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불황이라 미술시장이 힘들다”는 얘기가 돌지만 위기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호기가 된다. 불황 중에도 잘 팔리는 그림이 있다. 요즘처럼 경제 불확실성이 커지는 시기에는 국내외에서 두루 환금성이 좋은 외국 작가의 작품 거래가 활발하다. 국내 작가의 경우는 근현대미술의 거장급 작가가 선호된다. 가격 경쟁력이 좋은 저가 작품들 아니면 초고가 작품군의 거래가 왕성한, 이른바 시장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지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미술사적으로 검증된 거장급 화가의 작품은 ‘안전자산’으로 분류된다. 지난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 19세기 인상주의 미술과 20세기 현대미술 작품들이 거듭 최고가 신기록을 세운 것이 그 때문이다. 슈퍼 리치가 투자 포트폴리오의 일정 부분을 미술품으로 구성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미술품의 특성상 공급량은 제한적인 반면 이처럼 미술사적으로 검증된 작품들은 개인 컬렉터뿐만 아니라 미술관 등 기관도 확보에 열을 올리기 때문에 가격 기반이 탄탄하다.
지난 25일 막을 올려 29일까지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한국국제아트페어(KIAF·키아프)에서도 이 같은 분위기가 포착됐다. 미술품 군집 거래처인 아트페어는 시장 경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이번 키아프에서 최고가 출품작으로 화제를 모은 것은 독일계 디갤러리가 내놓은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황금빛 조각 ‘프린세스X’였다. 가격은 730만달러(약 87억5,000만원)로 책정됐다. 더페이지 갤러리는 베르나르 뷔페(1928~1999)의 30억원짜리 그림을 전면 배치했다. 페이스 갤러리가 야심차게 선보인 ‘빛의 마술사’ 제임스 터렐의 70만달러(약 8억4,000만원) 작품은 관람객으로 붐볐다.
한국 작가는 김환기, 백남준, 이우환이 강세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 미술사에서 이미 검증 완료된 작가들이다. 국제갤러리는 김환기의 1957년작 ‘정원’을 60억원에 내걸었다. 가나아트갤러리는 초록·빨강·파랑 등이 조화로운 김환기의 1971년작 전면점화를 이룬 작품을 50억원에 내놓았다. 다음 달 영국 테이트모던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예정된 백남준도 인기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소재의 씨메이(CMAY) 갤러리는 백남준의 2001년작 ‘걸리버’를 100만달러(약 12억원)에 선보였다. 누워있는 대형 TV 조각을 조그마한 모니터로 만들어진 소인(小人)들이 전선으로 묶는 모습을 위트 있게 보여준 작품이다. 학고재갤러리는 백남준의 1987년작 ‘로봇(라디오맨, 요셉 보이스)’을 60만달러(약 7억2,000만원)에 공수했다. 박영덕화랑은 백남준의 드로잉과 영화포스터 콜라주 등 평면작을 출품했다. 뉴욕 구겐하임미술관과 파리 베르사유궁전을 비롯해 올해만 퐁피두메츠, 디아비컨, 허시혼미술관 등에서 전시가 한창인 이우환의 작품도 시리즈별로 다양하게 국내외 여러 부스에서 만날 수 있었다.
아트페어뿐 아니라 최근 갤러리 전시 및 판매 동향에서도 외국작가가 강세다. 갤러리현대가 선보인 미국의 조각가 프레드 샌드백은 개념미술의 거장이다. 리안갤러리의 이미 크뇌벨의 작품은 불황이 무색하게 팔려나갔다. 국제갤러리는 슈퍼플렉스, 우고 론디노네, 앨름그린 앤 드라그셋 등 수요가 확실한 해외작가에 무게를 두고 올해 전시를 진행했다. 젊은 외국작가여도 미술관 전시이력과 소장내력, 전속화랑 등이 탄탄한 경우 국내 컬렉터들의 선호가 높다. 서촌 갤러리시몬에서 열린 필립 콜버트의 전시가 ‘완판’을 기록했고 학고재갤러리가 삼청로 본관과 청담점에서 열고 있는 안드레아스 에릭슨의 전시가 순항 중이다. 국내 분관을 둔 외국계 화랑들도 1960년대 팝아트의 거장 로버트 라우센버그(페이스)를 필두로 라이자 루(리만머핀 갤러리), 헤르난 바스와 마우리치오 카텔란(페로탱) 등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이로 인해 화단의 허리 격인 40~50대의 국내 작가들이 고충을 겪는다. 30대 이하의 작가들은 저렴한 가격으로 승부수를 둘 수도 있으나 이제 막 중견으로 진입한 작가들은 ‘낀 세대’로 소외되기 십상이다. 전속작가를 보유하지 못한 중소 화랑도 타격을 입는다. KIAF를 주관한 화랑협회의 한 관계자는 “페어 기간에 관람객이 많았고 실구매 고객도 적지 않았기에 경제 불확실성 속에서도 불황이라 단정할 수만은 없다”면서 “홍콩의 정치적 불안까지 가세해 글로벌 아트마켓이 한국을 주목하고 있기에 화랑, 작가 모두 경쟁력을 다지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글·사진=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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