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전지현 분)’는 보통내기가 아니다.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은 젊은 남자를 보면 화를 못 참고 뒤통수를 후려갈긴다. 남자친구 견우(차태현 분)와 캠퍼스를 걷다가는 갑자기 “발 아파 죽겠다”며 신발을 바꿔 신자고 한다. 난생처음 하이힐에 올라선 견우는 쭈뼛거리며 걸음도 제대로 못 떼는데 가벼운 운동화를 신은 여자는 “나 잡아봐라”며 발랄하게 뛰어다닌다. 무엇이든 성미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 여자는 ‘엽기적인 그녀’다.
그런데 이 여자, 독한 얼굴 뒤로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상처를 숨기고 있다. 그녀는 깊이 아끼고 사랑한 애인을 1년 전 하늘로 떠나보냈다. 술을 퍼마셔도, 새로운 남자를 만나도 가슴을 할퀴고 지나간 생채기에는 좀처럼 새살이 돋지 않는다.
지난 2001년 개봉한 곽재용 감독의 영화 ‘엽기적인 그녀’다. 한국 로맨틱 코미디의 한 트렌드를 형성한 이 영화의 대표적인 촬영지로는 강원도 정선의 ‘타임캡슐 공원’이 꼽힌다. 질운산 중턱에 자리한 이곳은 죽은 애인과 견우 사이에서 힘들어하던 그녀의 제안으로 찾은 장소다. 견우와 그녀는 각자 써온 편지를 타임캡슐에 담아 소나무 아래에 묻은 뒤 2년 뒤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다.
원래 영화를 촬영할 당시에는 소나무 한그루만 덩그러니 서 있는 허허벌판이었다. 하지만 ‘엽기적인 그녀’의 성공으로 관광객들이 꾸준히 찾아오면서 한참 시간이 흐른 2011년 5월에야 공원으로 조성해 문을 열었다. 공원의 주소에 포함된 ‘엽기소나무길’이라는 도로명도 영화에서 따왔다.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카페에는 영화의 다양한 장면과 이미지들이 전시돼 있다.
공원에 가면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마음 깊은 곳에 품고 있으나 당장은 전하기 쑥스러운 메시지를 타임캡슐에 담아 보관할 수 있다. 100일·1년·2년·3년 등 이용 기간에 따라 대여료(1만~4만원)가 달라진다. 타임캡슐을 일정 기간 빌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구매할 경우 비용은 더 비싸진다. 정선버스터미널에서 45㎞나 떨어져 있고, 마을버스를 타더라도 종점에서 5㎞ 이상 걸어야 해 웬만하면 자가용으로 찾아가는 것을 추천한다.
개봉 후 18년이 흐른 지금 이 영화를 다시 마주하면 어설픈 구석이 군데군데 보인다. 억지스러운 상황 설정도 있고 산뜻하지 못한 유머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후반부에 몰아치는 멜로 드라마의 감정적 격랑은 지금 봐도 대단하다. 여전히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장면은 역시 견우가 그녀의 맞선남에게 ‘연애 수칙’을 일러주는 대목이다. 맞선남은 견우와 마음을 나누면서도 이따금 생각나는 죽은 애인의 기억에 괴로워하던 그녀가 부모의 등쌀에 몇 번 만남을 가진 남자다.
신승훈의 ‘아이 빌리브(I Believe)’가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이 장면에서 견우는 말한다. “술은 절대로 석 잔 이상 먹이면 안 돼요, 아무나 패거든요. 만난 지 100일이 되면 강의실로 찾아가서 장미꽃 한 송이 내밀어 보세요. 검도와 스쿼시는 꼭 배우세요. 마지막으로, 글 쓰는 거 좋아하거든요. 칭찬 많이 해주세요.”
맞선남으로부터 이 얘기를 전해 들은 그녀는 맞선남을 뿌리치고 견우에게로 달려간다. 몸이 부서져라 포옹한 다음 마음을 추스르고 함께 찾은 곳이 바로 타임캡슐 공원이었다. 그녀는 견우처럼 밝고 선한 남자를 통해 사랑의 참모습이란 특별한 노력 없이도 저절로 상대의 습관과 취향을 훤히 꿰게 되는 것임을, 꼭 내 곁에 두지 못해도 언제까지나 상대의 행복과 안녕을 기도하는 것임을 배웠다.
그리고 2년이 흐른다. 다시 만나기로 한 그 자리에 그녀는 역시나 오지 않았다. 견우만이 홀로 소나무 옆에 걸터앉아 2년 전 그녀가 쓴 편지를 꺼내 읽는다. “나 사실 너한테서 그 사람의 모습을 찾으려고 했었어. 널 만나면 만날수록 내 마음속에 있던 그 사람이 질투를 하는 것만 같았어. 네가 좋아지는 만큼 그 사람한테 죄책감이 느껴지는 거야. 그래서 네가 없는 동안 나 혼자서 그 사람을 잊어보고 싶어. 2년 후에도 내가 네 옆에 없다면 난 아직 용기가 없는 거야.”
눈물겨운 이야기로 관객의 손수건을 다 적셔놓은 영화는 놀랍게도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뼉을 치고 싶을 만큼 기분 좋은 결말을 예비하고 있다. 곽재용이라는 충무로의 낭만주의자는 두 사람이 상처를 안고 각자 제 갈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다시 만날 인연은 언젠가는 반드시 재회한다는 것을, 우연이란 노력하는 자에게 운명이 놓아주는 다리라는 것을 또박또박 강조하며 이야기를 맺는다.
실컷 울다가 갑자기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관객은 엉덩이에 털이 나는 대신 두 남녀의 앞날을 축복하며 꽃가루를 뿌려주고 싶어진다. /글·사진(정선)=나윤석기자 nagij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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