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수출규제에 맞서 소재·부품 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규제를 완화해달라는 업계의 목소리에 정부가 처음 호응했다. 화관법에서 정한 유해화학물질 실내 보관시설 중 단층건물의 8m 높이 규제를 일부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다층건물의 높이 제한은 아예 없애면서다.
15일 환경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단층건물의 높이 제한은 업계의 의견을 충분히 고려해 최종 결정할 것”이라며 “다층건물의 경우 높이 제한을 아예 없애기로 했다”고 말했다. 화관법 시행규칙에서는 유해화학물질 취급시설을 다층과 단층으로 구분해 높이를 규제해왔다. 다층은 높이 6m 미만, 단층은 8m 미만까지 설치 가능했다. 다만 단층건물은 20m 이하까지 높이를 올릴 수 있는 예외 규정을 뒀다. 벽·기둥·보 및 바닥이 내화구조이고 출입구에 방화문과 피뢰침을 설치하는 경우다.
문제는 화학물질안전원이 지난달 해당 고시를 개정하는 내용의 행정예고(안)을 발표하면서 불거졌다. 행정예고(안)에 단층건물의 높이를 20m까지 올릴 수 있는 예외 규정이 사라진 탓이다. 일본의 수출규제에 대비해 최대한 관련 재고를 확보해야 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보관시설의 높이 규제가 강화되면 그만큼 재고를 쌓을 공간이 부족해질 수밖에 없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유해화학물질을 보관하는 건물을 설치, 관리하는 데 판단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은 이런 행정예고(안) 자료뿐”이라며 “우리 입장에서는 용어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기업의 고민은 지난 12일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LG디스플레이 파주공장 현장방문에서 드러났다. 일본 수출규제로 어려움을 겪는 디스플레이 산업의 현황을 듣고 기업의 애로 해소를 돕기 위한 자리에서 한상범 LG디스플레이 대표이사가 부총리에게 직접 화관법 내 유해화학물질 실내 보관시설 높이 규제를 완화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파주공장의 냉동창고 높이는 9m로 단층건물의 높이 제한 예외 규정이 적용된다면 별 무리 없이 운영이 가능했다. 그러나 행정예고(안)에서 예외 규정이 사라짐에 따라 단층건물의 높이가 8m로 제한되면서 부품·소재 등의 저장이 불가능할 위기에 처했다. 부총리는 현장방문 이후 기자들과 만나 “LG디스플레이에서 높이 규제를 완화해줬으면 좋겠다고 해 환경부가 검토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환경부 역시 긍정적인 입장이다. 유해화학물질 보관시설의 경우 화재와 각종 물리적 위험에 대비한 안전장치를 이미 법령에서 강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층건물의 높이 규제를 완화해 기업의 저장능력을 높이더라도 화관법의 본래 취지를 훼손할 우려가 없는 셈이다. 환경부 관계자는 “시설의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는 규정이 이미 마련된 상황에서 높이 규제를 일부 완화하더라도 큰 무리가 없다”며 “행정예고(안)와 관련해 업계에서 들어온 의견을 좀 더 고민하고 검토해 31일 시행 때 반영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행정예고(안)는 단층건물의 높이 예외 규정뿐 아니라 다층건물이라는 용어도 사라지면서 업계에 혼란을 줬다. 환경부는 다층건물의 높이 규제를 완전히 없애 용어를 삭제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환경부 관계자는 “다층건물 역시 단층건물과 마찬가지로 유해물질을 쓸 경우 내화구조를 마련해야 한다는 등의 안전구조가 다 있다”며 “다층건물은 주로 아파트형 공장 등과 같은 형태인데 이때 기업 입장에서 층별 높이를 무리해서 올릴 이유도 없어 관련 규정을 없앤 것”이라고 전했다.
/세종=정순구기자 soon9@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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