미국과 국제사회에 제한적으로 핵 사찰을 허용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해석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평양선언에 대해 “매우 흥미롭다”고 한 이유다. 적대행위 중지 내용도 해안포 포문 폐쇄와 군사분계선 남북 10㎞ 완충지대 내 사격 중지 같은 조치로 나타났다. 제대로 된다면 ‘전쟁 없는 한반도’의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비핵화에 대한 구체적인 시간표가 눈에 띄지 않는다. 북한이 보유한 핵 리스트를 공개하겠다는 내용도,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겠다는 약속도 포함되지 않았다. 핵 사찰은 북한 전역에 대한 것이 아니라 동창리라는 특정 지역에 한정됐을 뿐이다. 북한이 폭파현장을 공개한 풍계리 핵실험장 사찰도 없었다. 게다가 영변 핵시설 폐쇄는 ‘미국의 상응 조치’를 전제로 했다. 전형적인 책임 떠넘기기다. 물론 2차 북미정상회담을 앞둔 북한이 자신의 패를 모두 드러내놓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시기는 아니라도 ‘조속한 시기’ 수준의 언급으로 신뢰감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
남북·북미정상회담을 통해 완전한 비핵화에 합의했지만 북한이 실제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 별로 없다는 점도 신뢰를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북한이 지금까지 약속 이행을 위해 한 일이라고는 미군 유해 송환과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정도다. 그나마 풍계리의 경우 전문가들의 참관이나 검증 없이 기자들만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평양선언에서 언급한 동창리 시험장과 미사일발사대 폐쇄도 김 위원장이 북미정상회담 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약속했던 것의 반복에 불과하다. 여기에 한미 양국에 가장 위협적인 무기로 평가받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시험장과 동해의 무수단 미사일발사장도 아직 건재하다. 비핵화의 문은 열었지만 깊숙이 들어가는 것은 한사코 막고 있는 것이다.
우려되는 내용도 적지 않다. 남북관계가 그렇다. 남북 정상은 연내 동·서해안 철도와 도로 연결을 위한 착공식을 열기로 했다. 남북관계 개선이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FFVD)’와 보조를 맞춰야 한다는 미국의 입장과는 결이 다르다. ‘조건이 마련되는 데 따라’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사업을 정상화하고 서해경제공동특구와 동해관광공동특구 조성을 협의한다는 내용도 유엔 대북제재결의안의 기조와 다르다. 남북관계의 과속이 자칫 한미공조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9·19 평양공동선언의 내용이 이전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고 성공적이라고 속단하기는 이르다. 우리는 과거에도 북한이 정상회담에서의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어기는 모습을 수차례 봐왔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말이 아닌 실천이다. 문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도 밝혔듯이 한반도에서 평화와 번영의 열매를 맺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려면 국제사회와 힘을 모아 북한이 비핵화를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도록 끌고 나가야 한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가 이뤄지기 전까지 대북제재와 물 샐 틈 없는 한미공조는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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