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우리 경제가 아수라장이 된 1998년. 김대중(DJ) 정부는 경기를 자극하기 위해 부동산 부양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손쉬운 청약제도부터 손질했다. 3월 재당첨 제한 폐지와 유주택자의 1순위 자격 부활을 필두로 11월에는 전매제한 철폐 등을 예고했다. 그런데 뜻밖의 암초에 부닥쳤다. 만 35세 이상 무주택 세대주에게 우선 공급하는 ‘무주택 우선 공급제’ 폐지 방침에 여론이 들끓었다. 장기 무주택자의 기득권을 왜 빼앗느냐는 반발에 한 발 물러섰던 정부는 이듬해 5월 폐지 카드를 다시 꺼내 들었다. 1년 전 주택정책과장을 맡아 주택경기 활성화 대책을 실무 총괄했던 이춘희 대변인(현 세종시장)이 총대를 멨다. 이번에는 ‘글로벌 스탠더드’ 논리를 댔다. “청약통장 가입 기간이 길다고 우선권을 주는 것은 시장 논리에 반합니다. 당첨자 선정은 민간 자율에 맡겨야 할 때가 됐죠.” IMF 관리체제여서 국제 기준을 내세우면 안 될 게 없던 시절, 무주택자 청약 ‘0순위’ 제도는 연말 밀레니엄 혼란 속에 사라졌다. 당시 날벼락을 맞은 청약 대기자는 어림잡아 200만명. 전체 청약통장 가입자의 절반이 넘었다.
IMF 위기는 규제 일변도의 주택 청약제가 시장 자율체제로 전환하는 일대 변혁기로 자리매김된다. 지금은 난수표가 된 청약제도가 온탕냉탕을 오가는 시발점이기도 하다. 주택 청약제도는 지난 1978년 제정된 ‘주택공급에 관한 규칙’을 말한다. 상위 법령인 주택법 시행규칙이 있음에도 별도의 공급규칙을 제정한 것은 그만큼 주택 부족난이 심각했다는 의미다. 당시 주택보급률은 60%를 밑돌았다. 입주자 저축인 주택청약통장이 만들어진 시기도 이때다. 예치금을 주택건설 재원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주택공급 규칙은 지난달 입법 예고한 개정안을 포함해 41년간 모두 140차례 바뀌었다. 연평균 3.4회꼴이다. 잦은 개편의 출발점이 된 IMF 사태 이후 20년 동안 한 해 평균 5.5회씩 변경됐다. 주무장관이 제 맘대로 고칠 수 있으니 주택 경기를 조절하는 손쉬운 수단으로 활용한 탓이다. 경기 부양에 나선 2015년 한 해 동안 무려 10차례나 개정됐고 현 정부에서도 13차례 달라졌다. 전직 국토교통부 고위관료는 “정권마다 정책목표를 추가하다 보니 제도가 복잡해졌다”고 설명했다. 주택도시기금이 줄어들자 ‘묻지마 통장’인 주택종합청약통장을 신설했고 무주택자 우선 공급 외에도 저출산·고령화 대책으로 특별분양제도가 확대됐다는 것이다.
잦은 개편의 부작용은 막심했다. 규제 완화 조치는 일정 시차를 두고 투기 심리를 자극하고 청약 과열을 낳았다. 반대로 정부가 규제의 고삐를 죄면 한참 뒤 주택경기 악화를 초래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악순환을 되풀이했다. ‘샤워실의 바보’는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DJ 정부 때 규제 완화는 참여정부 시절 집값 폭등의 부메랑으로 돌아왔고 반대로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참여정부의 투기 억제책의 후유증을 겪었다.
제도가 바뀔 때마다 유불리가 엇갈렸다. 때로는 청약가입자로부터 원성을 사기도 했다. 가점제가 도입되고 특별공급이 신혼부부, 노부모 부양 등으로 확대되면서 1인 가구와 주택 갈아타기 수요자들은 하루아침에 쪽박 신세로 전락했다. 청와대 청원코너에는 다양한 형태의 불만이 올라와 있다. 15년 동안 소형주택에 살고 있다는 청약 대기자는 “아끼고 아껴서 소형주택을 구매한 게 죄입니까. 4인 가족이 30평대로 이사 갈 기회를 똑같이 달라”고 호소했다. 난수표 청약제도 탓에 선의의 피해자도 속출한다. 해마다 100명 청약에 10명꼴로 부적격 당첨자로 탈락하는데 이 중 절반은 가점 계산 실수 같은 단순 착오다. 반대로 특별공급제를 악용해 위장전입은 물론 임신진단서 위조와 위장 결혼 같은 불법 행위도 횡행하고 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주택 보급률이 100%를 넘었는데도 청약 대기자 적체 현상이 심각하다는 점이다. 금융결제원에 따르면 6월 말 현재 청약통장 가입자 수는 2,497만명으로 1년 전보다 117만명 늘어났다. 이런 증가 추세를 감안하면 이미 7월에 중 가입자 수가 2,500만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아파트 연간 공급 물량이 40만가구인 것을 고려하면 청약 대기자 소진에 62년쯤 걸린다는 얘기다. 서울은 여간 심각한 게 아니다. 서울 지역 가입자는 654만명. 아파트 공급이 연간 5만가구 안팎이고 이 중 일반 분양물량은 절반에도 채 못 미친다. 3만가구가 분양되면 218년, 2만가구 공급 기준으로는 327년이 걸리는 셈이다. 이쯤 되면 당첨은 희망고문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무주택 기간이 길수록 당첨 확률이 높아 청약대기 기간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자의 반 타의 반 전세 난민으로 몰아넣는 구조다. 곧 시행할 분양가 상한제는 로또 아파트 기대감에 대기수요를 부추길 우려 또한 크다. 셋집에 사는 고소득층과 유주택 저소득층 사이의 형평성 문제도 있다.
완벽한 제도는 있을 수 없다. 어떤 정책이든 수혜자와 피해자가 있기 마련이다. 무주택자와 신혼부부 등에 대한 우대 조치를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지만 특정 계층에 대한 수혜가 과도하면 상대적 박탈감을 갖는 계층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주택 소유와 나이를 불문하고 가입하도록 한 이명박 표 ‘1인 1통장’ 제도를 유지하면서도 현 정부 들어 무주택자 위주인 가점제를 두 차례 (중형주택은 100%, 대형은 87.5%) 확대한 것은 모순이다. 정부가 주거복지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청약통장 가입자를 ‘봉’ 취급하고 로또 아파트로 희망고문한다는 비판은 그래서 나온다. 2004년 3조원도 채 안 되던 청약통장 예치금은 지난해 68조원으로 25배 폭증했다. 두성규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선임 연구위원은 “복잡한 제도를 단순화하되 장기적으로는 인구구조 변화에 대비해야 한다”며 “악성 미분양이 많은 지방의 민영주택에 대해서는 청약제에서 제외하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고 말했다.
청약제는 도입 이후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었지만 제정 당시의 골격에는 큰 변함이 없다. 오히려 제도는 더 복잡해졌고 청약 대기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 사이 정책 불신은 깊어질 대로 깊어졌다. 지금의 촘촘한 규제가 지속하지 못할 것이라는 건 경험칙이다. 어쩌면 역대 정부마다 깨고자 한 부동산 불패 신화가 건재한 것도 정책 일관성 부재가 원인일지도 모른다. 주택보급률 100% 시대에 청약 대기자가 2,500만명이나 줄 선 것은 그런 증표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권구찬 선임기자 chan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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