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부부와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등에 이어 ‘세계 200대 미술품 컬렉터’로 이름을 올렸다. 최근 발표된 올해 명단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했다. 페기 구겐하임 등 예술 후원자를 기리며 제정돼 찰스 왕세자와 록펠러재단 등이 수상한 ‘몽블랑 문화예술후원자상’을 받았다. 지난 2013년부터 파라다이스 문화재단을 이끌어온 최윤정(48) 이사장이다.
‘은둔의 최고경영자’로 묵묵히 자기 일만 보고 걸어온 전필립 파라다이스 회장이 그녀의 남편이다. 최 이사장 또한 문화재단의 활약상과는 달리 언론에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최 이사장을 몽블랑 예술후원자상 시상식이 열리던 18일 인천시 영종도 파라다이스시티 내 아트스페이스에서 서울경제신문이 만났다. 최 이사장의 단독 인터뷰는 이번이 처음이다. 기업 문화재단의 활동·예술 후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탓에 만남이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아트페어에서 몇 번씩 마주칠 때의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은 모습과 달리 이날 최 이사장은 행사의 주인공답게 우아한 원피스 차림이었다. 차갑고 새침할 것 같은 인상과 달리 겸손하면서 속정 많은 안주인이다.
“어제오늘 행사를 위해 입국하는 VIP가 많았는데 세상에 홍콩이 10년 이래 최악의 태풍이었잖아요. 결항이 많아 자정까지 손님 걱정을 했어요. 저의 기여를 높이 평가해주시지만 문화재단은 선대 전락원(1927~2004) 회장님이 세우신 우경문화재단(파라다이스문화재단의 전신)의 공이 더 큽니다. 일찍이 1970년대에 ‘월간 동서문화’로 우리 문학을 널리 알리고 1997년부터 시작한 뉴욕 ‘아트 오마이(Art-OMI)’ 레지던시 지원사업으로 젊은 한국 작가의 해외 활동을 도왔으니까요. 컬렉터로서의 활동을 눈여겨봐 주신 것은 열심히 많이 돌아다녀서일 거예요. 많게는 일 년에 여덟 번씩 해외 아트페어에 가니까 화랑이나 딜러가 아니면서 계속 보이는 얼굴이 ‘누굴까’ 했겠죠. 제가 잘 모르니까 발품 팔고 귀동냥 얻으러 다닌 것인데… 그 덕에 ‘파라다이스 저 친구들은 정말 액티브(active)하다, 적극적이다’는 얘기를 듣게 됐죠.”
최 이사장은 2016년 중구 장충동에 오래된 단독주택을 건축가 승효상의 재능기부로 개조해 복합문화공간 ‘파라다이스집(ZIP)’을 열었다. 낙후된 도시 골목의 자연스러운 재생과 삶 속에서 함께 꿈틀대는 예술 경험을 추구했다. 이어 지난해 개장한 영종도 ‘파라다이스시티’는 예술과 즐거움을 관광에 접목한 ‘아트테인먼트’를 내세우며 대형 설치작품을 포함한 2,700여 미술품을 공개했다. 지난 몇 년간 국내외 아트페어와 굵직한 전시에 최 이사장이 빠짐없이 다녀간 이유를 절로 알게 했다.
최 이사장 스스로는 “아는 게 뭐 있나, 무식하다”고 표현했지만 사실 그는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전공했고 영어와 일어에 능통하다. 예술품을 모으고 감상하는 것이 ‘취미’일 법한 조건이지만 그는 “공유하고 향유하는 예술”을 택했다. 많은 대중이 더 쉽게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문화 플랫폼을 만들겠다”는 포부로 미술관이 아닌 광장을 구상했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에 갔을 때 남편이 먼저 얘기를 꺼냈어요. 건축물과 조각이 어우러지고 사람들은 바닥에 앉아 시간을 보내다 어느 구석에든 있는 미술관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죠. 이탈리아의 광장처럼 우리에게도 어릴 적 ‘공터문화’라는 게 분명 있었어요. 사람들이 어딘가에 늘 모일 수 있었고 함께 과일도 깎아 먹고 줄넘기도 하고 같이 웃고 떠들었는데 지금은 아파트 구석에 놀이터는 있지만 아이들은 학원과 PC방에 머물죠. 예술문화가 삶에 배어들 수 있는 그런 자연스러운 모습을 그리며 광장을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개관한 파라다이스시티 아트스페이스는 앞쪽으로 1,500평 규모의 광장을 품고 있다. 광장 끄트머리에 위치한 전시장에는 문이 없다. 기둥 사이에 놓인 박승모 작가의 비너스와 니케 조각상이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눈길 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작품 앞에 다가설 수 있다. 누구나 들어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상설작품전에서 제프 쿤스와 데이미언 허스트의 최신작을 볼 수 있다. 조각 ‘풍선개’가 2013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5,800만달러에 팔려 생존작가 중 최고가 기록을 세운 쿤스, 다이아몬드 8,601개를 해골에 박아 5,000만파운드에 거래시킨 허스트다.
“개장 후 1년간 파라다이스시티를 다녀간 사람이 120만명 정도였어요. 이것은 호텔 숙박 고객이 아니면서도 찾아와 작품 앞에서 셀카만 찍고 놀다 가신 분들이 많았다는 뜻이죠. 단호박(쿠사마 야요이 ‘호박’)과 말(데이미언 허스트 ‘골든 레전드’) 앞에서 가족들이 사진을 찍고 작품에 대해 얘기하는 모습을 종종 봐요. 걱정은 호텔 식사가 너무 비싸다는 것이었죠. 좋은 것 보고 즐겁게 놀았으면 맛있게 먹어야 하는데 찾아와주신 손님들께 나라도 점심을 대접해야 하나 싶을 정도였죠. 그래서 이번에 추가 개장한 플라자에서는 더 자유롭게 푸드트럭에서 즐기듯 가볍게 음식도 드실 수 있어요. 야외 공간도 좋아서 간단히 먹거리 싸들고 오셔도 돼요.”
어림잡아도 수백억원에 달할 작품 앞에서 몇 천원짜리 떡볶이 얘기를 하는 최 이사장의 얼굴에 미소가 돌았다.
“우리 남편이 열 살이 채 안 됐을 때 선생님께 적어낸 장래희망이 ‘월트디즈니’였대요. 그때가 1970년대였으니 친구들도, 선생님도 웃더래요. 앞서 가신 아버님도 아들의 꿈을 듣고 고민하셨을 정도로요. 그런 남편은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기분 좋게 즐기는 문화공간을 평생의 꿈으로 안고 살았어요. 남편은 음악을 전공했고 감성적인 면이 있어요. 저는 미술을 전공했지만 창의력에 스스로 한계를 느껴 그만둔 경우죠. 그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으면 나는 실천을 위해 어떻게 업무를 분배하나 생각하고는 하죠. 저 혼자 계획했으면 계산만 하다 접었을 일을 전 회장이 함께였기에 여기까지 끌고 나왔습니다. 꿈꾸고 상상하는 것은 반드시 현실이 됩니다. 상업성, 투자 대비 수익성을 생각한다면 쉽지 않은 사업이지만 이게 옳은 길이자 맞는 방향이라고 생각해요. 자긍심이 있습니다.”
작품 공개를 위해 방한한 쿤스가 최 이사장에게 “여기가 파라다이스(This is Paradise)”라며 “아트테인먼트라는 수식어도 필요없이 이곳 자체가 예술천국”이라고 귀엣말했을 정도다. 최 이사장이 문화예술에 열정적인 이유는 분명하다. 그는 “문화예술은 삶의 본질을 기록하는 것”이라며 “이 기록을 지속적으로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문화예술 창작자와 대중을 연결해주는 고리가 있어야 하고 후원은 단순히 물질적인 지원이 아니라 연결고리로서 문화예술의 네트워크를 확장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여기다 ‘한국’에 대한 자부심을 얹어 ‘K스타일’을 지향한다.
“처음에는 ‘우리 한국에도 이런 작품을 갖다놓고 보여줄 수 있다. 와서 봐라’하는 생각이었고 이면에는 ‘그렇게 와서 한국을 보고 가라. 한류가 어떤 것인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라’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유럽과 아시아를 다양하게 다녀보니 아시아 예술의 중심이 도쿄·홍콩·베이징에서 최근 상하이로 옮겨가는 식으로 변하더라고요. 그렇다면 ‘이제 서울에 가볼까’하는 생각이 들도록 그렇게 마음이 움직이게 하는 역할을 우리 파라다이스가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곳곳에 걸린 작품들을 소개하며 그가 덧붙였다. “유명 외국 작가가 먼저 눈에 들어와서 그렇지 전체 3,000여점 중에 90%는 우리 한국 작가입니다. 한국은 역사적 굴곡이 많았고 지금도 깜짝 놀랄 일들이 벌어지고 있잖아요. 그런 현실을 표현하는 한국 젊은 작가들의 역량이 대단합니다. 어서 와서 함께 보세요.”
/영종도=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사진 권욱기자
She Is… △1971년 서울 △1989년 숙명여고 졸업 △1994년 이화여대 섬유예술학과 졸업 △2013년~ 파라다이스문화재단 이사장 △2014년 ㈜파라다이스 디자인총괄 부회장 △2014년 학교법인 계원학원 이사 △2016년 복합문화공간 파라다이스집 개관 △2017년 파라다이스복지재단 이사장 △2018년 아트넷 ‘세계 200대 컬렉터’ 선정 △2018년 제27회 몽블랑 문화예술후원자상 수상 △2018년 파라다이스시티 아트스페이스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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