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국가관 대표작가로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받았고,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했고 일본인 아내와 결혼한 백남준이었지만 그는 ‘미국 여권’을 사용하는 미국 국적자였다. 백남준 스스로는 “나는 가난한 나라 한국에서 온 사람”이라며 늘 한국인임을 강조했지만 그가 인생을 통틀어 가장 오랜 기간 살았던 곳은 서울이 아니라 뉴욕이었다. 어쩌면 멀리 살았기에 더 한국을 그리워하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오롯하게 붙들고 살았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뉴욕이 현대미술의 심장부로 떠오르던 딱 그 시기에 백남준은 맨해튼에 자리 잡았고 함께 성장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1923~1997)이나 재스퍼 존스(89), 도널드 저드(1928~1994)와 댄 플래빈(1933~1996) 같은 뉴욕 소호에 작업실을 둔 작가들은 오후 서너시 쯤 출출해질 무렵이면 약속 없이도 동네 카페에 모였다 흩어졌다. 연유를 살짝 넣어 달큰한 베트남식 커피에 도너츠를 곁들이던 백남준은 날씨와 예술과 시사 문제를 아무렇지 않게 뒤섞어 이들과 대화하곤 했다.
1964년 6월, 백남준은 일본에서 뉴욕으로 건너갔다. 앞서 1963년에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위해 텔레비전 13대를 사느라 수중의 돈을 모조리 써 버린 터였다. 독일로 돈을 부쳐주던 형님이 “와서 TV 공부를 더 해보라”는 말에 냉큼 일본으로 향한 백남준은 유럽에서도 접하기 어려운 컬러TV를 연구하며 일본인 전자공학자 아베 슈야를 만나 로봇과 비디오영상 편집기 개발에 몰입했다. 그렇게 1년을 보내니 슬슬 몸이 근질근질했다. 마침 뉴욕에서 그를 찾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줄리어드 음대 출신의 유태인 첼리스트 샬럿 무어만이 그해 8월 개막하는 제2회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을 기획하고 있었는데, 전위 음악극 ‘오리지날(The Original)’의 출연자로 백남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다.
독일인 작가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이 만든 ‘오리지날’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가변극 형태의 작품이다. 등장 인물 중 동양에서 온 미치광이 행위예술가가 있는데 설명하지 않아도 백남준이 분명했다. 백남준은 독일에서의 초연에 참여했다. 무어만은 이 작품을 뉴욕에서 다시 공연하려 했고, 무대에 세울 침팬지까지 구했건만 아무리 뒤져도 ‘미치광이 예술가’ 캐릭터에 적합한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슈토크하우젠은 “남준이 아니면 안 된다”고 고집부렸고, 백남준이 스승처럼 따랐던 미국인 작곡가 존 케이지가 무어만에게 “남준이 뉴욕에 오고 싶어한다”고 슬쩍 언질을 주었다.
백남준이 뉴욕에 첫발을 내딛던 날 무어만이 JFK 공항까지 마중 나간 게 이 때문이다. 훗날 예술적 동반자가 된 무어만과의 첫 만남부터, 뉴욕은 매력적이었다. 백남준이 뉴욕에서 처음 머무른 곳은 슈토크하우젠이 흔쾌히 빌려준 리스퍼나드가(Lispenard St.)의 스튜디오였다. 바로 옆 커낼가(Canal St.) 359번지에 플럭서스 뉴욕 본부가 있었기에 더욱 마음에 들었다. 말이 플럭서스 본부였지 주로 리투아니아 출신의 아방가르드 예술가인 조지 마키우나스가 주로 쓰는 사무실이었다.
무어만이 기획한 ‘오리지날’ 공연은 매번 거의 만석이었고, 백남준의 퍼포먼스 때문에 경찰이 출동하는 등 성공적(?)이었다. 뉴욕에 눌러앉기로 결심한 백남준은 커낼가 354번지에 작은 집을 마련했다. 한 달 방세가 100불도 안되는 싸구려 아파트였다. 지금은 맨해튼 남쪽의 소호와 부촌 트라이베카 사이에 위치한 이곳이지만 그 시절에는 허름한 동네였다. 백남준은 돈벌이도 안되는 퍼포먼스 작가인지라 전기요금도 잘 못 냈다.
1965년 당시 뉴욕의 유력화랑이던 갤러리보니노가 백남준의 뉴욕 첫 개인전을 제안했다. 개막식은 성황이었다. 다음 날 아침 뉴욕타임즈(NYT)가 그의 전시를 대서특필했다. 이날 이후로 백남준은 어디서든 뉴욕타임즈를 찾아 읽는 애독자가 됐을 정도로 뉴욕 첫 전시에 대한 극찬은 큰 힘이 됐다.
백남준은 1971년 보니노 갤러리에서의 3번째 개인전까지 대성공을 거두자 대형작품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더 큰 작업실이 필요했다. 플럭서스 동료 마키우나스가 소유한 머서가(Mercer St.) 110번지 건물의 맨 위층 창고가 층고가 높아 집 겸 작업실로 쓰기에 제격이었다.
여기서 맨해튼 소호의 예술거리 탄생의 비화가 등장한다. 마키우나스는 백남준과 함께 플럭서스 활동을 해 온 ‘절친’이었다. 반면 플럭서스 예술관과는 사뭇 다른 무어만이 특유의 수완으로 정부 기금과 재력가의 후원금을 받아 공연하고 인기를 끄는 게 못마땅했다. 뉴욕에 갓 도착한 백남준에게 마키우나스는 무어만이 기획한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여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너무나 강경했고 급기야 ‘나 아니면 무어만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다. 백남준은 무어만과의 공연을 택했다.
이를 계기로 마키우나스는 백남준과의 인연을 끊은 동시에 플럭서스의 종말을 선언하고 예술가의 삶 자체를 접어버렸다. 마키우나스는 돌연 부동산 개발업자로 변신한다. 버려진 공장지대였던 맨해튼 남부의 소호지역 개발을 시작한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낙후된 동네를 되살리는 데 예술가를 활용했다. 그는 소호의 건물을 리모델링해 싼값에 예술가들에게 팔았다. 그러자 까다로운 예술가들의 취향에 맞는 음식점과 술집, 옷가게가 인근에 들어섰다. 멋이 넘쳤고 사람들이 모였다. 부동산 값이 뛰어올랐고 이 같은 도시개발 모델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 곳곳으로 퍼졌다.
당시 백남준의 동거녀였고 훗날 아내가 된 구보다 시게코가 절교한 백남준과 마키우나스 사이를 오가며 거래를 성사시켜 1만 2,000불에 머서가 스튜디오를 구입했다. 백남준은 1974년부터 여생을 “원텐(110) 머서”라 부른 이곳에서 살았다. 아내 구보다는 백남준을 먼저 보내고도 3년 더 홀로 이 집에 살다 세상을 떠났다.
백남준은 뉴욕에 집 말고도 작업실로만 쓰는 맨해튼의 스튜디오 3개, 브루클린의 창고 2개를 두고 있었다. 처음 마련한 단독 작업실은 소호 바로 옆 브룸 가(Broom St.) 건물의 지하 2층에 있었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나 미드에서 볼 수 있는 철제 건물이다. 엘리베이터도 철골과 바닥만 있을 뿐 벽면 없이 뚫린 형태였고, 열쇠로 작동시키는 수동식이었다. 백남준은 창고로 쓰이던 공간을 개조해 작업실로 사용했다. 화가의 아뜰리에라는 느낌은 전혀 없었고 전파상 같았고 수북한 물건들로 늘 어지러웠다.
경기도 용인의 백남준아트센터 2층에 ‘메모라빌리아’라는 이름으로 조성된 공간은 브룸 스튜디오의 벽면을 그대로 옮겨와 재현하고 있다. 백남준 생전에 작가를 위한 미술관 건립을 추진하던 경기문화재단이 2002년에 브룸 스튜디오의 한쪽 벽을 통째 소장품으로 확보했다. 벽의 형태를 석고로 본뜨고, 벽면에 붙어있던 스케치와 드로잉, 편지들과 신문기사, 작업용 모자와 장갑, 전선까지 그대로 가져다 두었다. 백남준은 전화를 걸어온 상대방이 불러주는 전화번호를 벽에다 바로 적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흔적마저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미술관 건립 전인 2006년 1월, 백남준이 타계하자 백남준미술관건립추진위원회는 고인을 추모하며 그해 5월11일부터 6월10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백남준 스튜디오의 기억’이라는 전시를 통해 메모라빌리아를 처음 공개했다. 일반인들이 뉴욕의 백남준 작업실을 실제처럼 만난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당시 메모라빌리아의 소장품 확보부터 사전 기획전, 백남준아트센터 내 영구설치까지 도맡았던 최춘일 경기문화재단 팀장은 고인이 됐다. 2008년 10월 백남준아트센터 개관 당시 초대 학예실장을 맡은 독일 출신 큐레이터 토비아스 버거가 주도해 청소 목적으로 ‘푸닥거리’를 하는 바람에 메모라빌리아의 원형이 훼손된 것은 안타까운 대목이다.
규모가 큰 작품들은 거의 모두 이 브룸 스튜디오에서 제작됐다. 브루클린 체이스은행에 위치한 TV모니터 430대짜리 대형 작품도 이곳에서 탄생했다. TV모니터를 인간 형태로 만든 조각 작품인 ‘TV로봇’도 여기서 태어났다. 크고 요란한 작업을 전담하는 곳이었고 누드모델의 영상촬영도 경찰의 입회 하에 이곳에서 이뤄졌다.
그 다음 마련한 작업실이 그랜드 가(Grand St.)에 있었다. 브룸과 달리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회화와 드로잉 같은 평면작업을 위해 마련한 스튜디오였다. 이곳은 뉴욕 맨해튼의 차이나타운과 이태리타운의 경계에 있다. 영화 ‘대부’에서 봤음직한 마피아 느낌이 물씬 풍긴다. 백남준 작업실의 동료들이 한국인 전자기술자인 이정성에게 “절대 이태리타운이 내려다 보이는 옥상에 나가 서 있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을 정도였는데 “차이나타운과 이태리타운의 마피아들이 충돌하거나 갈등상황인 경우 동양인이기 때문에 중국사람으로 오인해 총 쏠 수도 있다”는 게 이유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2개의 덧문을 열고도 다시 엘리베이터를 열고 각 층마다 잠금장치가 있었기에 그랜드 작업실에 들어가려면 총 5개의 열쇠가 있어야 했다. 이곳의 또 다른 역할은 ‘골동품 수장고’였다. 백남준이 벼룩시장이나 골동상에서 사 들고 온 불상과 자전거가 쌓여있었다. 자재창고 같았고 모르는 사람 눈에는 쓰레기장처럼 보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백남준은 “아무것도 버릴 것 없어. 버리는 게 아니라 언젠가 쓰려고 둔 거라서 저 뒤에 쌓이고 깔려 있어도 난 어디에 뭐 있는지 다 알아”라고 말하곤 했다.
그린 가(Green St.) 143번지의 아파트에 둥지를 튼 작업실은 백남준 비디오아트의 핵심이자 후기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레이저 작업이 진행된 곳이다. 1층과 지하 1층을 같이 사용해 공간이 넉넉했다. 미국 스미소니안박물관이 소장한 ‘일렉트로닉 슈퍼하이웨이’같은 미국 지도 형태의 작품이 여기서 제작됐다. 백남준이 골동품은 그랜드 스튜디오에 보관했다면 간간이 수집한 현대미술품은 그린 스튜디오에 두었다. 백남준은 일찍이 이브 클라인과 키스 해링 등의 작품을 갖고 있었다.
1990년대에 백남준은 자신의 한국 화랑이던 갤러리현대의 박명자 회장에게 그린 가 근처의 건물을 사두라고 수차례 제안했다. 박영덕 대표는 “그 당시 압구정 현대아파트 한 채 값이 그린 스튜디오 옆 주차장 딸린 건물값과 비슷했다”면서 “백남준 선생이 자신의 미술관을 지으려던 생각까지도 하셨던 것 같은데 지금은 땅값만도 천정부지로 올랐다”고 했다. 백남준의 스튜디오들은 띄엄띄엄 자리했으나 걸어서 오갈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말년에 지역 재개발 분위기가 돌자 백남준은 “내 마음은 재개발 안 하고 싶은데 다들 한다면 할 수 없지”라 했고 그의 생전에는 이뤄지지 않았던 재개발이 요즘 들어 한창이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